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라보예 지젝 "쉼없이 생각하고, 본질적 의문 던져야"

얼마 전 동유럽에서 온 한 낯선(?) 철학자가 한국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지난 6월 한국을 찾아 비무장지대와 쌍용자동차 희생자 분향소 등을 방문하고 두 차례 강연을 펼친 슬로베니아의 슬라보예 지젝이 그 주인공이다. "공산주의는 승리할 것"이라고 공공연히 외치는 이 난해하고 과격한 60대(1949년생) 철학자에게 한국 지식계와 언론은 왜 남다른 관심을 보인 것일까. 당시 지젝의 강연·인터뷰 내용과 동행 취재기 등을 한데 모은 <임박한 파국-슬라보예 지젝의 특별한 강의>가 출간됐다.

지젝은 영국의 <가디언>지가 "그의 저작 대다수는 해독불능"이라 했을 정도로 간단하게 요약하기 어려운 철학자다. 그럼에도 지젝의 인기는 국내 지식계에서 꽤 높은 편인데, <시차적 관점> <지젝이 만난 레닌> <까다로운 주체> 등 다수 저작과 <불가능한 것의 가능성> <로쟈와 함께 읽는 지젝> 같은 다양한 해설서·인터뷰집 출간이 이를 증명한다.

지젝의 한국 방문을 기획·추진하고 당시 '성과'를 <임박한 파국>으로 정리한 이택광 경희대 교수(영미문학부)에 따르면, 지난 6월 방문 때도 "지젝 열풍은 대단"했다고 한다. 두 차례 대학 강연 모두 2시간 넘게 진행되었지만, 중간에 강연장을 떠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진보·보수 언론 너나 할 것 없이 많은 보도를 쏟아냈음은 물론이다.

지난 6월 경희대 평화의전당에서 강연을 하고 있는 슬라보예 지젝.

진보는 정확한 질문을 던질 수 있어야

대체 지젝의 매력은 무엇일까? 역시 강연과 인터뷰는 한 페이지를 넘기기 힘든 저작들보다는 다소 쉽게 다가오지만, 그렇다고 명징하다고 할 순 없다. 이를테면 공산주의를 지지한다고 하면서도 공산주의를 사정없이 비판하고, 폭력에 반대한다고 하면서도 또 어떤 폭력에 대해선 긍정적인 자세를 취하는 식이다.

이는 지젝이 늘 강조하는 자신과 같은 지식인 또는 진보(좌파)의 임무에 기인하는 듯하다. 즉 진보는 어떤 문제에 대한 정답을 제시하는 게 아니라 정확한 질문을 던짐으로써 문제 자체를 재사유·재정의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가령 지젝은 "우리는 너무 이기적"이라는 보수주의자들의 도덕적 훈계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는 설치미술가 임민욱과 대담에서 "자본주의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보면 착각에 불과하다"고 지적했다. 하루 15시간 이상씩 일하고, 남이 어떻게 볼지 전전긍긍하며 자기계발에 힘쓰는 모습이 어떻게 이기주의냐는 것이다. 지젝은 오히려 내가 해야 한다고 느끼는 것을 하는, 정말 자신에게 의미 있는 일을 추구하는 '건강한 이기주의'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민주주의 역시 마찬가지다. 대통령선거가 한창인 우리에게 '국민을 위한, 국민에 의한 민주주의'는 마치 완벽하게 실현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과연 그런가? 경제 관료들과 재벌, 은행들이 '밀실'에서 어떤 결정을 내리는지 우리는 거의, 전혀 알지 못한다. 한미 FTA, 공기업 민영화 등 국민 삶에 결정적 영향을 미치는 사안이 어느 날 갑자기 발표되고 실행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는 진짜 선택을 할 수 없는 곳이다. 우리는 다른 민주주의 메커니즘을 발견해야만 할 것"이라는 지젝의 제언을 무시할 수 없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모든 것은 이데올로기다

지젝이 보기에 "모든 것은 이데올로기"다. 지젝은 이데올로기가 어떻게 우리의 생각을 대신하는지 끊임없이 묻고 파헤치며 진리를 찾아나간다. 이택광 교수는 이런 지젝의 작업을 '총체성에 대한 파악'이라고 표현했다. 이 교수에 따르면 "어떤 현상을 총체적으로 파악한다는 것은, 그 현상과 관련된 모든 증상과 적대, 그리고 비일관성까지도 전체의 일부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인지 지젝의 저서나 강연엔 스타벅스 커피부터 영화 <007> 시리즈까지 무수히 많은 예시가 등장한다. 사례 하나하나에 담긴 그의 전복적인 시각 자체도 흥미롭지만, 이 모든 걸 '총체성의 파악'이란 큰 관점에서 이해하면 지젝의 철학은 결코 넘지 못할 산이 아니다.

   

무엇보다 지젝은 구체적인 실천을 통해서도 분명한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미국 월가 점령 시위, 그리스 총선, 이집트 민주화 혁명 등 자본주의 모순이 드러나는 현장에 직접 참여하거나 발언하며 현실에 개입했고, 이번 한국 방문 때는 비무장지대와 서울 대한문 쌍용자동차 정리해고 희생자 합동분향소를 찾아 함께 생각하고 연대했다. 당시 진보신당 대표였던 홍세화를 만나 대담을 갖기도 했다.

핵심은 그것으로 보인다. 책 제목 그대로 자본주의는 '임박한 파국'을 맞고 있다는 것. 하지만 지젝은 어떤 과정을 거쳐 자본주의가 몰락하고, 또 새로운 사회는 어떤 모습을 띨지, 무엇보다 그것이 과연 긍정적이기만 할지 쉬이 결론을 내리지 않는다. 지금 중요한 것은 쉴 새 없이 의심하고 사유하는 것이다.

무엇이 문제인지 파악한다면 대안은 의외로 간단할 수 있다. 민주주의? 고작 선거에서 누군가에게 표를 던지고, 이 옷을 살지 저 옷을 살지 고르는 게 선택의 자유일 수는 없다. 우리는 우리 삶을 바꿀 진짜 선택을, 우리 삶을 위협하는 모든 것을 거부할 수 있는 진짜 민주주의를 쟁취해야만 한다.

이택광 기획, 208쪽, 꾸리에, 1만 2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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