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일 투사의 흔적을 찾아서] (3) 치열했던 태항산 전투의 현장

조선의용대가 걸어온 길을 보면, 한국과 중국의 항일 운동사, 조선독립운동사, 중국 혁명사 모두에 걸쳐 있다. 일제강점기 우리 독립운동사에는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계열이 협동한 노력이 있었다. 민족이 갈라지는 비극을 방지하려 애쓴 역사였는데, 민족혁명당과 조선의용대도 그 중 하나다.

중국은 제2차 국공합작으로 제국주의에 대항할 통일 전선을 형성했다. 조선의용대는 무한에서 창설할 때 100여 명으로 2년 8개월여 중국 국민당 지구에서 활동한다. 이후 주력이 1941년 화북으로 이동해 중국 공산당의 주력 부대인 팔로군(八路軍) 근거지에서 작전을 펼친다.

1942년 5월 일본군이 대륙에서 약 40만 명을 동원했다는 소탕전을 벌이자 중국 팔로군은 '반소탕전'으로 대항한다. 태항산(太行山) 일대에서 펼쳐진 반소탕전은 중국에서도 최대 항일 전투로 꼽힌다. 이곳에 조선인들이 있었고, 이들이 화북으로 이동한 조선의용대였다.

1938년 10월 10일 중국 임시수도 한구 대공중학교 자리에서 창립한 조선의용대. 앞줄 표시된 석정 윤세주 열사, 한 사람 건너 의용대 깃발 중앙이 약산 김원봉 총대장, 맨 뒷줄 오른쪽 네 번째가 김학철 선생. /밀양문화원

조선의용대 화북지대 등이 참여해 꾸렸던 조직으로 '화북조선청년연합회'가 있었다. 1942년 후반부터 조선의용대 화북지대와 화북조선청년연합회는 '조선의용군'과 '조선독립동맹'으로 확대 개편된다. 조선의용군은 해방 당시 1000여 명에 달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조선의용대가 북상한 까닭 = 조선의용대의 북상은 멀고도 험했다. 지금은 무한에서 태항산 전적지가 있는 한단(邯鄲)시 섭현(涉縣)까지 고속열차가 개통해 3시간여 걸리지만, 당시에는 1000㎞ 넘는 그 길을 걸어서 이동했다. 1941년 1월 1일 출발한 일행이 태항산 자락에 도착하기까지 5개월여 걸렸다고 한다.

1935년 전후 수많은 조선인 동포가 있었던 화북에는 군사 조직이 없었다. 화북은 일본군의 기동 사령부가 있어 조선의용대가 적구에 침투해 직접 전투를 벌일 수 있는 장소였다. 아울러 조선의용대는 북상을 통해 베이징, 나아가 중국 둥베이(東北)지방인 만주에서 게릴라 항일 투쟁을 벌이던 이들과 결합해 한반도로 진격하거나 인천으로 상륙하는 작전을 펼쳐 일제를 몰아낼 구상을 했다고 한다.

◇'뛰어난 이론가' 윤세주 = 조선의용대는 전쟁 상황에서 선전에서 교육, 직접 전투까지 다양한 역할을 했다. 처음에는 선전·선동 활동을 벌였다. 대원 가운데 우리말과 중국어, 일본어에 능통한 이가 많아 건물에 글씨를 남기고, 전단을 배포하고, 확성기를 통해 방송하는 형태였다.

부대의 주력이 화북으로 이동하자 총대장 김원봉은 윤세주에게 중책을 맡긴 것으로 보인다. 조선의용대에서 윤세주는 정치위원이자 뛰어난 이론가였다. 조선의용대가 포로 공작을 펼치는 데도 윤세주의 역할이 컸다고 한다. 그는 직접 포로수용소를 찾아 조선인들을 항일 부대원으로 편성하기도 했다.

화북으로 이동한 이후에도 그렇고, 지금까지도 윤세주는 "조선 민족혁명당의 영혼", "뛰어난 선전선동가"라는 중국인들의 칭송을 듣고 있다.

◇동족상잔의 비극, 한·중 우애의 싹 = 1940년대 조선인 수십만 명이 일본군으로 징집됐고, 이 가운데 절반은 중국 전선으로 투입됐다. 이들과 조선의용대가 맞설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사실상 6·25 전쟁 훨씬 이전에 동족상잔의 비극이 시작됐던 것이다. 더욱이 반소탕전에서 일본군을 이끌던 홍사익(1889~1946)은 조선인으로 이후 육군 중장까지 오른 인물이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전범재판소를 거쳐 처형됐다.

요컨대 조선의용대는 일본군이 항복하는 최후까지 항일 무장 투쟁을 벌였다. 많아야 수백 명에 불과했던 이들이 수십만 대군과 폭격에 맞섰다. 앞서 1941년 12월 호가장(胡家莊) 전투 또한 치열했다. 여기서 한쪽 다리를 잃었지만, 문학 등을 통해 잊힌 민족사와 남북에서 모두 왜곡된 독립운동사를 복원하려 했던 '조선의용군 최후의 분대장' 김학철(1916~2001)의 삶도 유명하다.

반소탕전에서는 함정에 빠진 팔로군을 위해 적을 유인해 퇴로를 열어주려고 조선의용대원들이 활약한다. 이 과정에서 윤세주와 진광화(1911∼1942) 등이 전사했다. 팔로군에는 중국 현대사에 큰 족적을 남긴 덩샤오핑(鄧小平·1904~1997), 저우언라이(周恩來·1898~1976), 펑더화이(彭德懷·1898~1974) 등이 있었다. 윤세주 등 조선의용대는 이들이 도피할 수 있도록 희생을 했던 셈이다.

이에 대해 중국 난주 장액사범학원 석건국 교수는 논문을 통해 "중국 인민에게 있어서 조선의용대 화북지대의 광대한 장병들은 위대한 국제주의전사였고 중국 인민의 해방 사업을 위해 용감히 싸운 외국의 벗이었다"며 "적 후방 항일 근거지에서 조선의용대의 전투 역사는 중·한 두 나라 인민들의 특수한 친선을 맺어놓았다. 이는 두 나라 인민들이 사이좋게 합작한 상징이며 또한 단결과 진보의 표지이기도 하다"고 밝혔다.

서울시립대 염인호 교수도 "침략자에 맞서 조선인들이 중국 민족과 공동으로 투쟁한 귀중한 역사적 경험을 축적했다"며 "과거 중국 공산당 중앙과 긴밀히 연대해 항전했던 사실은 21세기 한·중 양국 우호 증진에 일정한 기여를 할 것"이라고 평가했다.

<바로잡습니다>

△1월 24일 자 6면에 보도된 '항일 투사의 흔적을 찾아서 (1)약산 김원봉과 석정 윤세주' 기사 가운데 '1911년 11월 메이지 일왕 생일 축하 행사를 위해 준비한 일장기를 변소에 처넣어 심한 구타와 퇴교를 당한 일화'라는 부분에서 날짜상 1911년 4월 29일 천장절이 맞으므로 이를 바로잡습니다.

이 기사는 석정 윤세주 열사 기념사업회 지원을 받아 중국 역사탐방 동행취재로 이뤄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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