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가 밝았다. 다들 이맘때면 묵은 해를 정리하고 새해의 계획을 세우느라 소리 없이 바쁘다. 1년 설계를 하자면 몸이 가볍고 머리가 맑아야 하거늘, 연말을 보내느라 지친 심신으로는 쉽사리 생각이 정리되지 않는다. 이럴 땐 녹차만큼 좋은 벚도 없다.

그런데 이 녹차를 앞에 놓고 보니 그 신세가 참으로 애처로워 보인다. 이른바 '커피의 습격' 때문이다. 냉정한 기호식품의 세계에서 동반성장이란 이상적인 구호에 불과하다. 커피 소비 증가로 시장이 잠식되면서 국내 녹차 시장 규모는 2004년을 정점으로 꾸준히 하향 추세에 있다.

생산량도 줄어들어 국내 최대 녹차 생산지인 전남 보성군의 경우 녹차나무를 뽑아내고 폐원(廢園)하는 농가가 점점 늘고 있다. 지난 5년 새 이렇게 사라진 녹차밭이 보성 지역에서만 축구장 150개를 합한 것보다 넓다. 서울 인사동의 전통찻집에서조차 커피를 팔지 않으면 매장 유지가 힘든 실정이라고 한다.

하동군의 한 녹차밭 풍경. 국내 녹차 시장규모는 커피에 밀려 꾸준히 하락하는 추세이다. /경남도민일보DB

녹차의 처지가 이 지경이 된 것은 다양한 원인이 있겠지만, 생활 속에서 즐겨야 할 음료수를 예(禮)니 도(道)니 하며 지나치게 격식을 차려야 할 대상으로 격상시켜버린 '차문화'도 한몫했을 것이다. 대중과 괴리된 음식은 그것이 얼마나 뛰어난 맛과 효능을 가졌다 한들 일상 속에서 뿌리 내리지 못한다.

전남 강진에 가면 다산 정약용이 유배 생활을 했던 다산초당이 있다. 다산은 이 곳에서 10년의 유배 생활을 보내는 동안, 많은 제자를 길러내고 〈목민심서〉 〈흠흠심서〉 〈경세유표〉 등 500여 권의 저서를 집필함으로써 조선 후기의 실학을 집대성했다. 절망적인 상황속에서도 이처럼 역사에 길이 남을 성취를 이룰 수 있었던 것은 학자로서 본분을 지켰던 의연함과 그 과정에서 결코 '풍류'를 잃지 않는 여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다산초당에는 '다산4경'이라는 정약용의 손길이 직접 닿은 4가지 유적이 있다. 재미있는 사실은 그 중 세 가지가 차(茶)와 관련되어 있다는 것이다. 찻물을 얻기 위해 파 놓은 약천(藥泉)과 찻물을 끓이던 부뚜막인 다조, 그리고 차를 즐기며 바라보던 연못인 연지(蓮池)가 그것이다.

유배 생활 중에도 차를 통해 일상의 소소한 즐거움을 발견한 다산의 여유를 보고 있자면 차 한 잔이 절로 생각난다. 그래서 다산초당을 가면 다도가 맞느니 다례가 맞느니 하는 격식을 떠나, 생활의 여유를 찾기 위한 방편으로 차를 즐겼던 우리 선조들의 방식이 훨씬 이치에 맞다는 생각이 든다.

현대인들은 몸에 좋다 그러면 굳이 권하지 않더라도 적극적으로 구하는 경향이 있다. 차의 효능에 대해서야 새삼 강조할 필요가 없겠지만, 일찍이 초의선사께서 설파하신 차유구덕(茶有九德)은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차의 매력은 이 아홉 가지 미덕 속에 다 담겨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뇌를 맑게 한다(이뇌 利腦), 귀를 밝게 한다(명이 明耳), 눈을 밝게 한다(명안 明眼), 입맛을 좋게 한다(구미조장 口味助長), 피로를 풀게 한다(해로 解勞), 술을 깨게 한다 (성주 醒酒), 잠을 적게 한다(소면 少眠), 갈증을 멎게 한다(지갈 止渴), 추위를 이기고 더위를 물리게 한다(방한척서 防寒陟暑).

갑자기 녹차 한 잔이 생각나지 않으신가?

/박상현(맛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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