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일 투사의 흔적을 찾아서] (2) 의열단, 민족혁명당, 조선의용대

동지(同志). 김원봉과 윤세주의 관계를 나타내는 데 이보다 적절한 낱말은 없다. 나라 잃은 슬픔을 품고 젊은 시절 망명길에 올랐으나 일제 35년은 이들의 기세를 꺾지 못했다. 가장 끈끈한 최상의 인간관계가 아니었다면, 함께 그 세월을 버티기 어려웠을 것이다.

고관과 관공서에 대한 폭렬(爆烈)투쟁으로 일제가 치를 떨며 두려워했던 '의열단(義烈團)', 일제식민지시대 최후의 항전으로 대변되는 '조선의용대'에서 김원봉과 윤세주는 중심에 있었다. 국내외 좌우 독립운동 단체들을 단일화해 지금으로 치면 거대 통합 정당인 '민족혁명당'을 통해 두 사람은 새 세상을 향한 길을 제시하기도 했다.

   

◇테러리즘을 넘어 = 3·1운동 이후 독립운동이 위축됐을 때 의열단의 활약상은 민족에게 환호의 대상이었다. 그런데 의열단을 '테러 조직'으로 보는 경우가 있다. 마땅히 죽여야 할 대상 '7가살(七可殺)'과 5가지 파괴 대상을 정한 대목만 보면, 오늘날 관점에서 잔인한 목적과 행위로 보일 수 있다. 7가살은 '조선총독 이하 고관, 군부 수뇌, 대만 총독, 매국적(賣國賊), 친일파 거두, 적의 밀정, 악덕 지방유지를 뜻하는 반민족적 토호열신(土豪劣紳)', 5파괴는 '조선총독부, 동양척식회사, 매일신보사, 각 경찰서, 기타 외적 중요 기관'이다.

그러나 일제가 4000년 한민족의 역사를 송두리째 빼앗고, 3000만 민족을 노예로 만들고, 삼천리강토를 수탈해간 시대적 배경이 있다. 의열단의 투쟁을 모질었다고 비난할 수 없는 까닭이다.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은 〈약산 김원봉 평전〉에서 "한국사의 의열투쟁이 최근 세계 각처에서 나타나고 있는 테러와 다른 것은 국권 회복과 민주화를 요구하는 정의의 실현 방법으로 자신을 희생하는 지극히 도덕적 수단의 목표였다는 점이다"라고 설명한다.

의열단은 뚜렷한 이상이 있었다. 선각자다운 면모도 보인다. 특히, 김원봉이 단재(丹齋) 신채호(1880~1936)를 만나 1923년 1월 중국 상하이에서 한 달간 작성돼 세상에 나온 '조선혁명선언'은 의열단 정신을 오롯이 담고 있다. 같은 해 의열단은 비록 실패했으나 일본 육군대장 다나카 처단을 시도한 상하이 황포탄 의거를 통해 중국과 세계에 존재를 알리기도 했다.

1932~35년 중국 난징에서 독립운동 군사 간부를 키운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터로 알려진 천령사에서 석정 윤세주 열사 기념사업회 주관 역사탐방단(1월 4일~10일)이 묵념을 하고 있다.

'강도 일본이 우리의 국호를 없이 하며, 우리의 정권을 빼앗으며, 우리 생존적 필요조건을 다 박탈하였다'로 시작해 '민중은 우리 혁명의 대본영이다. 폭력은 우리 혁명의 유일무기이다. …… 이상적인 조선을 건설할지니라'라는 구절로 끝나는 이 선언문은 외교론과 독립전쟁 준비론 등을 비판하고, 혁명과 투쟁 방법을 강조한다. 선언문은 5개 장 6400여 자로 '조선총독부 소속 관공리에게'라는 강한 경고 문서와 함께 국내외로 살포됐다.

1926년 의열단 20개조 강령을 보면, '조선민족의 자유독립'과 '진정한 민주국 건립'은 물론 '언론·출판·집회·결사·주거 자유권' '선거권' 등을 담고 있다. 심지어 '지방자치', '여자의 권리를 정치·경제·교육·사회상에서 남자와 동등으로 할 것', '국가 의무교육 직업교육', '대주주 토지 몰수' 등도 언급돼 있다.

◇한결같았던 투쟁 = 김원봉과 윤세주의 투쟁 방식은 한결같았다. 항일 운동 가운데 거의 처음으로 독자적인 무력을 양성했다. 김원봉은 1932년 중국 난징에서 독립운동 군사 간부를 키울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를 열고, 윤세주는 1기생으로 참여한다. 35년까지 1~3기 모두 125명이 이곳을 졸업했다. 학교 터는 '천령사'라는 작은 절 형태로 낡은 콘크리트 건물이지만, 난징의 시멘트 공장이 밀집한 계곡 한편에 남아 있다.

의열단이 참여했던 정치 조직으로 '민족혁명당'은 같은 시기 임시정부와 합하게 되면, 독립운동 세력은 그야말로 단일한 힘을 보여줄 수 있었다. 이후 군사 조직도 만들어진다. 1938년 중국 한커우(漢口)에서 결성된 '조선의용대'다. 1940년 조직된 임시정부의 광복군보다 앞서 만들어진 것이다.

중국 무한 '호북성총공회' 자리로 조선의용대 창립지로 알려진 장소. 1911년 쑨원(孫文)이 일으킨 신해혁명(辛亥革命) 발발지로 이에 대한 기념 조형물과 비석 등이 있지만, 조선의용대가 남긴 흔적은 찾기 어렵다.

1937년 7월 일제는 중국 침략을 본격화했다. 중일 전쟁은 1945년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로 일본이 항복할 때까지 이어진다. 이 시기 조선의용대는 이역만리에서 중국군과 함께 일제에 대항했다. 조선의용대는 1941년 한 차례 나뉘어 대륙을 이동한다. 내부 구성원들의 이념 갈등이 작용했다는 분석도 있는데, 일부는 중국 베이징(北京)과 텐진(天津) 등이 걸친 화북(華北)으로 옮긴다.

김원봉은 함께 북상 못 하지만, 윤세주는 화북지대를 이끄는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활약한다. 이는 동지였던 두 열사의 갈림길이 돼버렸다.

김원봉이 이끌던 조선의용대는 이후 광복군 제1지대로 개편됐다. 임시정부에서 김원봉은 군무부장(국방부 장관) 등을 맡는다. 하지만, 김원봉은 1942년 태항산 전투에서 윤세주가 적탄에 맞아 전사했다는 소식을 듣는다. 또, 그는 충칭(重慶)에서 동지이자 부인이던 박차정(1910~1944)을 잃는다. 조선의용대에는 여성 대원들도 있었는데, 박차정은 부녀복무단장이기도 했다.

※이 기사는 석정 윤세주 열사 기념사업회 지원을 받아 중국 역사탐방 동행취재로 이뤄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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