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로운 삶을 살던 호빗족 '빌보 배긴스'는 왜 13명의 난쟁이족 전사와 위험한 모험에 나섰을까. 아니, 그 전에 마법사 '간달프'는 왜 하필 빌보에게 포악한 용 '스마우그'를 제압해야 하는 '뜻밖의 여정'을 제안했을까. 짤따란 키에 싸움질 한번 안 해본 것 같은 인상, 눈을 씻고 훑어봐도 특출한 용기나 지혜, 능력이 있기는커녕 밥이나 축내지 않으면 다행인 그에게 말이다.

영화 〈반지의 제왕〉 시리즈 프리퀄(유명한 책·영화에 나온 내용과 관련해 그 이전의 일들을 다룬 속편) 격인 〈호빗 : 뜻밖의 여정〉은 이런 궁금증과 함께 시작한다. 말하자면 착하고 평범한 사람들이 세상을 구한다는 뭐 그렇고 그런 이야기? 하지만 엎어치나 메치나다. 이 역시 종국에는 또 하나의 영웅 탄생기로 귀결될 뿐이다. 오직 한 사람의 절대 영웅을 고대하든, 우리 모두 영웅이 되자고 선동하든 그 끝은 대개 바람직하지 못했다. 이용당하고 상처받는 건 늘 '위대한 민중'들이었다.

빤한 영웅담인 듯한 〈호빗〉은 그러나 스스로 그것과 묘하게 거리를 유지하려고 애쓴다. 이를테면 이런 대목. "저는 영웅의 위대한 힘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의 소소한 일상이 악을 잠재울 수 있다고 믿습니다."

간달프(오른쪽)로부터 '위험한 모험'을 제안받는 호빗족 빌보 배긴스.

간달프의 다소 난해한 이 말이 무슨 뜻인지 확인시켜주는 장면이 있다. 예의 난쟁이족 전사들은 빌보를 신뢰하지 못한다. 온갖 괴수들과 싸움에 버거워하는 빌보에게 "맛있는 음식, 안락한 의자, 푹신푹신한 침대가 있는 집이나 그리워하고 있겠지"라고 쏘아붙인다. 빌보는 이에 "당연히 그립다"면서도 "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당신들과 함께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즉 집의 소중함을 너무나 잘 알기에, 스마우그한테 왕국을 빼앗기고 갈 곳을 잃은 난쟁이족들이 집을 되찾는 데 힘을 보태고 있다는 것이었다.

가엾긴 하지만 사실 난쟁이족들은 그리 정의로운 존재가 아니다. 왕국을 되찾으려는 이유 중 하나는 그곳에 어마어마한 양의 황금이 있기 때문이다. 어찌 보면 정신 못 차렸다. 바로 그 황금을 향한 '탐욕' 때문에 왕국을 빼앗겼으면서 또다시 황금이 있는 곳으로 향한다. 더욱 어이없는 건 빌보다. 가난한 필부(빌보)가 몰락한 부자(난쟁이족)의 옛 영화 회복을 위한 복수극에 대체 왜 목숨을 걸어야 하는가.

그러나 반전이 있다. 빌보 역시 오직 선의로만 똘똘 뭉친 존재는 아니라는 것. 황금을 정확히 14등분(13+1)해 나눈다는 계약서에 도장을 꽝 찍었다. 하긴 빵 없는 자유가, 정의가 세상에 어디 있으랴. 빌보는 그저 피와 땀의 정당한 대가를 요구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니 그 누구한테도 함부로 '탐욕'의 딱지를 붙이지 마시라. 중요한 것은 함께 싸워야만 한다는 것이고, 선택지만 달랐을 뿐 '황금'의 무한독식에 맞서 함께 몸부림치고 있다는 것이다. 모든 것을 잃은 전직 부자든, 안락한 의자가 세상의 전부인 줄 아는 평민이든 그들 모두에겐 '소소한 일상'을 함께 누리고 느낄 권리가 있다.

간달프는 빌보에게 한 자루의 칼을 쥐여주며 이렇게 이야기한다. "진정한 용기는 상대를 벨 때가 아니라 살려야 할 때를 아는 것이라네." 가장 무서운 적은 스마우그나 사우론 따위가 아니다. 막강한 권력을 얻는 대신 영혼의 피폐를 감수해야 하는 사악한 힘(절대반지)의 끊임없는 유혹을 이겨내야 하는, 비록 무지하고 정의롭지 못한 자들이라 하더라도 그들과 끝내 함께 걸어가야만 하는 자기 자신과 싸움이다. 우리의 '뜻밖의 여정'도 이제 막 시작됐다.

기사제보
저작권자 © 경남도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