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를 위해 일본에 머무는 형편이다보니 글 쓸 공간이 필요하다. 공공도서관은 노트북을 사용할 수 없고 대학도서관은 학생증이 있어야 출입이 가능하다. 카페를 이용하자니 장시간 앉아 있기 눈치가 보였다. 며칠을 헤맨 끝에 적당한 장소를 발견했다. 후쿠오카 모 대학의 학생 휴게실이다. 많은 학생들이 테이블 하나씩을 차지하고 공부를 하고 있었다. 볕이 잘 드는 창가에 자리를 잡았다. 사흘쯤 지내다 보니 마치 그전부터 내 공간이었던 것처럼 편안하고 집중도 잘됐다.

그런데 토요일에 갔더니 어르신 몇 분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계셨다. 자료와 책을 잔뜩 펴놓고 토론하는 모습이 사뭇 진지해 보였다. 다음주 토요일에도 그 다음주 토요일에도 같은 일이 반복됐다. 그제서야 '이게 바로 벤쿄카이구나'하는 생각이 스쳤다.

후쿠오카 모 대학 학생 휴게실에서 공부 모임을 하고 있는 노인들. /박상현

벤쿄(勉强)는 우리말로 공부를, 카이(會)는 모임을 뜻한다. 따라서 벤쿄카이(勉强會)는 말그대로 공부 모임이다. 일본에는 남녀노소 그리고 지역을 불문하고 벤쿄카이가 매우 활성화되어 있다. 때마침 최근에 두 곳의 벤쿄카이 회원들과 만났다.

김해시와 자매결연을 맺고있는 후쿠오카현 무나카타시에는 '김해의모임'이라는 벤쿄카이가 있다. 한국과 가야 문화에 관심이 많은 시민들의 모임이다. 이들은 정기모임을 통해 한국어와 가야의 역사를 공부하고, 더러는 자비를 들여 가야문화축전까지 다녀갔을 정도로 열성적이다.

후쿠오카현 기타큐슈시에서는 '가쿠우치문화연구회'가 있다. '가쿠우치'란 주류판매점 한편에 작은 테이블을 설치해 서서 술과 간단한 안주를 먹을 수 있는 공간이다. 공업도시였던 기타큐슈시는 노동자를 위한 가쿠우치가 매우 발달했다고 한다. 연구회는 가쿠우치를 기타큐슈의 독특한 지역문화로 여기고 이를 깊이 있게 연구하고 있었다.

조만간에는 윤동주의 시로 한국어를 공부하는 모임과도 만날 예정이다. 윤동주 시인은 해방을 불과 6개월 앞둔 1945년 2월 이곳 후쿠오카형무소에서 스물아홉의 짧은 생을 마감했다. 그가 생의 마지막을 보낸 후쿠오카에 그의 시로 한국어를 공부하는 모임이 있다는 사실이 사뭇 감동적이기까지 했다.

이처럼 일본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벤쿄카이는 몇 가지 특징이 있다. 우선 주제가 매우 다양하고 구체적이다. 물론 자신의 직업이나 전공과는 별 상관이 없다. 따라서 모임은 주로 평일 일과 후나 주말에 이루어진다. 특히 노인들의 공부 모임이 매우 활발하다. 무엇보다 이들은 인간관계보다는 공부 그 자체에 목적을 두고 있었다.

보수정당인 자민당의 압승으로 끝난 총선거를 불과 엿새 앞둔 지난 10일. 일본의 모든 뉴스의 첫머리는 교토대 야마나카 신야 교수의 노벨 생리의학상 시상 소식이 차지했다. 이로써 일본은 1949년 첫 수상 이후 19명의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하는 나라가 되었다. TV로 야마나카 교수의 노벨상 수상 장면을 보는 동안, 내 자리를 꿰어차고 토론하던 노인들의 진지한 표정이 오버랩됐다.

일본의 노벨상 수상 소식이 전해질 때마다 한국의 언론에서는 그 비결을 분석하느라 바쁘다. 그리고 언제나 체계적인 교육시스템과 국가의 지속적인 지원이라는 모범답안을 내놓는다. 하지만 그런 제도적인 문제보다는 오히려 때와 장소에 상관 없이 뭐든 배우고 익히는 사회적 분위기가 진짜 비결이 아닌가 싶다.

/박상현(맛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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