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플파워] "도전과 성공이 내 삶의 의미"

한 마디로 다부진 인상이었다. 기업가라기보다는 군인의 기강(氣强)이 느껴졌다. 아니나 다를까. 인터뷰 도중 그 이야기가 나왔다. 실제로 군인이 되려고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육군사관학교에 지원했는데 떨어지고 말았다. 키가 작은 탓이었다. 당시 육사는 165cm 이상이 돼야 합격할 수 있었는데, 애석하게도 그는 164cm였던 것이다.

결국 그는 동아대 법대에 입학했다. 고시공부를 하여 법조인이 되고 싶었다. 하지만 그 꿈도 좌절됐다. 가정형편이 어려워 고시 공부는커녕 아르바이트로 학비를 벌어 6년 만에 겨우 대학을 졸업할 수 있었다. 전화위복이었을까? 그는 지금 매출액 1조 7000억 원의 넥센타이어를 비롯, 튜브와 골프공 등을 생산하는 (주)넥센, 지역민방인 KNN 외에도 넥센테크, 넥센산기, 넥센L&C 등 국내외 총 11개의 계열사를 보유한 넥센그룹의 회장이다.

강병중 회장./박일호 기자

군인·법조인이 되고 싶었지만…

강병중(姜丙中·1939년생) 회장의 집안이나 그가 사업에 뛰어들게 된 과정은 삼성그룹 창업자인 이병철(1910년생) 전 회장과 닮은 듯 하면서도 다르다. 이병철 회장은 의령군 정곡면 중교리의 1000석지기 아들이었고, 강병중 회장은 약 30km 거리인 진주시 이반성면 길성리에서 500석 지기의 아들로 태어났다. 둘 다 지주의 아들이란 점에선 같다. 그러나 이 회장은 일제강점기인 1936년 아버지의 전답 300석을 물려받아 사업 밑천으로 썼지만, 강 회장은 해방 이후 농지개혁으로 전답이 모두 소작인에게 분배된 상황에서 급격히 가세가 기울어 힘겨운 성장기를 보내야 했다.

이 회장의 첫 사업은 협동정미소와 도정 공장, 자동차 회사였다. 강 회장은 정미소를 하던 장인과 일본에서 사업을 하던 처삼촌 두 분의 도움으로 중고 화물차 수입부터 시작해 운수회사를 키워나갔고, 그게 타이어 사업의 모태가 되었다.

이병철 회장의 일대기는 이미 넘칠 정도로 많다. 하지만 경남이 낳은 또 한 명의 걸출한 사업가 강병중 회장에 대해서는 프로필 수준의 기록 외에 찾아보기 어려웠다.

그는 2012년 새로운 도전을 시작했다. 창녕에 1조 2000억 규모의 대규모 공장을 지은 것이다. 그간 대부분의 한국 기업들이 낮은 임금과 저렴한 땅값을 이유로 중국과 베트남 등 해외에 공장을 짓고 있는 상황에서 넥센의 창녕공장 건설은 이례적이다.

2013년엔 그의 나이도 74세에 이르렀다. 그러나 ‘타이어 강’이라는 그의 별명처럼 자신의 상품에 대한 자부심과 열정이 넘쳤고, 도전 정신 또한 청년의 그것과 다르지 않았다. 이 시점에서 그의 삶과 생각을 기록해보고 싶었다.

그를 만난 곳은 창녕공장이었다. 미리 기자가 보냈던 질문을 꼼꼼히 체크해 답변을 서면으로 만들어두었다. 그가 구술한 내용을 직원이 받아 적어 타이핑한 것이었다. 강 회장은 다시 그것을 직접 읽으며 틀린 부분을 자필로 수정까지 해놓은 답변서를 내놓았다. 그 분량이 A4용지로 20쪽에 달했다. 디테일에도 강한 그의 면모를 엿볼 수 있는 에피소드였다

군인의 기강… 그러나 섬세한 면모

바쁘신데 시간 내주셔서 고맙습니다.

“별 말씀을…. 그런데 요즘 이곳이 소문이 나서 사람들이 투어를 많이 와요. 조금 전엔 전국에서 종친회 사람들이 와가지고 식당에서 막 대접하고 금방 보냈는데….”

평소에도 창녕 공장에 자주 오시나요?

“잘 못 오지. 일이 있으면 오지만, 여기서도 잘 하고 있는데 뭐.”

그러면 주로 어디 계십니까?

“공장에 다니기도 하지만…. 우리 KNN 건물을 잘 지어놨거든요. 그런데 아직 식당을 오픈 못했어요. 그래서 부산 우리 지점 2층에 조그마한 사랑방을 만들어놓고 거기서 주로 일을 하죠.”

   

평소 일정은 어떻게?

“회사 일은 거의 다 맡겨놓고 일일이 챙기지는 않는데, 그런데도 하는 일 없이 바쁘네요.”

운동이나 취미 생활도 좀 하시나요?

“건강 관리한다고 등산도 하고 골프도 좀 치고 하죠.”

등산을 좋아하신다던데, 주로 어떤 산에 가시나요?

“멀리 올라가진 못해요. 요즘은 집 근처 금강공원 한 시간씩 돌고 온천하고 그러죠. 뭐.”

혼자서요?

“우리 집사람(김양자 여사)하고….”

그 외에 특별히 사모님과 함께 하는 취미 같은 건 없나요? 영화를 본다든지….

“그런 게 없어요. 워낙 바쁜 삶을 살아오다 보니 영화, 이런 데에 취미를 못 가졌어. 요즘 젊은 아이들과 달리 우리 시대엔 취미라는 걸 가질 수 없었어요. 우린 손님들 접대하느라 술 마시고, 공장 챙기고, 새벽에 또 나가고….뭐 그렇게 살았지.”

언론보도를 보니 아드님(넥센타이어 강호찬 사장)께 경영권을 넘기고 2세 경영체제를 구축하고 있다던데.

“금년에 법적으로 넘겼지. 준비단계라고 볼 수 있죠.”

고향이 이반성면 길성리 맞으시죠?

“태어나기는 마산시 성호동 43번지에서 났어요. 본가는 길성리 맞고….”

집에 어른이 부자였다고….

“잘 사는 편이었지. 근방의 토지는 모두 우리 것이었으니까. 가을 되면 수십 대의 트럭이 수곡(收穀) 가져오느라 줄을 잇곤 했지. 그러다가 북마산에 큰 터를 잡았지.”

논이 몇 마지기나 됐는데요?

“음…. 이백 몇 십 마지기 정도. 500석을 했다고 하니까. 그런데 그걸 모두 (아버지) 당대에 모았어요. 그 과정에서 워낙 알뜰하게 살았지. 심지어 반성 5일장에서 상하기 직전의 갈치를 사다 매달아놓고, 그거 한 번 쳐다보고 밥 한 숟갈 먹고….(웃음) 그런 일화가 있을 정도로 살았지. 그만큼 절약하며 살았다는 거지. 당시에는 아끼는 게 돈이었으니까.”

아니 집이 부유한데도 그렇게 살았단 말입니까?

“그렇게 돈을 모았다는 얘기지. 그리고 옛날엔 부자라고 해서 있는 대로 쓰고 그러진 않았어요.”

지금은 그 전답이 다 어떻게 되었습니까?

“1950년 자유당 조봉암 장관 시절, 내 나이 열두 살 때 농지개혁으로 소작인들에게 다 나눠줬지. 그 바람에 가세가 기울게 되었죠.”

방송인 강호동과 기업인 강병중

아. 그렇게 되었군요. 그런데, 저희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방송인 강호동 씨의 아버지와 사촌 간으로 아는데.

“우리 아버지가 4형제였는데, 그 중 막내 삼촌이 호동이 할아버지였어요. 그 삼촌이 키도 크고 아주 잘 생긴 분이었어요. 그런데 농지개혁 때 받은 지가증권까지 갖고 가서 진주를 거점으로 사업을 하셨는데 성공하진 못했죠. 나에겐 삼촌이고 호동이한텐 할아버지니까, 호동이하고 나하고는 오촌 간이죠. 호동이 아버지 강태중 씨는 당연히 저한테 사촌이 되고.”

네. 그렇잖아도 저희가 강태중 씨를 만나 인터뷰했는데요. 그 분이 1972년에 사촌 동생인 넥센 강병중 회장의 도움을 받아 사업을 시작했다고 말했습니다. 어떤 도움을 주신 건가요?

“아, 그 때 한일합섬 김한수 회장과 함께 내가 초대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을 했거든. 당시 부산에서 성창기업 정태성 회장님이 회장을 하고 내가 총무를 맡았지. 그 때 김한수 회장을 잘 알아가지고 한일합섬에 식료품 납품하는 걸 연결시켜드렸죠. 그런데, 능력이 워낙 있어 그걸 잘 하시더라고. 사업규모를 계속 키워가더라고.”

네. 그렇게 해서 돈을 많이 버셨다더군요. 강호동 씨는 한 번씩 인사하러 오나요?

“1년에 명절 딱 두 번 만나죠. 마산 완월동에 형 집이 있어요. 거기서 다 모이는데, 이반성 길성리 산소에 갔다가 친지들 모두 만나 호동이 집에서 점심 겸 저녁 겸 함께 먹고 헤어지는 거죠.”

인터넷에 검색을 해보면 강 회장님의 조모, 그러니까 강호동 씨의 증조모 묘소 풍수가 워낙 좋아 두 분이 모두 성공하셨다는 이야기가 떠돌고 있는데, 혹 그런 말씀 들으셨나요?

“지관들이 그런 말을 한다더군요.”

아버지 고향은 길성리지만, 마산에서 태어나셨고…. 그러면 학교는 계속 마산서 고등학교까지 다니신 건가요?

“아니. 마산에서 태어났지만 어머니가 내 나이 세 살 때 돌아가셨어요. 그 때문에 마산 있다가 시골 가서 초등학교를 다녔죠. 중학교는 마산동중학교를 갔고, 마산고를 나왔어요. 그런데 중학교 2학년 때 아버지도 돌아가셨어요. 그러니까 재산도 다 없어진데다 아버지까지 돌아가셨으니 그 때부터 힘든 생활이 시작된 거죠. 고등학교까진 어떻게 나왔지만, 대학 진학도 어렵게 되었어요. 그래서 돈 안 드는 육군사관학교에 시험을 쳤죠. 제 위에 형님이 한 분 있지만, 댓 살 차이여서 거기도 힘들고. 그런데 육사에서 떨어진 거야. 내가 머리가 그렇게 나쁜 편은 아니었는데, 키가 작아서 그런 것 같아. 164cm였는데, 그 때까지만 해도 육사는 165cm 이상이 되어야 합격시켜줬거든.”

그래서 동아대 법대로 간 거군요.

“아니. 곧바로 공군에 가서 군대를 마치고 동아대에 들어갔지. 당시만 해도 동아대 법대가 한강 이남에선 사법고시 합격생이 가장 많았거든. 그 때 우리 형수님 도움을 받아 대학에 갈 수 있었죠. 형수한테 처음에는 학비 지원을 받았고, 나중엔 아르바이트를 해서 겨우 대학을 졸업할 수 있었어요.”

어떤 아르바이트를?

“여러 가지를 했는데,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교도소에서 일을 했어요. 내가 직접 교도소 서무과장을 찾아가서 사정을 했죠. 처음엔 크게 나무라더니 세 번을 찾아가니 자리를 하나 주더라고. 김형배라는 양반이었는데 지금도 안 잊혀지네. 용도계라고 시설관리하는 부서였는데 거기서 온갖 심부름을 했지. 그 앞에는 운수회사에도 일한 적이 있는데, 거긴 너무 월급이 적었어요.”

강병중 회장./박일호 기자

결혼과 졸업, 그리고 창업

그렇게 해서 1966년 대학을 졸업하고 곧바로 이듬해인 1967년 운수회사를 창업하셨다고 되어 있는데.

“66년 9월에 졸업했는데, 그 해 결혼을 했어요. 한 마을에 있던 아가씨와 결혼을 했는데, 그게 참 어렵거든요. 그런데 우리 외할머니와 처가댁에 할머니가 친구였어요. 그 동네에선 그 두 분이 제일 터줏대감이었는데 그 두 분이 사돈이 되기로 합의했던 거지. 그게 현실로 이뤄졌어요. 처가댁도 장인어른이 4형제 중 둘째였는데, 처 백부 되시는 분만 고향에 남고 장인어른과 삼형제가 모두 일본에 건너가 성공을 했어요. 성공 후 두 분은 일본에 남고 장인어른은 귀국해 정미소도 하고 논밭도 사들여 큰 부자 소리를 들었죠. 일본에 남았던 처삼촌 두 분은 자기네들이 어릴 때 공부 못한 게 한이 되어 고향에 중학교를 세웠는데, 거기서 집사람이 학교를 관리하면서 교편을 잡고 있었어요. 그런 상황에서 결혼하자마자 졸업을 하게 됐고, 당장 일을 해야 하는데, 학교 다닐 때 아르바이트로 운수회사에 있었던 경험이 있어서 내용을 좀 아는 거야. 그래서 중고 화물차 수입허가를 내야 하는데, 누군가 중앙정보부에서 허가를 받아 나에게 찾아왔어요. 그래서 일제 중고 화물차 수입을 시작했죠. 처음엔 한 대당 50만 원씩 남았어요. 그 때 집 한 채 100만 원, 150만 원 할 때니까 많이 남은 거죠. 그 때 돈을 많이 벌었어요. 모두 300대 정도를 팔았으니까.”

그 때 회장님은 그런 사업을 할 자본금이 없었잖아요.

“그렇지 나는 돈이 없었고, 일본에 처가댁에서 돈을 부쳐줘서 시작했지. 그걸 하다 보니 또 꾀가 생겨서 운수회사를 해야 겠다 생각을 했고, 그래서 옥정산업을 창업했어요.”

옥정산업이라는 이름은 누가 지은 건가요?

“다마이(たまい·玉井)라고 일본에서 친지들이 옥정건설을 했거든. 그 이름을 땄지. 그 때는 지입차였어요. 옥정산업주식회사, 옥정운수주식회사 등을 계속 만들었죠. 그러던 중 일본에 갔다가 앞바퀴는 하나고 뒷바퀴는 두 개인 소형 삼륜차가 골목길을 누비고 다니는 걸 봤어요. 도로가 좁은 우리나라, 부산에 잘 맞는 차종이라고 생각해 당시 기아자동차에 찾아가서 이런 차를 만들 수 있냐고 물었죠. 그 때 기아자동차도 막 그걸 만들기 시작하던 때였어요. 그런데 자기들은 그걸 얼마나 팔 수 있을 지 걱정하고 있더라고. 내가 500대는 팔아주겠다고 하니까 얼마나 좋아? 그래서 부산 돌아와서 당시 박영수 시장에게 찾아가 면허를 달라고 했지. 당시까지만 해도 우마차가 온통 시내를 휘젓고 다녀 오물 치우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었거든. 삼륜차가 대중화되면 길거리 오물 문제가 해결된다고. 그렇게 해서 쉽게 허가를 받았어요. 그게 화물자동차 면허로는 안 되고 별도 용달운수업 허가를 받았어야 했거든요.”

아, 그래서 용달이라는 이름을 회장님이 그 때 직접 지으신 거군요.

“그랬죠. 그렇게 해서 화물차 운수회사와 용달차 운수회사를 여러개 가지게 됐고, 이들 회사 이름으로 수백 대를 팔고 지입도 했죠. 5년쯤 지나 운수회사를 그만 둘 때 내 앞으로 등록된 차량만 850대 정도 되었으니.”

그러다가 어떻게 타이어 산업으로?

“당시 통일주최국민회의 대의원을 한 게 큰 도움이 되었어요. 그게 상당히 사회적 지위가 있었거든. 그 때 알게 된 사람 중 부산 문화관광호텔 윤두상 사장이 당시 흥아타이어 영남총판을 하고 있었는데, 그 인연으로 재생타이어 공장을 불하받아 하고 있었어요. 그걸 나에게 팔고 싶다고 하기에 이걸 하게 된 동기가 됐죠. 마침 운수회사를 하면서 펑크가 자주 나서 골치를 앓고 있던 터라 그걸 해보기로 한 거죠. 그래서 1974년초 남천동 우체국 자리에 있던 1100평 쯤 되는 공장을 사서 시작했는데, 제조업이라는 게 운수업과는 달라 참 어려웠어요. 원료 구입부터 품질관리, 영업까지 보통 일이 아니에요. 작지만 전문가를 붙여야 겠다고 생각하여 공장장도 선발하고, 품질 쪽에서도 사람을 모셔오고 판매 책임자도 두고 그렇게 하여 지금까지 온 게 넥센타이어가 되었죠.”

강병중 회장./박일호 기자

창원상의 최충경 회장과 특별한 관계

그런데 이반성중학교 옥광학원 이사장도 하셨잖아요. 중학교를 마산서 나오셨는데, 거긴 어떻게?

“그건 집사람이 교사로 있던 학교였고, 장인어른이 이사장으로 계시다가 내가 이어받게 된 거죠. 거기 출신들이 다들 머리가 좋아요. 창원상공회의소 최충경 회장의 사돈, 그러니까 며느리의 친정 엄마가 이반성중학교 출신인데, 아주 머리가 좋아요. 제 집사람의 제자였어요.”

아. 또 그렇게 연결이 되는군요. 회장님 호는 월석(月石)이신데, 그건 어떤 뜻인가요?

“암스트롱이 달나라 간 게 1969년이죠? 그 때 로터리클럽에 들어가 호를 짓게 되었는데, 달에서 갖고 온 돌이라는 뜻으로 원대한 꿈을 갖자는 의미에서 그 호를 얻게 됐어요.”

그래서 장학회와 문화재단의 이름도 월석이 되었군요. ‘원대한 꿈을 갖자’는 의미가 좋네요. 직원들에게 평소 강조하시는 말씀도 연관이 있나요?

“기업의 성패는 유능한 인재를 얼마나 확보하느냐에 달려 있죠. 저는 신입사원들에게 ‘무조건 저질러라’는 말을 합니다. 기업의 회장이든 임직원이든 제일 중요한 것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열정이고 도전정신이죠. 실패를 하더라도 책임은 회사가 질 테니 뭐든지 해보라고 합니다. ‘노 리스크, 노 게인(No Risk, No Gain)’이라는 말처럼 뭐라도 해야 얻을 것도 있다는 거죠. 전혀 엉뚱한 역발상도 할 수 있어야죠. 애플의 스티브 잡스도 ‘씽크 디퍼런스(Think Different)’라고 했듯이 다르게 생각하자는 말을 많이 합니다.”

회장님도 평소 메모하는 습관으로도 유명하시잖아요.

“45년 동안 사업을 해오면서 크게 실패한 적이 없는데요. 아마 그게 메모와도 관련이 있는 것 같아요. 결정은 신중하게 하지만, 일단 결정하면 강하게 밀어붙이는 스타일이죠. 무슨 일이 있으면 밤에 잠도 자지 않고 심사숙고를 합니다. 머리맡에 메모지를 두고,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메모를 해둡니다. 또 하나의 개인적인 특징이 있다면, 친인척을 회사에 두지 않습니다. 넥센은 물론 계열사에도 관리
직 중에 친인척은 한 명도 없습니다.”

특별히 메모하는데 필요한 수첩이나 다이어리가 있습니까? 아끼는 필기구라도?

“그런 거 없어요. (주머니에서 접힌 A4 용지를 꺼내며) 그냥 이런 종이지. 볼펜도 그냥 이런 걸 써.”(보통 문방구에서 파는 1000~2000원 짜리 볼펜이었다.)

아끼는 애장품도 없나요?

“그런 게 없어요. 우리 세대는 먹고 사는 게 바빠서.”(웃음)

특별히 재미있는 일은?

“그냥 일을 통해 성취하고, 그런 게 재밌는 거지 뭐.”

기업을 해오면서 가장 큰 성취를 느꼈을 때는?

“1974년 본격적으로 공장을 확장해야겠다고 마음먹고 부산 반여동에 있던 삼우빵 공장을 매입했던 거였어요. 당시 삼립빵, 삼미빵, 삼우빵 등 빵공장이 많았는데, 우후죽순처럼 생기다 보니 운영이 어려워져 삼우빵이 묻을 닫은 거죠. 그게 경매로 나왔는데 팔리지가 않아 성업공사가 애를 먹고 있었죠. 그걸 내가 3억 2400만 원에 3년 연부로 샀는데, 사고 나니까 마침 정부에서 일본 제빵 기계 수입을 금지했어요. 그래서 빵 기계 품귀현상이 생겼고, 내가 산 삼우빵 공장에 있던 제빵 기계를 서로 사가려고 했죠. 3억 남짓 주고 공장을 사서, 빵 기계만 4억 조금 더 받고 팔았으니 큰 이득을 본 거죠. 땅값을 뺀 건 물론이고 공장 짓고 나서도 운영비로 쓸 돈이 남을 정도였어요. 반여동 공장은 지금 수영강변에 있는 자동차 매매단지 자리에 있었는데, 그게 3300평 정도여서 제대로 된 공장을 할 수 있게 됐죠. 사람이 인생을 살면서 몇 번 기회를 갖는다고 하는데, 결혼 직후의 중고차 수입과 운수업이 저에게 첫 번째 기회였다면, 두 번째 기회는 반여동 공장이었죠.”

거기서 확실한 기반을 잡으신 거네요?

“반여동 공장에서 일본과 기술제휴도 하게 되었는데, 당시 일본 3대 재벌 계열사인 스미또모 고무에서 우리 튜브를 사겠다고 먼저 연락이 왔어요. 그런데 제품을 보낸 지 보름도 안돼 스미또모에서 사장과 공장장, 품질책임자를 일본으로 불렀어요. 고베에 갔더니 튜브 샘플을 토막토막 내서 쭉 늘어놓고 호통을 치더군요. ‘인명과 관계되는 제품인데, 이 따위로 만들어서 되겠느냐. 한 쪽은 두껍고, 한 쪽은 얇다. 접착 부분이 잘못됐다. 전부 가져가서 다시 만들어 오라’는 것이었죠. 그래서 저는 오히려 역제안을 했어요. ‘이제 튜브는 당신네들에게 사양산업 아니냐. 우리에게 기술을 전수해 달라. 기술료는 충분히 주겠다’고요. 결국 기술제휴를 따냈어요. 그 때부터 일본 수출 길을 열었고, 1981년쯤에는 미국 시장에도 진출을 하게 됐죠.”

‘타이어 강’ 일본·미국시장 진출한 사연

미국 시장 진출 때는 어떻게?

“미국 쪽에는 타이어 판매 전문회사를 하는 유태인 한 분을 알게 돼 거래를 하게 되었는데, 그 양반이 우리 제품 가격이 너무 싸니까 상당히 많은 양을 사서 미국 전역에 뿌렸어요. 그런데 미국의 튜브 시장에 한바탕 난리가 났습니다. 당시 우리 튜브 가격이 미국의 약 30%밖에 안 되었으니까요.그 때 미국 로빈스라는 회사에서 텔렉스를 보내서 스무 컨테이너를 사려고 하니 가격을 제시해달라는 요청이 왔어요. 반가웠죠. 그런데 그 회사에서 ‘당신들 공장을 봐야겠다’고 하는 겁니다. 오라고 했죠. 덩치 큰 세일즈 매니저와 공장장이라는 사람이 왔는데, 칙사 대접을 하고 해운대 조선비치호텔에 재운 후 다음날인 일요일 공장을 보여줬죠. 그 때만 해도 인건비가 굉장히 쌌고 근로자들이 군인처럼 머리를 짧게 깎고 일요일도 없이 일하면서 새마을 노래를 부를 때였어요. 미국 사람들과 공장에 들어가는데, 간부들이 경례를 하면서 ‘충성!’ 하고 구호를 외치니까 깜짝 놀라더군요.

그런데 알고 보니 이 사람들은 바이어가 아니라 미국의 튜브 제조업자들이었어요. 워낙 우리 튜브 가격이 싸니까 염탐하러 온 거죠. 귀국할 때가 되어서야 ‘당신들을 속였다. 미안하다’ 하더군요. 그렇게 미국에 돌아간 그들이 자기들 오너에게 ‘한국에서 보니까 미국 튜브 산업은 끝났다’고 보고를 했고, 그 때부터 미국은 아예 튜브 산업을 접게 됐죠.”

IMF 때인 1997년 당시 부실기업으로 법정관리 중이던 우성타이어를 인수해 성공시켰잖아요.

“앞서도 얘기했지만, 넥센이 예전에는 흥아타이어의 자회사였죠. 그래서 넥센과 우성타이어는 뿌리가 같습니다. 당시 넥센은 신품 타이어를 제외하고 재생 타이어와 타이어 튜브, 솔리드 타이어까지 생산하고 있었는데, 기회가 되면 신품 타이어 공장도 꼭 운영하고 싶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죠. 우성타이어 인수는 98년 말부터 시작됐는데, ‘위험하다’며 말리는 사람도 많았어요. 그러나 공장을 둘러보면서 충분히 수익을 낼 수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됐죠. 인수 후에는 구조조정 과정에서 인원을 감축하기보다 오히려 늘렸고, 대신 효율을 높이는 데 주력한 게 주효했고, 직원들도 마음을 열기 시작했어요.”

앞으로 타이어 산업은 어떻게 변화하게 될까요?

“타이어는 기초 원료의 90%가 기름입니다. 세계 타이어업계는 원유성분을 줄이고 식물성 기름을 쓰기도 합니다. 원유 대신에 오렌지 가공공장에서 버린 껍질에서 추출한 기름이나 해바라기씨 기름을 사용해 친환경 저연비 타이어를 만들기 시작했어요. 앞으로는 원유를 쓰지 않고도 타이어를 만드는 시대가 올 거라고 봅니다. 고무나무에서 나오는 생고무도 크게 보면 천연기름이라고 할 수 있어요. 그래서 앞으로 자동차는 전기자동차 시대가 되고, 타이어는 저연비 타이어 시대가 옵니다.

제가 제일 신경을 많이 쓰는 게 연구 개발이에요. 최근 5~6년간 연구소 인원을 3배 이상 늘렸어요. 처음엔 박사를 뽑았죠. 그런데 이 사람들이 박사는 박사인데, ‘타이어 박사’는 아닌 거예요. 그래서 지금은 고분자 분야를 전공하는 석사 출신들이 많고, 석사로 들어와 박사 학위를 받는 사람도 많습니다. 불과 몇 년 전 82명이던 연구 인력이 지금은 330명 정도로 늘었는데, 더 늘릴 예정입니다.”

실패한 쓰라린 경험들

살아오시면서 실패한 경험이나 가장 힘들었던 순간은 없었나요?

“사업을 하면서 제일 힘들었던 건, 금융업을 하다 IMF가 닥쳐 정리를 해야 할 때였죠. 금융업은 부산 경남을 수도권과 대칭되는 지역으로 발전시켜야 하겠다는 순수한 마음에서 시작해 첫 번째로 마산에 경남생명보험을 설립했어요. 또 부산상의 회장을 하면서 동남은행을 부산에 설립하도록 주선했고, 제일투자신탁도 세웠고, 상은리스도 상업은행과 공동 설립했죠. 경남리스에도 대주주가 되었는데, IMF로 모든 게 허사가 되어버렸어요. 경남생명과 제일투자신탁은 운 좋게 매각했지만, 나머지는 팔지도 못하고 투자한 게 모두 종이로 변하고 말았죠.”

많은 기업이 낮은 인건비 등을 이유로 해외에 투자하고 있는데, 넥센타이어는 국내에, 그것도 창녕에 대규모 공장을 건설했잖아요.

“창녕공장 건설은 모험이 아니라 도전입니다. 1조 2000억이라는 대규모 투자인데, 이런 결정을 한 것은 생산성과 효율성 때문이죠. 중국이나 동남아에 공장을 지으면 땅값이 싸고 임금도 낮지만, 그만큼 관리가 어렵고 불량률이 높습니다. 생산원가를 절감할 수는 있지만, 국내 우수인력이 생산하는 타이어의 품질과 가격 경쟁력에는 미치지 못한다는 거죠. 또 해외공장은 예상하기 힘든 변수도 많아요. 이미 메이드인 코리아 제품은 브랜드 이미지가 높아 중국이나 동남아 제품보다 10% 이상 비싼 가격으로 팔 수 있어요. 그래서 국내 제2공장도 충분히 승산이 있다고 봤죠.

특히 저는 부산·울산·경남이 하나가 되어 인구 600만의 동남광역경제권을 만들어야 한다는 소신을 갖고 있어요. 그래야 수도권과 경쟁하고 대칭되는 지역이 되어 국토균형발전에도 기여할 수 있는데, 우리 창녕공장이 거기에도 나름대로 역할을 할 수 있을 거라고 봅니다. 부산과 경남이 이렇게 싸우기만 해선 안 돼요. 부울경특별시를 만들어야 한다고 봐요. 내가 부산·진주발전협의회 공동의장을 맡은 것도 그런 이유죠.”

참 재미없는 사람이 느끼는 재미

다음 질문은 ‘앞으로 꼭 이루고 싶은 일이 있다면?’이었다. 강병중 회장이 미리 준비한 답변에는 모범 답안이지만, 재미는 좀 없는 말들이 적혀 있었다. ‘넥센타이어가 세계 최고 기업이 될 수 있는 기반을 만들겠다. 힘이 닿는 데까지 기업 이윤을 사회에 환원하여 어려운 사람들과 공부하는 학생들을 돕고, 지역문화예술과 학술 분야도 적극 지원하겠다.’ 그러면서 월석선도장학회, 월석문화재단, KNN문화재단의 운영계획을 꼼꼼히 적었다.

인터뷰하는 강병중 회장(오른쪽)./박일호 기자

그래서 이렇게 다시 물었다.

이런 사회공헌 사업 말고도 다른 분야로 더 확장시키고 싶은 일은 없나요?

“타이어사업은 더 확장하면 안 됩니다. 이게 워낙 기술집약적이고 자본집약적이어서 이것 하나에 집중해야지. 금호타이어가 무너진 것도 이것저것 하다가 그렇게 된 거예요. 이것만 해도 얼마든지 크게 할 수 있어요. 한우물만 파야죠. 이미 130개 국가에 수출하고 있지만, 이제 유럽시장에도 진출해야죠.”

역시 천생 기업인이다. 다시 좀 가벼운 이야기를 물어봤다.

5촌 조카인 강호동 씨가 최근 방송에 복귀했는데, 강호동 나오는 TV 프로그램은 가끔 보시나요?

“당연히 보죠. 다시 나오자마자 시청률이 확 오르데?”

강호동 씨를 넥센 광고모델로 쓸 생각은 안 해보셨나요?

“우리하곤 안 맞지.”

왜요? 덩치도 크고 하니까 파워풀한 이미지가 맞지 않나요?

“파워? 그런가? 그런데 우리가 생산하는 골프공 모델도 한 번 생각해봤는데, 사실 그쪽은 광고를 잘 안 하거든.”

인터뷰를 마치면서 든 생각은 ‘사업으로 성공한 사람은 사업 이외에 재미를 붙이지 못하는구나’ 하는 것이었다. 일하는 것 외에 특별히 즐기는 취미도 없고, 아끼는 물건도 없고, 심지어 영화도 안 본다니 무슨 재미로 살까? 하긴 그랬으니까 성공했겠지 하는 생각도 들었다. 도전과 성공 그 자체에 재미를 느끼고 살아온 인생이었으니 말이다. 지금도 그는 기업을 더 키워야 한다는 목표의식으로 충만해있었다. 넥센에서 받은 자료에는 현재 1조 7000억 매출을 2015년에는 3조 원으로 성장시키는 목표가 적혀 있었다.

기업의 성장은 고용 창출은 물론 지역경제와 국부(國富)의 원천이라는 점에서 사회 공헌이며 애국이다. 그럼에도 뭔가 2% 아쉽다는 생각이 드는 건 무엇 때문일까? 망구 내 생각일 지도 모르겠지만, 그가 일단 영화나 음악부터 좀 취미를 붙여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 메모를 워낙 좋아하니까 몰스킨 다이어리의 질감과 몽블랑 만년필의 필기감에서 작은 행복을 느껴보는 것도 좋겠다. 그 정도면 호사취미도 아니지 않나? 월급쟁이 기자도 이 정도는 누리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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