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의 재발견-남해] 거저 얻은 보물섬이 아니오, 억척같이 가꿔온 섬이오

상주면 양아리 벽련마을에서 바로 눈앞에 보이는 섬은 '노도'다. 노도까지는 낚싯배로 10분 정도 가면 닿는다. 하지만 330년 전 꼿꼿한 선비에게 이 길은 한없이 멀었다. 한양에서 경남이 먼 땅이었고, 남해는 경남 땅에서 떨어진 섬이었다. 노도는 섬에서 또 떨어진 섬이다. 예나 지금이나 물살이 거칠었던 바다는 섬과 섬 사이를 더욱 벌려놓았다. 동력선으로 10분이지 돛에 의지하는 배는 꽤 시간을 들여 눈앞에 있는 섬에 닿았을 테다. 선비는 섬 언덕배기 한쪽에 초가를 지었다. 먹을 것이라고는 솔잎을 넣은 피죽과 자신이 파놓은 샘뿐이었다. 왕에게 미움받은 선비는 살림도 마음도 가난했다. 하지만, 그는 이곳에서 〈사씨남정기〉와 〈구운몽〉 등을 써낸다. 노도는 김만중(1637~1692)이 유배됐던 곳이다. 우리 문학사에서 손꼽는 귀한 자산은 외롭고 척박한 삶에서 솟았다. 넉넉하지 않았지만 그래서 더 많은 것을 가지게 된 섬 남해는 그런 면에서 옛 어른과 닮았다.

부족한 것을 탓하지 않았다

'다랑이'는 비탈을 깎아 만든 계단식 논이다. 너른 들판을 가질 수 없었던 산간지역 사람들은 비탈을 깎아 씨를 뿌렸다. 다랑이는 없이 살았던 사람들이 악착같이 살림을 꾸렸던 흔적이다. 가천마을(남면 홍현리)에 펼쳐진 다랑이 역시 그 억척스러움이 다를 게 없다. 하지만, 이곳 다랑이는 마을 너머 펼쳐진 바다와 더불어 사뭇 다른 풍경을 자아낸다. 부지런한 사람과 호젓한 섬이 만들어낸 평온한 인상이다.

다랑이는 남해 곳곳에서 볼 수 있다. 그만큼 너른 들판이 귀했다는 증거다. 망운산(786m), 금산(705m)을 비롯해 호구산(627m), 설흘산(481m), 대방산(468m) 등 산과 구릉이 두루 뻗친 섬은 농사짓기 편한 땅을 찾기 어려웠다. 그래도 부지런한 사람들은 땅을 깎고 갈아서 씨를 뿌리고 작물을 심었다. 남해 전체면적(355.89㎢) 가운데 경지면적(84.69㎢)은 23% 정도다.

가천 다랭이논./박민국 기자

땅이 아쉬웠던 섬사람들 눈은 사방을 둘러싼 바다로 향했다. 하지만, 이 바다는 이름이 같은 땅에 유난히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바다와 맞닿은 땅은 큰 배를 대기 적당한 곳이 드물었다. 거센 물살 또한 뱃사람들을 고달프게 했다. 뭍과 떨어진 섬은 애써 잡은 수산물을 거래하기도 불편했다. 그럴듯한 어항을 여럿 품은 통영·거제와는 달리 여기 사람들은 고기잡이만으로 살림을 크게 불리지 못했다. 바다에서 거둔 수확으로 큰 장사를 하겠다는 사람들에게 남해는 매력적인 곳이 아니었다. 그나마 남해에서 내세울 만한 어항은 1920년대 일본인이 개발한 미조항 정도다. 대부분 바닷가 마을 사람들은 소규모 어업으로 살림을 꾸렸다.

그래도 남해 사람들은 부족하고 아쉬운 환경을 탓하지 않았다. 만을 낀 바닷가 사람들은 부지런히 조개 등을 양식했다. 먼바다 고기잡이가 버겁다고 해서 일손을 놓지도 않았다. 여기 사람들은 나가서 얻을 수 없다면 불러들여 얻을 줄도 알았다. 지족마을(삼동면 지족리) '죽방렴'과 해라우지마을(남면 홍현리) '석방렴'은 그런 명민함이 낳은 어업 형태다. 이곳 사람들은 물이 들고 날 때를 살펴 적당한 곳에 대나무를 꽂거나 돌로 울타리를 쌓아 고기를 가뒀다. 특히 죽방렴에서 잡아들인 멸치는 '죽방멸치'라고 불리며 예부터 유명했다. 뱃사람들을 고달프게 했던 거센 물살은 멸치 살에 탄력을 더해 '죽방멸치' 이름을 드높였다.

석방렴./박민국 기자

뭔가 아쉬운 땅과 바다가 서로 어울려 이곳 사람들에게 안긴 선물도 있다. 남해 특산물인 마늘·유자·시금치 등이다. 땅이 좁은 탓에 생산량이 돋보이지는 않았지만 그 맛은 유별났다. 여기 사람들은 풍부한 햇살을 잘 받아들이는 땅과 소금기 머금은 바닷바람 덕이라고 설명한다. 물론 싹수가 보이는 작물에 달라붙어 생산량을 늘리고 품종을 개량한 이곳 사람들 부지런함도 그 유명세에 보탬이 됐다.

현재 남해 주요산업은 그 수가 줄어들기는 해도 농·어업이다. 10가구 중 3~4가구는 농업 또는 어업을 하며 농·어업을 겸하는 집도 많다.

그리고 착실한 관광자원 개발로 숙박·음식업 종사자가 늘고 있다.

뭍과 섬, 섬과 섬을 이은 다리

남해에 시외버스가 드나들기 시작한 때는 1966년이다. 차를 실을 수 있는 배 '금남호'가 남해와 하동 사이 좁은 바다인 노량해협을 오가면서다. 사람들은 차를 탄 채로 바다를 건널 수 있었다. 그래도 차를 옮긴 것은 결국 배였다. 1960년대까지 남해는 섬이었고 사람들에게는 '남해도'라는 이름이 익숙했다.

남해 상징이자 종종 경남을 상징하는 어여쁜 다리 '남해대교'가 노량해협 위를 가로지른 것은 1973년이다. 양끝에 늠름한 교각 두 개만 세우고 강철선에 길을 의지한 이 다리는 그 자체로 드문 볼거리였다. 특히 남해대교는 남해 땅과 하동 땅 한 자락을 끼고 바다 풍경까지 품으며 섬을 찾은 이들을 입구에서부터 설레게 했다. 뭍사람을 들뜨게 하는 매력 넘치는 섬은 다리가 놓이면서 나라 안에 두루 소문이 났다. 남해를 찾는 사람들 덕에 남해군도 쏠쏠하게 살림을 불릴 수 있었다.

창선-삼천포 대교./박민국 기자

다리는 섬에 묶였던 사람들이 새로운 희망을 찾아 뭍으로 떠나는 길목이기도 했다. 때마침 불어닥친 산업화 바람은 섬사람들 마음을 더욱 부추겼다. 1960년대 한때 13만 7000명을 웃돌던 남해 인구는 1965년 이후 오름세가 꺾여 1985년에는 9만여 명, 현재 5만여 명으로 줄었다.

노량해협에서 역할을 잃은 금남호는 지족해협을 오가며 남해와 창선을 잇는다. 그러다 1980년 '창선교'가 놓이면서 금남호는 창선과 삼천포 사이 바다로 항로를 옮긴다. 이어 2003년 창선·삼천포대교가 개통되면서 섬과 뭍을 이었던 기특한 배는 그 기능을 다한다. 뭍과 섬, 섬과 섬 사이 다리가 놓이면서 바깥사람들에게 '남해도'는 '남해'로 더욱 익숙해진다.

드센 남해…더한 창선

넉넉하지 않은 섬사람들은 출세할 길을 바다 건너에서 찾았다. 척박한 환경을 원망하지 않던 부모들도 자식만은 뭍에서 공부시켜야 한다는 각오가 남달랐다. 늘 고단했던 부모는 자식을 진주·부산·서울 등 큰 도시로 내보내며 어깨에 한 번 힘을 주곤 했다.

섬 생활에 지친 사람들도 뭍으로 향했다. 참을성 많고 부지런한 사람들은 밖에서 무슨 일을 해도 제 몫을 해냈다. 하지만, 큰 도시에 사는 어설픈 사람들은 촌을 무시했고, 촌을 지나 바다 건너에 있는 섬을 무시했다. 섬사람들은 더욱 단단해져야 했고 당당해야 했다. 섬에서 품은 성정과 밖에서 다진 결기는 성공한 남해 사람들이 지닌 공동자산이 됐다. '밖에 나가서 다 출세했다'는 남해 사람들 자랑에는 과장은 있되 빈말도 아니다. 남해 사람들은 밖에서 자신만큼 힘들었을 고향 사람들을 유난히 잘 챙겼다. 큰 도시에 있는 남해 향우회는 어느 지역 향우회보다 돈독하기로 유명하다. 여기 사람들은 섬 밖에서든 안에서든 향우회를 업지 않고서는 큰일을 못한다고 믿는다.

그런 남해에서도 창선은 유별나다. 1980년 창선교가 놓이기 전까지 창선은 남해에서 또 떨어진 섬이었다. 남해 사람들이 뭍사람들에게 겪는 설움을 창선 사람들은 남해읍 사람들에게 당하곤 했다. 드센 사람들에게 지지 않으려면 더 드셀 수밖에 없었다.

'드세다', '빼지다', '독하다'는 수식은 경남에서도 유난히 남해 사람들 앞에 잘 붙는다. 여기 사람들도 그런 말을 태연하게 받아들인다. 오히려 그런 평가가 남해 사람들 생활력을 잘 드러낸다고 홀가분하게 정리한다. 그 '생활력'이라는 말에 부지런하고 똑똑하며 자존심 강하다는 뜻이 담겼다는 게 이곳 사람들 해석이다.

그 풍경을 보물로 삼은 섬

남면 서남쪽 길은 향촌·선구 바닷가를 끼고 돌아 사촌해수욕장을 지난다. '한국의 아름다운 길'로 선정된 길이다. 창선·삼천포대교와 더불어 남해에 있는 '한국의 아름다운 길'은 두 개다. 하지만, 그런 별난 수식으로 섬을 감싼 수려한 풍경에 차별을 둘 이유는 없다. 섬 둘레를 감싼 길은 지나치기도 머무르기도 좋다. 이곳을 찾는 사람들은 섬 어디서든 산과 바다를 고루 즐길 수 있다. 남해군도 그런 땅 특성을 명민하게 파악해 '걷기 좋은 길'을 조성하고 있다. 남해가 자랑하는 풍경을 배경으로 삼은 길에는 '바래길'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바래'는 갯벌과 갯바위에서 해초·해산물을 캐는 것을 일컫는 남해 토속말이라고 한다. 이 길이 품은 매력을 일찍 느낀 이들은 남해를 종종 '차로 갈 수 있는 제주도'라고 일컫는다.

남해 자연이 품은 매력을 가장 효율적으로 볼 수 있는 곳은 금산(상주면)이다. 기암괴석으로 뒤덮인 산은 그 자체로 매우 잘생겼다. 게다가 이곳은 남해가 품은 바다를 가장 넓게 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정상에서 멀리 보이는 고운 모래밭, 그 너머에 평온한 바다, 곳곳에 올망졸망 솟은 섬은 경쟁하듯 눈맛을 돋운다. 산 정상 아래에는 절벽을 배경으로 '보리암'이 자리하고 있다. 낙산사 홍련암(강원도 양양), 보문사(강화도)와 더불어 이 나라 '3대 기도처'로 꼽는 비범한 곳이다. 금산은 남해군이 정리한 '남해 12경' 가운데 '1경'이다. 남해군은 그 정도로 부족하다 싶었는지 금산 안에서 볼 수 있는 풍경만 모아 '금산 38경'을 뽑아놓았다. 또 금산은 시인 이성복(1952~ )이 1986년 시집 〈남해 금산〉을 발표하면서 감수성 넘치는 문학도들에게 영감을 준 곳이기도 하다.

금산 보리암./박민국 기자

금산이 빼어난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남해 제일봉인 망운산을 빼놓을 수는 없다. 망운산 중턱에는 충무공과 임진왜란 때 숨진 이들 영혼을 모셨다는 화방사가 있다. 절 근처에는 천연기념물 산닥나무 자생지가 있다. 화방사에서 산 정상에 있는 망운암까지 이어지는 길은 등산객에게 인기가 높다. 남해 제일봉에서는 너른 바다와 오목한 만, 이웃 여수·사천 등이 한눈에 들어온다.

남해를 대표하는 바다 풍경은 상주·송정해수욕장이다. 금산 정상에서 내려다보이는 백사장이 바로 이곳이다. 여름에만 100만 명 넘게 찾아온다는 상주 해수욕장은 고운 모래와 백사장 둘레 소나무 숲이 유명하다. 이웃한 송정 해수욕장 역시 모래가 곱기로만 따지면 으뜸이다. 사람 발길이 드문 겨울, 송정 백사장에서는 이곳을 거닌 새 발자국도 또렷하게 볼 수 있다.

섬이 품은 이국적인 매력은 이를 잘 활용한 외국 마을 두 곳에서 다시 보게 된다. 삼동면 물건리에 있는 독일마을과 이동면 용소리에 조성한 미국마을이다. 각각 제나라 건물 양식을 고스란히 들여온 독일·미국마을 집은 교포들에게 분양하고 있다. 또 두 마을 모두 민박을 운영한다. 그 생김새가 유별난 건물들은 남해 풍경 덕에 마치 제 나라 땅에 세운 듯 능청스럽게 이국적인 모습을 뽐낸다.

독일마을./박민국 기자

독일마을이 들어선 언덕에서 바다를 내려다보면 바다와 마을 사이를 가로지르는 숲이 눈에 띈다. '물건방조어부림'이라고 불리는 이 숲은 태풍과 염해에서 마을을 지켜주고 나무 그늘이 고기를 모이게 한다는 기특한 숲이다. 길이 1.5㎞, 너비 30m로 조성된 숲에는 팽나무·상수리나무·느티나무·이팝나무·후박나무 등 나무 40여 종이 심어져 있다.

충무공의 마지막 전투

이순신(1545~1598)이 벌인 마지막 전투는 1598년 11월 19일 노량해협에서 벌어진다. 나라를 송두리째 뒤집어놓고 전세가 불리하자 꽁무니를 빼는 왜적을 장군은 고이 보낼 수 없었다. 조·명 연합수군은 탈주를 준비하는 왜선 500여 척 앞을 가로막는다. 전투는 일방적이었다. 이순신은 왜군 함대 절반을 가라앉히고 도망하는 적을 쫓았다. 그러나 결국 적이 쏜 탄환에 맞으면서 배 위에서 숨을 거둔다.

전투가 끝나고 시신은 관음포(고현면 차현마을)로 옮겨졌다. 지금 이곳에 있는 '이락사(李落祠)'는 '이순신이 떨어진 곳에 세운 사당'이라는 뜻이 담겨 있다. 1973년 정부는 이 일대를 정비해 '관음포 이충무공 전몰 유허'라 이름 짓고 사적으로 지정했다.

숨을 거둔 이순신을 임시로 묻은 곳은 설천면 노량리에 있는 언덕이었다. 시신이 고향인 충남 아산으로 옮겨지자 이곳 사람들은 빈 무덤을 짓고 사당을 세워 '충렬사'라고 이름 지었다. 이후 60년이 지나 1658년(효종 9년) 옛집은 헐리고 새집이 들어섰다. 그리고 5년 뒤인 1663년(현종 4년) 남해 충렬사는 통영 충렬사와 함께 임금이 내려준 현판을 걸게 된다. 전쟁을 끝내면서 삶을 마감한 장군에 대한 예우는 그렇게 후하지 않았다.

외로운 섬에서 솟은 영감

멀고 척박한 섬은 예부터 유배지로 적당했다. 현재 기록에 남은 남해 유배객은 47명에 이른다. 나라에서 제주도 다음으로 많다. 배운 재주라고는 공부밖에 없는 선비들은 붓을 들어 설움을 달랬다. 권력과 한참 떨어진 변두리에서 끼니 때우기조차 버거웠던 선비들은 다행히 정신만은 맑았다. 이 나라에 남은 문학 유산 가운데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는 '유배문학'은 외로운 섬에서 꽃피울 수 있었다. 남해읍에 있는 '남해유배문학관'에서는 유배객과 이들이 남긴 작품, 그리고 우리 문학사에서 유배문학이 지닌 가치 등을 확인할 수 있다.

1689년(숙종 15년) 남해 노도로 유배된 김만중은 이곳에서 〈사씨남정기〉와 〈구운몽〉 등을 써낸다. 〈사씨남정기〉는 희빈 장 씨에게 빠져 인현왕후를 내친 숙종을 풍자한 소설이다. 〈구운몽〉은 성진이라는 불자가 하룻밤 꿈에서 온갖 부귀영화를 누리다 깨어나 그 덧없음을 깨닫고 불법에 귀의한다는 내용이다. 특히 김만중은 당시 선비들이 귀하게 여기지 않았던 우리글로 작품을 남겼다.

안평대군·양사언·한호와 더불어 조선 4대 명필로 꼽히는 김구(1488~1534)도 남해 유배객이다. 문장도 뛰어났지만 글 맵시로 워낙 유명했다. 기묘사화(1519년) 때 조광조 파로 몰려 남해로 귀양온 그는 유배문학 가운데 백미로 꼽히는 〈화전별곡〉을 남겼다. 김구가 살았던 설천면 노량리 충렬사 앞에는 그를 기려 후손이 세운 유허비가 있다. 이밖에 남구만(1629~1711), 이이명(1658~1722), 박성원(1697~1757), 류의양(1718~?) 등이 오늘날까지 작품을 남긴 남해 옛 손님들이다.

기사제보
저작권자 © 경남도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