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의 재발견-진주] 은빛 모래 옅어진 자리, 미래의 '새 빛' 흐르고

진주성 안에는 ‘영남포정사(嶺南布政司)’가 있다. 조선시대 경상남도 관찰사가 업무 보던 곳이니, 옛 도청 자리였다는 것을 상징한다. 이 지역 사람들에게는 아픔이 담긴 곳이다. 지금도 많은 이는 “일제 아니었으면 도청 옮길 일은 없었을 것”이라 말한다. 일제는 부산을 대륙진출 발판으로 삼았다. 1925년 도청이 결국 넘어가자 진주에서는 ‘슬픈 종말’이라는 탄식이 나왔다. 영남포정사를 보며 1980년대 초를 떠올리는 이도 있다. 부산에 있던 도청이 진주 아닌 창원으로 이전했다. 검은리본달기 등 도청환원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이곳 영남포정사에서 진주성 밖을 내다보면 진주경찰서가 어렴풋이 보인다. 그 옛날 진주성 안에 속하던 곳이다. 당시에는 큰 연못이 있던 자리다. 일제가 성곽을 허물고 못을 메웠기에 지금은 시가지가 형성돼 있다.

논개가 왜장과 함께 몸 던진 의암(義岩). 이를 처음 본 이들은 의아한 눈빛을 보내기도 한다. 이곳에 빠졌다 해도 목숨 잃을 정도까지는 아니라는 의미겠다. 의암은 위험한 바위라 해서 위암(危岩)이라 불렸다. 남강댐 건설 이후 물 흐름이 죽은 것이지, 그 이전에는 급류가 바위를 휘감았다고 한다. 누군가 빠졌을 때 찾을 방법이 없어 인근에서 해녀를 불러왔다는 말도 들린다.

남강댐이 들어선 이후 백사장 대부분은 사라졌다. 대곡면 정도에 그 옛날 흔적 정도가 남아 있다./박민국 기자

강은 기름진 땅을 선사하기도 했지만 ‘너와 나’를 구분 짓게 하기도 했다. 1920년대에는 배를 엮어 임시로 만든 ‘배다리’라는 것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다 도청 이전으로 성난 민심을 달랠 목적이었던 진주교가 놓였다. 경상남도 최초 철골구조 다리였다. 그럼에도 강을 사이에 두고 반대 편을 ‘배 건너 마을’이라 불렀다 한다. 심한 갈등까지는 아니었지만 ‘우리’로 뒤섞이는 데는 시간을 필요로 했다.

진주교를 놓고 아련한 기억을 떠올리는 이도 많다. 다리 건너다 잠시 발걸음 멈추면 맑은 물, 하얀 모래, 강을 헤집고 다니는 물고기를 눈에 담을 수 있었다 한다. 이 지역 사람들은 남강을 바라보며 종종 떠올리는 것이 ‘은빛 모래’다. 오늘날 수변공간으로 바뀐 진주성 아래도 모두 백사장이었다고 한다. 서에서 동을 가로지르는 남강은 구불구불 몸을 틀고 있으니 백사장이 많을 수밖에 없었겠다. 너른 백사장은 소싸움을 위한 좋은 장이었다. 소싸움이 열리면 몇 날 며칠 수많은 구경꾼이 모여, 모래바람 뒤집어쓰는 것 마다치 않았다고 한다. 일제강점기 때는 소싸움장에서 시대 울분을 대신 토했다고 한다. 물론 군중 모이는 걸 달가워할 리 없는 일제는 이 역시 막으려 했다. 1940년대 말 상금이 커지면서 전국에서 내로라하는 싸움소들이 몰리며 ‘진주소싸움’은 명성을 떨쳤다.

백사장은 또한, 아이들 놀이터이기도 했다. 땀과 모래가 범벅되면 물에 들어가 멱도 감으며 말이다. 이제 댐이 들어선 이후 물이 흐르지 않으니 백사장 대부분은 사라졌다. 대곡면 정도에 그 옛날 흔적만 남아 있다.

남강댐은 홍수 걱정에서 벗어나게 했고, 이후에는 남강유등축제를 큰 걱정 없이 열 수 있게 했다. 그렇지만, 그 대가도 만만치 않았다. 1969년·2001년, 두 차례 걸친 댐 건설로 무 재배로 유명했던 대평면, 그리고 수곡면은 수몰지역으로 변했다. 2001년에는 터전을 상실한 주민 1525가구 가운데 568가구가 8개 단지에 걸쳐 이주했다. 나머지는 지원금을 받아 뿔뿔이 흩어졌다. 댐이 들어서면서 물은 사천만으로 방류됐다. 옆 고장도 어장 황폐화·침수 피해에 한숨 쉬게 된 것이다.

댐이 만들어지며 조성된 진양호는 이 지역 사람들에게는 훌륭한 데이트·소풍 장소다. 공원에는 365계단이라 하여 이름 붙여진 ‘일년계단’이 있다. 데이트 온 이들은 이 계단에서 사랑을 속삭이기도 하겠지만, 운동선수들에게는 지옥훈련 코스로 악명 높다.

물문화관 앞 비(碑)에는 ‘진양호’ 글자가 큼지막하게 박혀있다. 1969년에 찾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 남긴 것이다. 박 전 대통령 흔적은 진주성 안에도 있다. 1962년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때 진주성 내 창렬사에 들렀다가 ‘7만 명에 이르는 백성은 죽어서도 변변한 대접을 못 받아 안타깝다’하여 별도 비석을 세우게 했다. 오늘날 그 비석 앞에는 ‘목숨은 장군이나 백성이나 똑같다’라는 내용을 담은 박정희 기념비가 자리하고 있다.

진주에는 대나무숲이 유독 많다. 이 지역에서는 높이 138m에 불과한 비봉산(飛鳳山)이 진산으로 꼽힌다. 봉황이 날개를 활짝 펴고 있는 모양이라 해서 이름 붙여졌다. 봉황은 대나무 열매를 먹는다. 태평성대를 상징하는 이 새가 고을에서 사라지면 안 된다 하여 대나무숲을 여기저기 심었다고 한다. 그뿐만 아니라 대나무는 생활도구로 유용하게 사용됐기에 대나무밭을 크게 하면 돈벌이도 좋았다고 한다.

1905년 설립된 진주교회는 백정신분 해방운동인 ‘형평운동’의 계기가 된 곳이다. 당시 백정은 일반 신자와 함께 예배를 보지 못했다. 1909년 외국인 선교사가 ‘평등인권사상에 어긋난다’하여 함께 예배드리려 했지만, 많은 신자가 불참하며 형평운동 시발점이 됐다. 이곳 교회에는 ‘진주 기미독립만세의거 기념종탑’이 있다. 1919년 3월 18일, 진주교회는 종탑을 울리며 이 지역 첫 독립만세의거를 알렸다.

1905년 본당으로 승격한 문산성당은 이 지역 최초 성당이다. 자리하고 있는 곳은 외곽지역인 문산읍이다. 지역 보수성 때문에 진주 시내로 들어가지 못하고 바깥에서부터 포교활동을 할 수밖에 없었던 듯하다.

망진산 봉수대는 조선 초 만들어져 외적 침입을 알리는 수단으로 사용됐는데, 1894년 동학농민항쟁, 1919년 3·1만세운동 때도 사용된 것으로 전해진다. 일제강점기 때 훼손된 것을 1995년 시민 2000여 명이 낸 6500여 만 원으로 복원했다. 남북통일 염원 뜻을 담아 백두산·한라산·지리산·독도·진주 월아산 돌을 모아 기단에 심었다. 통일이 되면 금강산 돌도 섞일 계획이다. 오늘날 진주 시가지는 반듯하게 정리된 느낌을 준다. 6·25전쟁 때 폐허 된 이후로 토지구획정리사업과 맞물려 복구사업을 했기 때문이다.

기사제보
저작권자 © 경남도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