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원봉 열사 동생 "잃어버린 명예를"…윤세주 열사 손녀 "독립의지 알려야"

밀양 출신 항일 투사들을 재조명하는 바람이 이는 가운데 동시대를 살았던 후손들도 "떠난 사람들을 이제는 제자리에 돌려놔야 한다"고 한목소리를 내고 있다.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 집안이라는 이유로 이들은 숨죽인 채 살 수밖에 없었고, 해방 후 억울하게 형제를 잃는 등 수난을 겪었다.

약산 김원봉이 친일파 등의 위협에 북으로 가고, 이후 벌어진 일가족의 기구한 사연이 있다. 김원봉의 막내 여동생 김학봉(82·밀양시 삼문동) 씨는 형제 11명 가운데 4명을 보도연맹 사건으로 잃는다. 그의 오빠 김봉철 씨는 희생된 동생들의 장례를 치렀다는 이유로 징역형을 선고받고, 평생 낙인 찍혀 살다 1986년 화병으로 숨졌다.

2009년에야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가 재심 권고를 하고, 2010년 부산고등법원이 김봉철 씨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약산 김원봉의 막내 여동생 김학봉 씨.

이런 세월을 버텨오던 학봉 씨는 2000년대 들어 자신의 존재를 알린다. 이후 국가보훈처에 오빠에 대한 훈장 신청을 했지만, 매번 거절당할 뿐이었다.

해방돼 김원봉이 중국에서 밀양으로 돌아왔을 때 기억이 또렷하다. "영남루와 천진궁 앞에 오빠를 보러 온 사람들로 꽉 들어찼지. 집집이 태극기를 걸고, 전국 각처에서 사람들이 찾아왔고. 큰오빠가 내가 초등학교 급장 하는 걸 보고 '커서 큰일 하겠구나' 칭찬했었지."

김원봉이 북으로 가고, 그 역시 시달렸다. "오빠가 북으로 가고, 경남여고 시절 사복형사가 날 찾아왔다. 오빠는 독립투사이니까 나는 떳떳했다. 근데 눕혀서 팔다리를 묶고 걸레 같은 걸 씌워놓고 주전자로 입과 얼굴에 물을 부어 '바른말 해라'면서 뺨을 때리고……."

여전히 밀양에 사는 그는 지금은 오빠 얼굴만 봐도 든든하단다. "외출할 때도 '오빠 집 잘 보이소', 잠들 때도 '오빠 잘 자이소' 인사한다. 얼마 전에는 꿈에도 나왔다. 벽지도 안 발려 개미 한 마리도 없이 훤하니 텅 빈 방에 오빠가 있더라. 침침하고 넓은 방이라서 '다 죽었구나' 느끼고 나는 막 소리를 내면서 울었다."

윤명화(84·부산시 금정구 구서2동 ) 씨는 석정 윤세주 열사의 일대기를 연도와 날짜 하나 틀림없이 외우고 있었다. 그에게 윤세주는 막내 할아버지다.

석정 윤세주의 종손녀 윤명화 씨.

역시 가족을 잃은 슬픔이 있다. 윤세주의 부인 하소악과 출옥 후 낳았던 아들 남선은 해방이 되고서 소식이 끊겼다. 모자는 1937년 중국 남경에서 5년 만에 윤세주와 해후했다.

그러나 중일전쟁이 일어나 남편은 일선에서, 부인은 후방에서 독립운동을 했었다. "해방된 조국서 만나자고 했지만, 사진으로만 남았다. 생사를 알 길이 없어 아픔이 더 크다."

윤세주의 중국 망명 후 남은 가족의 고통은 컸다. 요시찰 인물로 경주시 두메산골에서 살아야 했고, 1939년 이후에는 일본 경찰의 가택수색이 심해졌다. 윤명화 씨는 당시 상황을 기억한다. "군화 신은 채 무도하게 안방, 작은방, 사랑채 일시에 뒤집기 시작하면 처음엔 혼비백산 무섭고 떨렸다. 차츰 거듭할수록 의연하게 대처했다. 장롱이며 서랍까지 종조부의 단서를 찾아 혈안된 만행이다. 여러 번 가택 수색으로 종조부의 귀중한 자료들과 책 등을 색출해 갔을 것이다."

윤명화 씨는 후손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나는 그 생각뿐이다. 남은 후손들의 과업이 크다. 우리는 하나로 통일되지 못하고 있지 않나. 항일 투사들이 무엇 때문에 싸웠는지, 면 수제비를 먹으면서 어떻게 싸웠는지 후손들은 그걸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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