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영로 옛길을 되살린다] (34) 서울

계사년 첫 나들이입니다. 지지난해 시작한 통영로 옛길 걷기가 이제 절반의 완성을 이루는 순간입니다. 삼도수군통제영이 있던 통영을 출발한 통영로가 드디어 한양의 남대문에 도착하게 되는 것입니다. 도착은 또 다른 출발을 전제로 하는 것이기에 다음부터는 호남 땅을 거쳐 오는 통영별로를 걸어서 내려올 계획입니다. 조선시대 다른 모든 대로들이 하나의 노선을 유지했던 것과 달리 통영로는 별로를 따로 운용하고 있어서 그 길의 완성은 마치 원점회귀 산행을 하는 것과 비슷한 개념이어서 늘 새롭습니다. 오늘 계사년 첫 나들이에서 절반의 완성과 새로운 시작을 예고할 수 있어 더 없이 좋은 출발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달내고개를 넘다

달(이)내고개를 넘으니 통영에서 시작한 길은 어느새 서울로 들어섭니다. 달내고개는 달리 달우내현(達于乃峴)이라 했으니 달우내는 달이내의 소리를 빌려 적은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 고개는 그 고도가 150m 정도로 높은 편이어서 수레가 다니기는 어려워 보입니다. 실제 촌로들도 소나 말을 끌고 넘기도 했지만, 수레는 삼전도(三田渡)쪽으로 돌아 탄천(炭川) 가를 따라 고개 남쪽의 삼거리에서 통영로와 만나게 됩니다. 고개를 내려서면 옛골인데, 예전 이곳 농토는 도곡동의 독구리마을 사람들이 오가며 지었다고 합니다.

달내고개를 사이에 둔 이 구간은 옛길의 정취가 잘 남아 있어 걷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습니다. 조금 더 걸으니 원터마을에 닿습니다. 이곳은 청계산 들머리에 있던 원이 북동쪽으로 옮겨가면서 그곳은 신원이 되고 옛 원이 있던 곳은 원터 또는 원지(院趾)라는 지명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곳 원터마을은 휴일이면 청계산(淸溪山: 618.2m)을 찾는 등산객들로 무척이나 붐빕니다. 이 산은 고려 때에는 청룡산(靑龍山)이라 했다가 어느 때인가 이 산의 남서쪽에 있는 청계사(淸溪寺)와 같은 이름으로 바뀌었습니다. 마침 사진을 보완하러 이곳을 찾았을 때가 지난 대선 직전이었는데, 이곳을 찾은 등산객들을 대상으로 유세를 벌이느라 그런 난리법석이 없었지요.

달내고개를 내려서면서 본 원터 신원 일원.

원터 돌미륵

이곳 원터마을에는 고려 말엽에서 조선 초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헤아려지는 돌미륵을 모신 미륵당(彌勒堂)이 있고 그 앞에는 아담한 크기의 삼층석탑이 있습니다. 서울시유형문화재 제93호로 지정 보호되고 있는 이 돌미륵은 아주 신비한 영험이 있다고 알려져 일제강점기에 일본으로 실어내려고 한 적이 있었습니다. 이 미륵에게 치성을 드리면 휘파람 소리를 내며 계시를 주었다는 영험담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까닭에 사람들이 미륵불의 영험을 믿고 계속 몰려들자 1926년 무렵에 일본 경찰들이 미륵불의 배꼽을 쪼아내었고, 그 뒤로부터 영험을 상실하였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돌미륵은 지금도 정월 대보름이면 마을 사람들이 동제를 올리는 신앙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원터마을의 돌미륵을 모신 미륵당. /최헌섭

이곳에서 옮겨간 신원(新院)은 원터마을 돌미륵에서 동북쪽으로 500m 정도 떨어져 있습니다. 〈대동지지〉에 기록되기 전에 이곳으로 원이 옮겨졌는데, 이 책에는 달내고개에서 예까지 10리이고 동쪽으로 조선 태종의 무덤인 헌릉(獻陵)이 5리 떨어져 있다고 나옵니다. 원터에서 신원을 지나 양재로 향하는 길은 비닐하우스 군락 사이로 곧게 뚫린 1차로 도로입니다. 이 길을 거의 벗어날 즈음에 있는 원지교에서 여의천(如意川)을 건너면서 동쪽으로 바라보이는 곳이 얼마 전 나라를 시끄럽게 했던 내곡동입니다. 이곳을 벗어나면 전혀 다른 서울의 두 모습을 보게 됩니다. 지금까지의 길이 근교 농촌의 모습을 간직한 곳이었다면, 그 북쪽은 어느새 빌딩이 숲을 이룬 도심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그곳은 바로 통영로 구간에 마지막 남은 양재역(良才驛)이 있던 양재동입니다.

이곳에는 비석거리 말죽거리 역말 역촌 박석고개 등 옛길을 헤아릴 수 있는 지명들이 더러 남아 있습니다. 비석거리는 지금의 양재2동주민센터 부근에 있던 군수 길융수의 선정비에서 비롯한 이름입니다. 말죽거리는 양재역 옛터의 남쪽에 있던 마방(馬房)으로 한양으로 들어가기 전 말에게 죽을 먹이던 곳입니다. 역말 역촌은 옛 양재역 자리를 일러 주는 이름으로 지금의 언주초등학교 일원입니다. 박석고개는 고갯마루에 박석을 깐 데서 비롯한 이름인데, 옛 양재역과 가까운 고개는 역 북쪽의 싸리고개가 있습니다. 아마 이 고개에 박석을 깔았던 것으로 보입니다만 지금은 고개의 자취조차 가늠하기 어렵습니다.

미륵당 돌미륵. /문화재청 문화유산정보

양재역

비석거리에서 양재천을 지나 역말에 있던 양재역은 고려시대에는 양재(楊梓)라 했는데, 조선시대에 이르러 12곳의 속역을 거느린 찰방역이 되어 양재도(良才道)를 관할했습니다. 이곳과 관련한 역사적 사건으로는 양재역 벽서(壁書)의 옥으로 알려진 정미사화가 떠오릅니다. 이 사화는 명종 2년(1547) 9월 경기도 과천의 양재역에서 '위로는 여주, 아래에는 간신 이기가 있어 권력을 휘두르니 나라가 곧 망할 것'이라는 내용으로 된 익명의 벽서에서 비롯한 옥사입니다. 이 사건은 익명의 벽서를 문제 삼았다는 절차상의 잘못이 많이 지적되는데, 네거티브 정치를 일삼는 지금의 우리 정치 현실과 그리 달라 보이지 않습니다.

벽서에 나오는 여주는 남명 조식 선생이 단성현감을 제수 받고 제출한 사직서인 '단성소(丹城疏)'에서 '자전께서는 생각이 깊으시기는 하나 깊숙한 궁중의 한 과부에 지나지 않고'라 표현한 문정왕후를 이릅니다.

이곳을 지나면 역삼동입니다. 마을의 이름은 양재역이 있던 역촌(말죽거리), 웃방아다리, 아랫방아다리를 합친 이름입니다. 역삼동을 지나 한강으로 이르는 도중에 나오는 마을은 논현동입니다. 논현은 논실로 이르는 고개인 논고개에서 비롯한 이름인데, 예서 한강 근처까지 이어진 논에서 비롯하였으며, 강가의 신사동은 새말 신촌(新村)과 모래벌 사평(沙坪)을 합친 이름입니다. 이곳 사평에는 원집인 사평원(沙坪院)이 있었고 한강을 건너는 나루인 사평도(沙坪渡)가 있던 곳입니다.

한강을 건너다

나루터는 조선시대에 이르러 한강도(漢江渡) 또는 한강진(漢江津)이라 불렸는데 지금의 한남대교 남단 즈음이 그 자리입니다. 바로 이곳이 〈대동지지〉에 나오는 경도(京都)에서 10리 거리인 한강진이며, 곧 서빙고진(西氷庫津)이라 한 곳입니다. 그런데 서빙고는 반포대교와 동작대교 사이에 있으므로 조선시대 후기에 이르러 남대문에서 남산을 끼고 돌지 않고 곧장 남쪽으로 질러가기도 했던 모양입니다.

이 강을 건너야 비로소 조선의 경도(京都)인 한양에 듭니다. 지금이야 강남이 신도시라 살기에 좋다고 하지만 조선시대에는 강북이 진정한 중심지였습니다. 한양(漢陽)이란 이름도 한강의 북쪽이란 의미를 담고 있을 정도이니 말입니다. 한강을 건너 한남동 남쪽의 보광동으로 들면 예서부터 각 나라의 대사관을 여럿 지나게 됩니다.

이태원을 지나 숭례문에 닿다

이태원(梨泰院)은 원집이 있던 곳인데, 조선 초기에는 왕성과 같은 이태원(李泰院)이라 했습니다. 임진왜란 뒤 귀화한 일본인들이 모여 살면서 이타인(李他人) 또는 이태원(異胎院)이라 했는데 여기에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부녀자들이 당한 슬픈 역사가 서려 있습니다. 그러다가 조선 효종 임금 때에 배나무를 많이 심은 뒤부터 지금의 이름을 갖게 되었습니다. 어쨌든 이타 또는 이태에 얽힌 이름 때문인지 이곳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미군이 주둔하게 되었고 지금은 외국 관광객들이 즐겨 찾는 관광 명소로 자리 잡았습니다.

이태원을 지나면 해방 이후 귀국한 교포들에게 살 곳을 내어준 해방촌입니다. 이곳을 지나 후암동 동쪽 남산에는 목멱산 봉수가 자리하고 있는데, 주로 제2거 노선을 따라 우리와 줄곧 길동무를 해 왔던 봉수가 그 소임을 다하는 곳입니다. 동쪽으로 남산을 바라며 걷던 길은 힐튼 호텔을 지나면서 조선의 도성이 바라보입니다.

지금이야 빌딩이 들어서면서 옛 경관을 헤아리기도 어렵게 변했지만 예전에는 이즈음에서 도성의 남쪽 대문인 숭례문이 한 눈에 들었겠지요. 숭례문은 2008년 이즈음의 방화로 소실되어 지금 복원 작업이 한창 진행 중인데, 지난 연말에 공개한 바에 따르면 성벽 복원을 포함하여 전체 공정의 95%가 완료되어 머잖아 그 웅장한 자태를 드러낼 것으로 보입니다.

/최헌섭(두류문화연구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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