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와 함께 바람난 주말] (48) 통영 동피랑 마을

강한 바람을 피해 골목으로 숨었다. 통영의 대표적인 어시장인 중앙시장 뒤쪽 언덕 마을에 자리를 잡은 동피랑 마을(통영시 동호동). 통영은 언제 찾아도 후회하는 법이 없다.

바다를 끼고 불어오는 겨울바람은 도시의 그것과는 다르다. 행여 한기가 들어올세라 옷을 여며야 하는 도시의 바람만큼 매몰차지 않다. 뺨에 닿는 기분이 상쾌한 것 같기도 하고 살짝 온기를 품은 것도 같다.

골목, 큰길에서 들어가 동네 안으로 이리저리 통하는 좁은 길. 골목이란 단어가 주는 느낌은 많이 변했다. 어린 시절 골목은 놀이터였다. 아침밥 숟가락을 놓으면서 "엄마 100원만"을 외쳤다. 그리고 대문을 열고 동네 골목에 나가면 일찌감치 나온 친구들이 기다리던 곳, 온종일 놀거리가 무궁무진했다. 이제 골목은 찾아보기도 어렵지만 더는 추억이 되지도 못한다. 골목이 주는 단어의 의미는 삭막하게 변했다.

생명이 펄떡인다. 부산하다. 강구안에 자리 잡은 중앙시장(통영활어어시장)은 평일임에도 활어들과 바다냄새로 생생하게 살아 있다.

이순신 장군, 어린 왕자 등이 그려진 벽화 앞에서 자세를 잡고 셔터를 누르면 동화 속 주인공이 된다.

"진짜 싱싱해서 바다로 다시 기어들어 갈라카는 굴 좀 보고 가이소." 제철 맞은 굴을 파는 상인들이 곳곳에서 발목을 잡는다. 시장 길을 살짝 비켜 왼쪽 골목으로 들어가면 언덕에 있는 마을이 바로 동피랑 마을이다. 세찬 바람을 피해 게딱지처럼 나지막이 자리 잡은 다닥다닥 붙어 있는 집들이 미로처럼 얽히고설킨 골목길을 사이에 두고 빼곡히 들어섰다. 사람 한 명 지나가기도 어려운 좁은 골목이 끝날 듯 끝날 듯 이어져 있다.

'동쪽 벼랑'이란 뜻의 동피랑 마을. 이곳은 조선시대에 이순신 장군이 설치한 통제영의 동포루가 있던 자리로, 통영시는 낙후된 마을을 철거해 동포루를 복원하고 주변에 공원을 조성할 계획이었다. 그러자 2007년 10월 '푸른통영21'이라는 시민단체가 공공미술의 기치를 들고 '동피랑 색칠하기-전국벽화공모전'을 열었고, 전국 미술대학 재학생과 개인 등 18개 팀이 낡은 담벼락에 벽화를 그렸다.

벽화로 꾸며진 동피랑마을에 대한 소문이 나기 시작하면서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하고, 마을을 보존하자는 여론이 형성되자 통영시는 마침내 동포루 복원에 필요한 마을 꼭대기의 집 3채만을 헐고 마을 철거방침을 철회했다. 지금 동피랑 마을 꼭대기에는 동포루 복원 공사가 한창이다. 그리고 철거 대상이었던 동네는 벽화 덕분에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통영의 새로운 명소로 변모했다.

올해 초 정우성·한지민 주연의 JTBC 〈빠담빠담〉에 이어 최근 종영한 KBS 〈세상 어디에도 없는 착한 남자〉 마지막 회에서 주인공 남녀가 7년 만에 재회한 촬영지로 더욱 유명해진 덕일까? 평일임에도 가족단위 혹은 연인끼리, 친구끼리 삼삼오오 몰려든 사람들로 제법 붐빈다.

그래서인지 1년 전보다 작은 카페들이 더 늘었다. 동피랑 마을 입구, 최근 트렌드를 따른 '언니는 동피랑 스타일'이라는 커피숍이 눈에 띈다.

약간의 물감과 붓 한 자루로 가난의 상징인 높은 언덕의 낮은 집들은 외계 행성에 사는 어린 왕자를 불러왔고, 정의를 수호하는 세일러문을 만날 수 있게 했다. 잡스 할아버지가 동피랑 마을에 사는 할머니와 사이좋게 미소를 짓고 있다. 바다 속도, 구름이 만개한 하늘도 모두 동피랑 마을 벽에 자리를 잡았다. 파이프를 입에 문 거인 선장도, 이순신 장군도 동피랑 마을을 지키고 있다. 그 속에서 자세를 잡고 셔터를 누르면 동화 속 주인공이 된다.

동피랑 쉼터, 옥상 전망대에 오르면 통영 바다가 한눈에 들어온다. 전망대를 뒤 편으로 동피랑 점방과 동피랑 구판장이 나란히 자리해 있다. 동피랑 점방은 주민들이 공동으로 운영하는 곳으로 다양한 기념품을 판매한다. 또 바다를 앞에 두고 강구안을 내려다보며 노천에 걸터앉아 엽서를 쓸 수 있는 공간도 마련돼 있다. 그 옆 동피랑 구판장은 잠시 몸을 녹이고 차 한 잔 마실 수 있는 전망 좋은 카페다.

   

겨울철 별미라는 '빼때기 죽'(고구마 단팥죽)이 눈에 들어온다. 잠시 쉬어가자 싶어 빼때기 죽을 시키고 창문 넘어 바다를 바라본다. 팥의 들큼함과 고구마의 달콤함이 만난 빼때기 죽이 하얀 연기를 솔솔 뿜어대며 앞에 놓였다. 걸쭉한 따뜻함이 속을 데운다.

2년마다 새로운 벽화를 그리는 까닭에 한번 와도 또 오고 싶은 마음이 들게 하는 곳이다. 잊혀버린 골목의 의미를 되새기게 하는 곳이다. 골목은 집과 집을 이어주고, 사람들이 오가는 길인 동시에 사람과 사람 사이를 연결해 주는 마음의 통로다. 하지만, 그곳엔 사람들이 살고 있다. 누구에게는 관광이지만 누구에게는 여전히 생존의 공간이다. 가난의 상징이었지만 이제는 누구나 한 번쯤 가보고 싶은 곳으로 새롭게 태어난 곳, 조금은 발소리를 죽이고, 조금은 목소리를 낮추는 예의를 지켜주어야 한다. 지금, 통영으로 떠난다면 포근한 바닷바람과 골목이 주는 따스함, 더 보탤 것도 없는 아름답고 이국적인 풍경을 감상할 수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제철을 맞은 싱싱한 해산물도 부담스럽지 않은 가격에 맛볼 수 있다.

바다를 앞에 두고 강구안을 내려다보며 노천에 걸터 앉아 엽서를 쓸 수 있는 공간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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