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6년 프랑스의 페르낭 레제라는 화가는 정부 문화담당 관리에게 노동자들이 퇴근 후에도 방문할 수 있도록 루브르박물관의 폐관 시간을 연장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런데 그 결과가 기대했던 것과는 달리 나타나자 이런 글을 남겼다.

"결국 박물관은 저녁에도 열렸고 노동자들이 방문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그들은 거기서 한 작품만 관람했다. 그들이 길게 줄을 서가며 '모나리자'만 관람했던 이유는 그 작품이 영화에 나오는 '유명 스타'와 같은 존재였기 때문이다. 결국 박물관을 늦게까지 열게 만들었던 것은 무의미한 일이 되고 말았다."

1930년대에 예술작품 감상을 노동자의 당연한 권리로 인식했던 화가보다 눈길을 끄는 것은 노동자들의 반응이다. 프랑스가 마치 대단한 '문화국가'로 인식되지만 그 실상을 들여다 보면 딱히 우리랑 다를 바 없었다. 프랑스인들이라 해서 태어날 때부터 유별난 DNA를 타고 난 것은 아니다. 예술의 가치를 존중하는 사회적 분위기와 전통 덕분에 오늘의 문화강국이 되었다.

매주 화요일 밤 12시 40분에 방송되는 KBS1 〈즐거운 책 읽기〉의 한 장면.

세계적인 화가의 기획전이나 유명 오케스트라의 공연에는 관객이 몰리는 데 반해, 정작 국내 작가의 전시회나 연주자의 공연은 거들떠도 보지 않는 현실을 개탄하는 경우가 더러 있다. 하지만 이는 당연한 결과다. '모나리자' 앞에 줄을 섰던 프랑스 노동자들의 선택이나 우리나라 관객의 선택은 별반 다르지 않다. 정보와 소양이 제한적이니 결국 유명세를 좇을 수밖에 없다.

양의 축적이 있어야 질적 전환을 기대할 수 있다. 수준에 상관없이 예술도 자주 접하다 보면 '심미안'이 생기기 마련이다. 가랑비에도 옷은 젖는다. 굳이 비다운 비를 맞아야만 옷이 젖는 건 아니다. 유명 화가나 연주자의 전시회와 공연에 관객이 몰리는 것은 그만큼 대중에 많이 노출되었기 때문이다. 대중은 익숙한 것을 만만하게 보는 경향이 있다. 순수예술이 외면 받는 것은 어려워서가 아니라 익숙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장 대중적이고 영향력있는 매체인 TV의 역할이 중요하다. 문화·예술을 소재로 한 교양프로그램이 활성화될수록 이를 대하는 대중의 눈높이는 달라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현실은 암담하다. 굳이 지상파 3사를 비롯해 케이블이나 종편까지 분석할 필요도 없다. 광고 없이 시청료로만 운영되는 KBS1 채널만 보자. 한 주간 방송되는 200개에 가까운 프로그램 가운데 문화·예술을 소재로 한 교양프로그램은 〈즐거운 책 읽기〉 〈클래식 오디세이〉 〈TV미술관〉 〈독립영화관〉 단 4개에 불과하다. 이마저도 약속이나 한 듯 자정이 넘은 심야시간에 편성되어 있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이들 프로그램의 완성도가 꽤 높다는 점이다. 우리 방송의 기획력이나 제작 능력은 이미 세계적인 수준이다.

시청률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KBS1의 상황이 이럴진대 타 방송은 더 말할 것도 없다. 교양프로그램의 축소나 폐지는 특히 현 정부 들어 두드러진 경향이다.

그러니 새롭게 출범하는 정부에 한 가지만 건의드린다. 복지예산의 추가 재원 확보가 절실한 상황에서 굳이 문화 예산까지 늘릴 필요는 없다. 대신 방송의 교양프로그램 확대를 독려해 주시길 간곡히 부탁드린다. 프로그램의 완성도는 지금의 수준으로도 충분하다. 다만 보다 많은 시청자가 볼 수 있고, 볼 만한 시간대에 배치해 주시면 감사하겠다. 재방송까지 자주 해주시면 더할 나위 없겠다.

/박상현(맛 칼럼니스트)

기사제보
저작권자 © 경남도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