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을 촬영해야 한다는 말에 수줍은 미소를 짓는 한양숙(45)씨. 중년의 고갯길에 접어들었음에도 마냥 소녀같이 순수하다. 그는 비장애인이면서 (사)한국정신지체장애인애호협회 경남도지회장을 맡고 있는 미혼의 사회복지사.

어릴 적 꿈이 학교 선생님이었지만 생활여건으로 그와 비슷한 정신지체아동을 비롯해 지체장애인들을 가르치며 돌보는 사회복지를 선택한 사람이다.

사람이 어떤 인생을 걷게 될 지는 참 알 수 없는 것이다. 지난 77년 거처할 곳 없는 아이들을 돌보기 위해 꽃집을 운영하게 되면서 초보 봉사활동을 하게 됐다. 한씨는 장애재활시설에 근무하면서 점차 복지에 관심을 가져 지난 83년 국립사회복지 연수원에서 사회복지사 자격과정을 수료해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하게 됐다. 그러면서 86년 9월 전국에서 8번째로 창립한 한국정신지체장애인 애호협회 경남도지회장으로 14년 동안 활동하고 있다.

늘 빠듯한 살림살이. 정부의 지원금으로 운영하기란 턱도 없고 그래서 시작한 것이 전통차 도구와 천연염색옷감, 야생화 등을 파는 후원사업이다. 이렇게 푼푼이 모아진 돈은 그나마 알찬 살림에 보탬을 준다. 정부에 하고픈 말도 많은데 풀어놓자면 끝이 없어 긴 말은 굳이 하고싶지 않다. 다만 “복지관계 협회를 정확히 파악해 형평에 맞는 지원을 해야 할 것”이라고만 말하고 싶단다.

힘든 가운데서도 자신도 어려우면서 후원금을 선뜻 내어 주는 후원자들이 있기에, 세상의 때가 묻지않은 초롱초롱한 아이들의 눈망울이 있기에 보람을 느낀다는 한씨. 비장애인들은 정신지체장애 아동을 생산적이지 못하며 재활의 가능성이 없다고들 생각하는 게 못내 안타깝다. 이들의 정신지체는 말 그대로 잠시 멈춰 있을 뿐 교육과 훈련을 통해 충분히 극복할 수 있다.

“새롬의 집 공동생활 프로그램을 운영할 때였습니다. 식사 뒤 자신이 마셔야 할 물을 자력으로 먹기 위해 식사 때마다 ‘물’을 달라는 교육을 시켰습니다. 그 때마다 입을 내밀어 조금씩 물을 달라는 흉내를 냈는데 5년만에 그 아이의 입에서‘물’이라는 단어가 튀어나왔을 때는, 아 그때는 정말 눈물이 나올 지경이었죠. 신변처리프로그램의 교육과 훈련덕택에 조금씩 대소변을 가려갈 때 지금하고 있는 일이 ‘하늘의 뜻’인 것 같습니다.”

조기교육만 제대로 된다면 얼마든지 재활할 것이라는 것이 한씨의 일관된 주장이기도 하다. 조기교육으로 일반학교로 진학해 졸업한 장애학생이 2명, 현재 고등학교를 다니고 있는 학생도 2명이다. 이들이 일반학교를 다니게 된 것은 부모들이 ‘하면 된다’는 신념으로 아낌없는 사랑을 아이들에게 쏟았기 때문이다. 부모가 나약하면 아이도 나약해지게 마련이다.

여담이지만 한씨는 복지협회를 운영하면서 ‘미혼’때문에 나름대로 힘들었다. 후원자 모집을 해야하다보니 아직까지 우리사회의 요직에 남성들이 많아 부탁의 말을 하기가 그리 쉽지않았다. 공무원들과 마찰이 있을 때도 미혼여성이라는 편견에 맞닥뜨려야 했다.

그러나 한씨는 아버지의 말에 용기를 갖고 살아간다. 어머니는 5남매 중 장녀이면서 복지활동한답시고 혼자 살고있는 한씨가 안쓰러운 눈치셨지만 아버지는 조금 달랐다. ‘너의 뜻이 그러하다면 굳이 결혼을 강요하진 않으마. 대신 잘 하거라’하셨다. 한씨는 “지난해 돌아가신 아버지의 유품을 정리하면서 당신이 젊었을 때 지역사회 발전에 일조를 한 것을 보고 제가 이 일을 하고 있는 것이 아버지의 피를 물려받은 것 같다”면서 아버지의 한없는 내리사랑을 그리워했다.

한씨의 고향은 창원시 대산면 일동리 작음 마을이지만 최근 4년 정도 살았던 밀양시 단장면 바드리마을을 더 고향처럼 여긴다. 전통문화를 즐기는 친구들과 문인들이 있어 정서적인 안정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랑방 너머 한씨의 맑은 웃음 소리가 번진다. “주말마다 바드리마을에 있는 집에 들르죠. 군불 땐 따뜻한 방에서 하룻밤을 지내고 나면 일주일 피로가 말끔히 가신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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