[사람 말고도 살고 있네요] 꽃다지

올해는 추위가 빨리 오는 바람에 겨울이 너무 깊어 봄이 기다려지는 마음인데 아이들은 곧 봄방학을 하겠지요. 추위 때문인지 경기 때문인지 올 설날은 풍성함보다는 거리도 사람들의 차림새도 차분한 분위기입니다. 명절이라 해도 얼음 지치고 연 날릴 언덕 하나 갖지 못한 아이들은 스마트폰 게임에 빠져서 먹는 것도 잊고 방안에 틀어박혀 지내나 봅니다. 우리 자랄 때 옛날 풍경은, 지금쯤 동네 앞 들판 미나리꽝에 얼음이 한창 얼어 스케이트 타기 가장 좋은 때인데요. 옛날 우리들의 명절은 할아버지의 활약이 두드러지는 때입니다. 설빔만큼 중요한 선물이 할아버지가 만들어주신 연이었습니다. 동네 뒷산에 올라가 대나무 가지를 잘라다가 할아버지 졸라서 닥종이 연을 만들면 어찌 그리 씽씽 잘 날던지요.

우리가 아무리 따라 만들어도 할아버지가 만든 연만큼 잘 날지는 않았습니다. 스케이트 날을 세워도 할아버지가 만든 게 최고였고, 팽이를 깎아도 할아버지 낫으로 돌려 깎은 솜씨가 최고였습니다. 동무들이 할아버지 솜씨로 만든 연이나 팽이, 스케이트가 부러워서 하루 종일 따라 다니면 나는 잃어 버렸다 하고 다시 하나 만들어 달라고 보채 얻어 내서 하루 종일 산과 들을 누비며 다녔던 겨울의 기억이 참 행복합니다.

손발은 늘 동상으로 담배잎 찜질을 해야 했으며 밤이면 기침과 열에 들떠 앓았습니다. 그럴 때마다 할아버지는 인동넝쿨 삶은 물에 토종꿀 한 숟갈 타서 먹여줍니다. 달고 맛있던 꿀물이 먹고 싶으면 가슴을 두드리며 억지 기침을 해대곤 했었는데요. 할아버지의 약장에는 온갖 진귀한 뿌리와 진액이 병병이 담겨 있고 짙고 깊은 약향이 솔솔 났었습니다. 한겨울에도 산에만 올라가시면 망태 가득 약초를 캐 와서 말리고 갈무리해 약장을 가득 채우시곤 했습니다. 때로는 깊은 겨울에도 푸른 잎 나물거리들을 캐 오시곤 했는데요. 양지쪽에 난 지칭개나 벼룩이자리·광대나물·꽃다지 같은 것들입니다. 특히 꽃다지는 솜털 송송한 작은 잎이 추위에 떠는 아이 손 같아서 할아버지 캐다 놓은 걸 방 안에서 이 빠진 대접에다 기르기도 했습니다.

잘고 노란 꽃송이가 긴 꽃대를 타고 오른다.

한낮 창으로 드는 햇볕을 받아먹으며 그놈은 신기하게도 노란 꽃을 피워내곤 했는데요. 그럴 즈음에 설이 지나가고 정월 대보름 푸른나물을 뜯으러 들판을 기웃거리게 됩니다. 진달래나 개나리보다 훨씬 일찍 꽃을 피워 올리는 꽃은 설중화(雪中花)라 불리는 꽃다지인데요. '꽃다지, 꽃다지…' 참 예쁜 이름입니다. 주름치마 팔랑대던 이웃집 동생 순임이 같은 아련한 이름입니다. 십자화과의 2년생 초본으로 3월에 노란 꽃이 핀다는 이력을 가진 조그맣고 앙증맞은 우리 들꽃입니다. 잘고 노란 꽃송이가 점점이 모여서 긴 꽃대를 타고 올라와 주저리주저리 열려 피는 모습을 지켜보노라면 생명의 경이를 느낍니다. 쑥처럼 작아서 여간 캐도 양이 불지 않지만 한 군데 모여 자라는 특성이 있어 봄나물로 많이 이용하는 풀입니다. 민간에서는 부기를 빼는 데 사용하기도 하고 이뇨제로 쓰기도 했답니다.

여느해라면 벌써 꽃다지 순이 솟았겠지만, 올해는 추위가 심해서 양지쪽에도 잘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곧 추위를 이기고 장하게 겨울을 난 꽃다지들이 밭 언덕에 송송이 피어날 것인데요. 정월 대보름 부럼 상에 향기로운 봄나물들 올릴 수 있게 날씨가 빨리 풀렸으면 좋겠습니다. 양지쪽 따사로운 햇살 한 자락에도 마음이 속절없이 열리는 봄의 입구에서 행복한 한 해 꿈꾸시고 꽃다지처럼 향기롭고 예쁜 꽃들 피우시길 기원합니다.

/박덕선(경남환경교육문화센터 공동대표)

기사제보
저작권자 © 경남도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