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당선인이 새 정부 핵심 기조로 '국민안전'(과 경제부흥)을 내걸었다. 대선 때부터 예상됐던 바다. 박 당선인은 당시 "성범죄자는 사형을 포함, 엄벌해야 한다"고 극단적 목소리까지 냈다. 박근혜식 안전의 의미는 민주진보세력, 친북세력 탄압으로 나타났던 과거 독재·보수 정권의 '공안'과는 현재로선 다르다. 사실 소위 '북풍' 등 공안몰이는 다수 국민의 거부감으로 효용성이 예전만 못하다.

근절을 공언한 불량식품·학교폭력 등 '4대 사회악'은 어느새 박근혜의 트레이드마크가 된 '민생'의 연장이다. 가장 관심을 끄는 건 역시 성범죄다. 사안의 말초적 성격과 사회적 파급력 때문이다. 분명 과장된 측면이 크나 어쨌든 성범죄 하면 곧 (연쇄)살인을 떠올릴 정도로 국민들의 공포감이 엄청나다. 전자발찌, 화학적 거세 같은 강경 대책이 반인권성과 실효성 등 숱한 논란에도 별 견제 없이 시행 중인 건 이런 분위기에 힘입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

지난 대선 때 '국민통합' 퍼포먼스를 펼치는 박근혜 당선인. 17개 시도에서 가져온 흙을 하나로 뭉치고 있다. /뉴시스

예의 새 정부의 결연한 의지 역시 국민적 지지를 받을 가능성이 높다. "위험한 범죄자로부터 당신을 지켜주겠다"는데 누가 딴죽을 걸 수 있을까. 지난해 9월 한 조사에서는 국민의 약 80%가 흉악범 사형집행에 찬성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난감한 상황이다. 잔혹한 범죄에 상응하는 '잔혹한 처벌'이 효과적이었다면 사형집행이 횡행한 군사독재 시절 범죄의 씨가 말랐어야 옳았다. 모든 범죄가 그렇듯 성범죄도 그 근원을 살피면 한 개인만의 문제가 아니다. 비인간적 경쟁체제, 노동시장으로부터 소외, 남성 중심 권력구조 등 사회구조와 따로 떼놓고 볼 수 없다.

국가권력은 그러나 세상을 근본적으로 뜯어고치는 대신 일부 '위험 인자'만 '거세'하는 데, 즉 체제 자체의 모순을 개별 주체들에 전가하는 데만 힘쓴다. 겉으론 '국민안전'이지만 진짜 목적은 현 질서의 '안전'한 유지인 셈이다.

박근혜 당선인에게 성범죄 등 사회악과 '전쟁'은 또 하나의 '국민통합' 수단일 가능성이 높다. '경제부흥'을 이룬다지만, 세계적 경기불황과 부동산 시장 침체 등 희망적 징후는 어디에도 없다. 국민들의 살림살이가 더더욱 팍팍해질 것이 분명하다면, 경제적 고통과 체제 불만으로부터 국민의 시선을 이격시키고 관심을 다른 곳에 하나로 모으는 희생양이 필요할 수밖에 없다.

대선에 패배한 야권과 범진보진영의 처지는 한층 더 곤혹스럽게 됐다. '100% 대한민국'에 순순히 동참하자니 꺼림칙하고 무시하자니 국민의 눈이 두렵다. 차별화된 대안도 마땅히 없다. 사실 그간 성범죄 이슈에 대한 진보·개혁 진영의 태도는 보수와 다를 바 없었다. 처벌강화 중심의 정책에 속수무책 끌려가거나 무기력한 대응만 이어왔을 뿐이다.

인권의 원칙만 되뇌는 걸로는 부족하다. 사회구조 운운은 너무 한가하게 들릴 것이다. 국민 다수가 공감할 만한 '진보다우면서도' 실질적인 대책을 내놓아야 한다. 이를테면 캐나다 등에서 시행 중인 주민참여형 치안시스템과 성범죄자 교화·정착 프로그램 같은 것을 참조해볼 수 있다.

특정 집단을 무조건 배제·격리하는 사회안전 시스템에 대한 불감증이 계속되면, 어느 순간 그것은 우리 모두를 타깃으로 겨누는 공포의 도구로 돌아올지 모른다. 인간이 인간을 해쳐야만 하는 끔찍한 상황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다 함께 벗어나는 게 옳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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