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의 재발견-창녕] 옛 영광·아픔의 흔적 품은 산줄기

창녕군 창녕읍 옥천리에 있는 관룡사에는 보물로 지정된 건물 두 채가 있다. 관룡사 약사전(보물 제146호)과 대웅전(보물 제212호)이다. 조선 초기 건물로 추정하는 약사전은 정면·측면 1칸짜리 집이다. 건물에 견줘 유난히 큰 맞배지붕과 이를 떠받치는 보 구조가 독특하다. 약사전 안에는 역시 보물로 지정된 '석조여래좌상'(보물 제519호)이 있다. 약사전 앞에 있는 삼층석탑 역시 지나치기 아쉬운 유적이다. 관룡사 대웅전은 임진왜란 때 불탔던 것을 광해군 때 다시 지었다고 한다. 정면·측면 3칸에 팔작지붕을 얹은 집으로 조선 중기 건물 전형을 보여준다.

보물을 품은 유서 깊은 절이 경남 안 창녕에만 있는 것이 아니기에 관룡사는 귀하면서 흔한 절이다. 하지만, 이 절은 이곳을 지나야 갈 수 있는 명소 한 곳 덕에 또 남다르다. 관룡사 뒤쪽으로 600m 정도 걸으면 닿는 봉우리 '용선대'다. 용선대에 올라 동쪽을 바라보면 '병풍바위'라고 불리는 잘생긴 절벽이 펼쳐진다. 관룡산(754m) 자락이다. 아래로는 관룡산과 영취산(738.7m), 쌍교산(469.5m)이 감싼 옥천리 마을이 한눈에 들어온다. 서북쪽으로는 멀리 창녕 제일봉 화왕산(756.6m) 자락이 이어진다.

관룡사 대웅전./박민국 기자

이 눈맛 좋은 자리에는 통일신라시대 것으로 추정하는 불상이 동쪽을 바라보며 의젓하게 앉아 있다. 용선대 석조여래좌상(보물 제295호)이다. '용선대'라는 이름은 중생을 극락으로 인도한다는 상상 속 배 '반야용선(般若龍船)'에서 따온 것이다. 그래서인지 여기 사람들은 용선대 주변이 선명하고 훤할 때보다 짙은 안개가 깔릴 때 풍경을 더 높게 친다. 안갯속에서 산 중턱에 있는 작은 마루는 이름처럼 극락으로 향하는 배가 된다.

하지만, 용선대에서 감흥이 제아무리 유별나더라도 창녕이 내세울 더 큰 자산은 산줄기가 아닌 물줄기에 있다. 서쪽과 남쪽을 감싸며 흐르는 낙동강, 예부터 널리 이름을 알린 부곡온천, 나라 안에서 최고라는 내륙습지 우포늪(소벌)은 모두 창녕 것이다. 옛사람들은 강에 기대어 터를 정했고 오늘날까지 온천은 창녕 살림을 쏠쏠하게 살찌우고 있으며 창녕이 남길 가장 큰 유산은 늪에 있다.

동쪽에서 서남쪽으로 열린 땅

동쪽이 솟은 창녕 땅은 서남쪽으로 가면서 낮아진다. 창녕 제일봉인 화왕산을 비롯해 관룡산, 영취산을 중심으로 천왕산(619m), 열왕산(663m), 수봉산(593m), 묘봉산(514m) 등이 동쪽에 쏠려 있다. 북서쪽과 서쪽에는 구룡산(208m)·구진산(300m)·고운봉(241m) 등이 있으나 대부분 높이가 200m 안팎이다. 창녕 산세는 경남 안에서도 유별나게 내세울 정도는 아니다. 창녕을 대표한다는 화왕산조차 완만한 능선 탓에 그 매력이 선뜻 다가오지는 않는다. 하지만, 화왕산 매력은 높이나 산세가 아닌 산 정상에 펼쳐진 24만여㎡에 이르는 너른 들판에 있다. 특히 들판을 가득 메운 억새는 창녕이 자랑하는 볼거리 가운데 하나다.

창녕을 흐르는 낙동강./박민국 기자

창녕군은 1995년부터 3년마다 정월대보름에 맞춰 '화왕산 억새 태우기' 행사를 열기도 했다. 산 정상에서 솟는 거대한 불기둥은 전국에 명성을 떨쳤다. 하지만, 이 행사는 지난 2009년 갑자기 거세진 불길로 인명사고를 내며 없어진다. 대단한 볼거리가 사라진 것에 대해 아쉬워하는 이들도 없지 않으나 한동안 산 정상 억새를 태울 일은 없을 듯하다.

창녕군 전체면적(532.76㎞) 가운데 농경지(115.85㎞)는 21% 정도다. 농경지 대부분은 낙동강을 낀 서남쪽에 펼쳐져 있다. 전체 가구 가운데 약 30% 정도가 농가인 만큼 창녕은 농업이 중심인 고장이다.

특히 낙동강과 남강이 만나는 지점에 펼쳐진 영산면 일대 들판은 경남에서 손꼽는 농업지역이다. 그러나 이곳은 일제강점기 이전까지만 해도 대부분 늪과 진펄이어서 농사짓기 곤란한 곳이었다. 1920년대 들어 수리사업과 함께 낙동강 주변에 둑을 쌓고서야 여기 사람들은 제법 넉넉한 농지를 얻을 수 있었다.

그래도 강 주변 비옥한 땅은 뭘 심든 그럴듯한 수확을 허락했다. 영남권에서 창녕은 채소·특용작물 주요 공급원이다. 이 가운데 창녕 땅 이름을 앞에 붙인 작물로는 '창녕 양파'와 '남지 땅콩'을 꼽을 수 있다. 특히 양파는 한때 나라 안에서 가장 많이 난다고 할 정도였다. 지금은 '최대 생산지'라는 수식 뒤에 창녕이 오지는 않는다. 양파를 심던 농가들은 점점 마늘 비중을 늘리고 있다. 그래도 아직 창녕 대표 작물로 양파를 빼놓을 수는 없겠다.

옥천사지./박민국 기자

남지 땅콩 유명세는 노는 땅을 아쉬워한 농민들 마음에서 비롯한다. 작맥(귀리) 말고는 그다지 수확을 기대할 수 없었던 낙동강 주변 모래땅에 시험 삼아 심은 땅콩이 제법 잘 자라며 살림에 보탬이 된 것이다. 이후 땅콩 생산지는 전국으로 확대됐으나 최종 가공·포장은 대부분 남지에서 이뤄졌다. 하지만, 남지 땅콩 전성기는 중국산 수입으로 가격 경쟁에서 밀리며 마감한다. 지금은 소규모 생산 농가만 남아 한때 드높았던 이름을 잇고 있다.

1973년 부곡면 거문리 지하 63m 지점에서 솟은 뜨거운 물은 이 땅에 그럴듯한 관광자원 하나를 떠안긴다. 한 해 381만여 명(2011년)이 찾는 부곡온천에서는 하루 숙박 9000명, 목욕은 2만 명을 수용할 수 있다. 종합휴양시설인 '부곡하와이'와 콘도, 골프장까지 갖춘 이 일대는 창녕 살림을 살찌우는 소비지역이다.

느닷없이 마주치는 옛사람 흔적

창녕읍 교상리에 있는 호젓한 공원 이름은 만옥정이다. 이 공원 가장 높은 곳에는 '진흥왕 척경비'(국보 제33호)가 있다. 561년 진흥왕이 세운 이 비석은 1914년 화왕산에서 발견된 것을 1924년 공원으로 옮겨놓았다. 그 아래에는 '대원군 척화비'가 있으며, 더 아래로 내려가면 신라시대 지은 '퇴천삼층석탑'이 있다. 석탑 옆으로는 창녕군을 거친 관리들을 칭송한 비석이 줄지어 서 있다. 그리고 석탑과 비석 맞은편에 객사 건물을 세워뒀다. 읍에 있는 평범한 공원은 뜰 안에 품은 유적들로 비범해진다.

이 만옥정 공원을 중심으로 원을 그리면 반경 1㎞ 안에 창녕읍이 품은 옛사람 흔적들이 대부분 들어온다. 이 가운데 여기 사람들이 가장 치켜세우는 유적은 '술정리서삼층석탑'(보물 제520호)과 '술정리동삼층석탑'(국보 제34호)이다. 그중에서도 동쪽에 있는 돌탑에 대한 평가가 훨씬 후하다. 요즘 건물 사이에 난 길로 들어가면 불쑥 나타나는 이 돌탑은 경주에 있는 석가탑만큼 잘생긴 모양새를 자랑한다. 그 생김새는 종종 창녕이 신라 문화권에 걸친 흔한 변두리가 아니었다는 근거가 되곤 한다. 게다가 돌탑에서 300m 정도 떨어진 곳에는 옛사람들에게 귀했을 얼음을 보관했던 석빙고(보물 제310호)도 있다.

돌탑과 석빙고는 '창녕은 신라시대 유력가가 터를 정했던 곳'이라는 여기 사람들 말에 힘을 보탠다. 그런가 하면 돌탑 앞에는 능청스럽게 초가 한 채가 요즘 집들 사이에 자리했다. 주인 성이 하씨라서 '하씨초가'라고 이름 지은 이 집은 500년 전에 지은 것이다. 이밖에 큰 바위 앞면에 돋을새김을 한 '송현동 마애여래좌상'(보물 제75호), 통일신라시대 불사 건립 조성 과정을 새긴 비석인 '인양사 조성비', '창녕 향교'도 모두 읍 울타리 안에 있다. 이 같은 유적들은 창녕읍 서북쪽 언덕에 늘어선 옛 무덤(송현·교동고분군)들과 더불어 고즈넉한 창녕 분위기를 돋운다. 창녕읍은 요즘 사람이 만든 공간을 거닐면 옛사람 흔적이 어깨를 툭툭 치는 곳이다.

용선대 석조여래좌상과 창녕 전경.

그래도 뭐든 가장 앞서는 게 자랑거리라면 창녕에서는 부곡면 비봉리에서 나온 옛사람 흔적을 빼놓을 수 없겠다. '비봉리패총'이라고 불리는 곳이다. 이곳은 2003년 태풍 매미로 논이 물에 잠기면서 양·배수장 신축 공사를 하다가 드러났다. 여기에서는 소나무 쪽배, 망태기, 멧돼지가 그려진 토기, 나무칼, 돌화살촉, 그물추, 도토리 저장 구덩이 등이 발굴됐다. 특히 8000년 전 것으로 어림잡는 소나무 쪽배는 '세계 최고(最古)' 또는 '동북아 최고'라는 수식에서 짐작할 수 있듯 학술적 가치가 높다.

비봉리패총에서 나온 옛사람 흔적이 이제는 박물관 것이라서 아쉽다면, 장마면 유리에 있는 고인돌(지석묘) 한 기는 빼도 박도 못하는 창녕 것이다. 청동기 대표 유적이라고 할 수 있는 지석묘는 창녕 곳곳에 그 흔적이 남아 있다. 하지만, 모양새를 제대로 갖춘 것으로 따지자면 유리에 있는 고인돌이 으뜸이다. 고인돌은 말쑥한 보존 상태와 언덕 꼭대기라는 유별난 위치 덕에 '창녕지석묘'라는 이름을 얻었다.

고대에서 현대까지 이어졌던 전선(戰線)

창녕은 그 고즈넉한 인상과는 달리 역사적으로 평온한 곳은 아니었다. 남강·황강과 통하는 낙동강을 낀 이 땅은 예부터 동·서를 잇는 중요한 길목 가운데 하나였다. 대개 그런 길목은 세력과 세력이 부딪칠 때 서로 제 것으로 삼으려는 곳이기도 하다. 이른바 군사적 요충지가 된다. 창녕이 예부터 중요한 거점이었다는 근거는 진흥왕 척경비와 화왕산에 있는 산성 두 곳에서 미뤄 짐작할 수 있다.

진흥왕이 이곳에 척경비를 세운 것은 561년이다. 경남 일대에 두루 세력을 뻗쳤던 가야 제국 마지막 나라인 대가야가 무너진 게 이듬해인 562년. 창녕은 신라가 가야를 제압하는 과정 막바지에 비석으로 말뚝을 박아둬야 할 만큼 의미가 있는 땅이었다.

화왕산에 있는 '화왕산성'과 '목마산성'은 모두 쌓은 시기를 삼국시대 이전으로 추정한다. 지금도 흔적이 대체로 잘 남은 산성 역시 이곳이 군사적 요충지였다는 것을 증명한다. 특히 화왕산성은 임진왜란(1592년) 때 의병을 일으킨 곽재우(1552~1617)가 거점으로 삼은 곳이기도 하다. 창녕을 거쳐 서쪽과 북쪽으로 진출하려던 왜병은 곽재우가 이끈 의병들이 벌인 효율적인 농성으로 길을 틀어야만 했다.

1950년 8월 남지읍 '박진나루'에서는 미국 제2사단과 제24사단이 인민군 제4사단과 대치한다. 낙동강이 휘감은 땅 창녕은 6·25 당시 '낙동강 전선' 최후 방어선이기도 했다. 미군은 2개월 동안 이어진 치열한 전투에 승리하면서 이후 전세를 역전하는 계기로 삼는다. 남지읍 고곡리 조용한 마을에 있는 '박진전쟁기념관'과 '박진지구전적비'는 이 승리를 기념하고 전투 희생자를 기리고자 조성됐다.

쓸모없는 질퍽한 땅에서 솟은 축복

유어·이방·대합면 일대 내륙습지 우포늪은 물이 고인 면적만 2.3㎢에 이른다. 우포늪이 만들어진 시기는 1억 4000만 년 전, 6000년 전 등 두 가지로 어림잡는다. 그 면적과 생성 시기만으로도 나라에서 최고(最古)·최대(最大) 내륙 자연습지다.

하지만, 면적이 얼마고 생성 시기가 언제든 우포늪을 향한 눈길이 따스해진 것은 20년도 되지 않는다. 1990년대 중반까지 우포늪 일대는 말 그대로 '쓸모없는 땅'이었다. 질퍽한 땅은 민물고기를 잡는 것을 빼면 도무지 용도가 없었다. 게다가 그런 땅은 지나치게 넓기까지 했다. 오죽하면 유어·이방·대합·대지면 일대는 예부터 사람 살 곳이 아니라고 했다. 어서 메워 작물이라도 심었으면 하는 게 여기 사람들 바람이었다. 이 때문에 1970년대 이 일대에서 진행된 개간 사업을 사람들은 반겼다.

1998년 3월 우포늪은 국제 람사르협약에 등록, 국제적으로 중요한 습지로 자리매김한다. 사람들이 손을 대지 못했던 습지는 그 덕에 생산과 소비가 균형을 이룬 생태계를 보듬을 수 있었다. 쓸모없는 땅에 쏟아지는 관심과 후한 대접이 여기 사람들은 낯설었다. 오히려 창녕 밖에서 우포늪이 품은 매력에 깊게 빠져든 이들이 몰려들었다.

우포늪 대대제방./박민국 기자

세계적으로 귀하다는 평가를 받은 습지에 대한 정부 대접도 달라졌다. 정부는 1999년 우포늪을 '습지보호지역'으로 지정한다. 이런 과정에서 2008년 창원에서 열린 람사르 총회는 우포늪 위상을 더욱 드높이게 된다. 정부는 2011년 우포늪을 '천연보호구역'으로 지정한다. 외면받던 습지는 여기 사람들이 창녕을 자랑할 때 가장 먼저 나오는 이름이 됐다. 창녕 이름 앞에 '물의 도시', '늪의 도시'라는 수식이 붙은 것도 낙동강·부곡온천과 더불어 우포늪에 대한 재평가에서 비롯했다고 보는 게 마땅하다.

유별난 영산 사람들

다른 고을이었던 창녕과 영산이 합쳐진 것은 1914년 일제강점기 때 행정구역 개편 이후다. 영산군에 속했던 일부 면이 함안과 묶이고 나머지가 창녕과 묶이면서 영산과 창녕은 '창녕군'이라는 한 이름을 쓰게 된다.

하지만, 영산면 사람들은 출신을 물으면 '영산' 또는 '영창녕'이라고 답할 정도로 유별난 면이 있다. 그렇다고 해서 이 같은 태도를 '마을 이름을 잃은 사람들이 부리는 오기'로 낮춰보는 것은 곤란하다.

영산면은 따로 빼놓고 살펴도 좋은 만큼 살뜰한 문화유적과 전통문화를 잘 보듬은 곳이다. 특히 해마다 3월 1일 무렵 이곳에서 열리는 '3·1민속문화제'는 여기 사람들이 3·1만세 운동을 기념해 스스로 만든 큰 잔치로 눈길을 끈다. 그리고 이 문화제에서는 중요한 놀이 유산 두 가지를 접할 수 있다. 바로 중요무형문화재 제25·26호로 지정된 '영산쇠머리대기'와 '영산줄다리기'이다.

쇠머리대기 놀이는 소나무 20여 그루와 새끼줄, 두꺼운 종이로 만든 나무쇠(木牛)를 만드는 것에서 시작한다. 동·서 두 패로 나뉜 마을 사람들은 각각 나무쇠를 받쳐 신경전을 벌이다 서로 쇠머리를 부딪친다. 이때 쇠머리에 올라탄 장군들은 상대 쇠머리로 올라가 엉겨 공방전을 벌인다. 승패는 한쪽 나무쇠가 주저앉으면서 갈린다.

줄다리기 역시 동·서 두 패로 나뉘어 승부를 내는 놀이다. 동편에서는 수줄을, 서편에서는 암줄을 꼰다. 줄다리기를 할 때는 먼저 수줄과 암줄을 이어 나무를 끼워 고정한다. 줄다리기가 시작되면 굵은 몸줄 양쪽에 붙은 곁줄에 온 마을 사람들이 달라붙는다. 승부는 일반 줄다리기와 다를 바 없으나 수줄과 암줄을 고정한 나무가 부러지면 수줄을 꼰 쪽이 진다.

요승? 아니면 개혁가?

고려 말 승려 신돈(?~1371)은 창녕 출신으로 알려졌다. 공민왕에게 신임을 얻으며 정계에 진출한 신돈은 과감한 개혁 정책을 시도한다. 당시 권력을 독점하던 권문세족을 견제했고 궁핍했던 백성을 살폈다.

특히 1366년 '전민변정도감'을 설치해 부당하게 땅을 빼앗긴 백성에게 땅을 돌려주고 강제로 노비가 된 사람들을 구제했다. 하지만, 권문세족은 끊임없이 신돈을 제거하려 했고, 새로운 세력으로 떠오른 신진사대부 역시 그를 견제했다. 게다가 사생활이 문란해진 신돈은 이들에게 빌미를 제공한다. 결국, 신돈은 태후와 권문세족들에게 반역자로 몰리면서 유배됐다가 사형당한다.

창녕읍 옥천리에서 관룡사로 향하는 길목에는 신돈이 죽은 뒤 나라에서 없앴다는 절터만 남아있다. '옥천사지'라고 불리는 이곳은 아직도 수풀을 뒤지면 절에 쓰였을 돌조각을 쉽게 찾을 수 있다.

문학평론가이자 역사학자인 임종국(1929~1989) 역시 창녕 출신이다. 재야 문학평론가로 활동하면서 문인들에 대한 자료를 모으던 그는 이들이 저지른 친일 행적을 확인하고 나서 연구 방향을 튼다. 그렇게 모은 자료를 정리해 펴낸 책이 〈친일문학론〉(1966년)이다. 그는 이 책을 시작으로 다른 분야 친일파에 대한 연구를 이어가며 친일파 연구 전문가로 활동한다. 특히 그가 친일파로 지목해 파고든 첫 인물이 아버지 임문호였다는 점은 평범한 지식인을 뛰어넘는 결기가 엿보인다.

1991년 '반민족문제연구소'로 설립해 1995년 이름을 고친 '민족문제연구소'는 임종국이 남긴 자료와 뜻을 이어받은 기관이다.

이밖에 경남도지사 홍준표, 서울시장 박원순, 민주통합당 의원 박영선이 창녕 출신인데 이 점이 여기 사람들에게는 종종 재밌는 얘깃거리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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