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용대 주둔지윤세주 최초 묘역…주민들 기리며 보존

태항산(타이항산맥·太行山脈)은 거대한 요새다. 중국 산시성과 허베이성의 경계를 이루고, 길이가 남북 약 600㎞, 동서 250㎞에 이른다. 새 한 마리 제대로 못 난다고 할 정도로 경사 급한 산맥이 긴 병풍처럼 펼쳐진다. 여기 산자락과 기슭마다 항일 전투를 벌인 조선의용대의 흔적이 남아 있다. 유적지들은 우리 독립운동사에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마을 대부분이 지금도 척박한 환경인데, 조선의용대는 이런 곳에서 생활을 이어갔다.

◇상무촌 = 조선의용대 최초 주둔지. 1941년 6월 도착, 7월부터 1942년 2월까지 이곳을 중심으로 전투를 벌인다. 대한민국순국선열유족회와 중국 좌권현 인민정부가 2002년 세운 '조선의용군 순국선열전적비'가 있다. 조선의용대가 머문 홍복사라는 절이 있었는데, 일본군이 불을 질러 허물었다고 한다.

마을 뒤편에 무명열사묘가 있는데, 이름 없이 떠나간 조선의용대원을 위해 여기 주민들은 매해 4월 5일 청명절 전후로 제사를 지낸다. 이곳에 사는 조은경(趙恩慶·84) 씨는 "대원들은 남녀 100여 명이 있었다. 우리 집에도 간부 2명이 생활했다. 조선의 비참한 생활을 담은 〈조선의 딸〉이라는 공연과 조선 노래를 부르던 모습도 기억한다"며 "내 손자에게도 이런 내용을 알려주고 계속 제사 지내게 할 것"이라고 말한다.

   

◇운두저촌 = 조선의용대 두 번째 주둔지. 마을 관문인 남각에는 선전 문구인 우리말 글씨가 벽면에 남아 있다. '왜놈의 상관놈들을 쏴죽이고 총을 메고 조선의용군을 찾아오시요!', '조선말을 자유대로 쓰도록 요구하자'. 글씨 상당 부분이 지워지기도 했다. 100년 넘은 남각은 중국 지방정부 문화재로 보호받고 있다. 지난해 허물어질 뻔했으나 복원 수리를 거쳤다. 마을 입구 당산나무 옆에 김무정(1905~1952)의 거처도 남아 있다.

◇중원촌 = 윤세주 전사 이후 조선의용대가 정착한 곳. 조선의용대 화북지대가 조선의용군으로 확대 개편했다. 원정사(元定寺)라는 절로 남아 있는데, 한단시 문화재로 보호받고 있다. 이곳 주인은 자비로 절 내부에 작은 전시관을 만들어 조선의용군 활동을 기리고 있다.

◇남장촌 = 조선의용군 마지막 주둔지. 조선의용군 총본부와 조선혁명군정학교(1944년 9월 설립)가 있던 곳. 건물은 지금 유치원으로 쓰인다고 한다. 이곳 교장이던 정율성(1914~1976)은 광주 출신으로 중국인민해방군가와 조선인민해방가를 작곡해 유명하다. 조선의용대는 이동하는 곳마다 학교를 세워 교육과 세력 결집에 힘썼다. 인근 오지산 황무지를 개간해 식량도 자급자족했다.

◇장자령 = 윤세주는 이곳 흑룡동 계곡에서 적을 유인하다 1942년 5월 28일 다리에 피격돼 동굴에서 숨어 지내다 발견됐지만, 6월 3일 숨을 거뒀다.

석문촌 진광화 열사와 윤세주 열사(오른쪽)의 최초 묘. 묘소 뒤로 태항산이 보인다.

◇석문촌 = 윤세주와 진광화 열사가 최초 안치된 곳. 숨진 그해 10월 이곳에 모셔졌다. 이후 1950년 조성된 중국 국립묘지 격인 한단시 진기로예열사능원으로 이장됐다. 2004년 개관한 '조선의용군 열사기념관'도 있다. 1층짜리 건물에 조선의용대의 활동을 시간순으로 여러 사진과 우리말로 전시해놓았다. 2005년 묘지 주변에 송백과 무궁화를 심어 '한·중 우정의 숲'을 만들기도 했다.

십자령(十字岺)에서 전사한 중국 팔로군 부사령관 줘취안(左權·좌권·1905~1942)의 최초 묘역도 볼 수 있다. 그는 중국 최고 정치인들이 추모하는 인물로, 묘역은 국가 지정 문화재로 보호받고 있다. 이곳을 관리하는 양애공(楊愛公·84) 씨는 "초장 장면과 장례식을 목격했다"면서 "아들을 시켜 계속 일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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