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영로 옛길을 되살린다] (33) 경기도 용인~달래내고개

오늘은 옛 용인현의 중심지인 구성을 지나 서울이 바라보이는 청계산 잘록이의 달래내고개까지 걷습니다. 이즈음에서부터 옛길은 대체로 지금의 23번 국도가 덮어쓰고 있어 이와 비슷한 선형을 따라 서울 들머리까지 이르게 됩니다.

지난해 이곳을 지날 때도 지금과 비슷한 철이었습니다. 크리스마스를 앞둔 12월 중순에 이곳을 지날 적에는 시간이 여의치 못해 밤이 깊도록 걸어야 했습니다. 지난해 이맘때 어느 쇼핑센터 앞에서 늦게 합류한 길벗과 함께 자동차 불빛을 마주하며 서울을 향해 걸었던 기억이 새삼스럽게 살아납니다.

탄천(炭川)

탄천과 나란히 열린 통영로.

마북과 보정 즈음에서부터 옛길과 나란히 흐르는 탄천(炭川)은 용인시 기흥구 청덕리 수청동(水靑洞:물푸레울)에서 발원하여, 북쪽으로 분당과 성남을 지나 35.6㎞를 흘러 서울 잠실에서 한강에 섞입니다. 내의 이름은 조선 경종 때 남이 장군의 6대손인 탄수(炭搜) 남영(南永)이 살았던 마을인 숯골 또는 탄리(성남시민회관 일원)와 가까워 탄천이라 했습니다. 헌종 때(1847) 홍경모가 찬한 <중정 남한지>에는 "탄천은 낙생면에 있다. 원류가 용인의 석성산(石城山)에서 나와 서쪽으로 흘러 용인현 서쪽을 돌아 장장포(莊莊浦)가 되었다가 광교산을 지나 꺾여서 북쪽으로 흘러 낙생면을 거쳐 험천(險川)이 되고, 북쪽으로 흘러 들을 지나고 대왕면과 돌마면을 지나 삼전도(三田渡)로 들어간다"고 전합니다.

탄천과 나란히 걷던 길은 한국철도공사 분당차량사업소를 지나 독정에서 풍덕천 다리를 건너면서 헤어지고, 새터말 북쪽에서 풍덕천이 흘러들어 몸집을 불립니다. 풍덕천을 지나면서 옛길은 경부고속도로 서쪽으로 건너 두 길은 나란히 북쪽으로 이어집니다. 방축골을 지나 경부고속도로 상행선에서 마지막 남은 죽전휴게소를 거쳐 아랫손골에서 다시 동막천을 건너게 됩니다.

낙생역(樂生驛)

경부고속도로 서울요금소를 지나면 궁안이라 불리는 궁내동인데, 이곳은 중종 임금의 다섯째 아들인 덕양군 이기(李岐)의 무덤이 있는 곳입니다. 그래서 서쪽 고개에는 능고개라는 이름이 붙었습니다. 이곳을 지나면 머잖아 백현(栢峴)에 듭니다. 우리말로는 잣고개 잿너머라 하는데, 이곳을 지나면 옛 양재도(良才道)에 딸린 낙생역이 있던 곳입니다. 아마 지금의 판교동 낙생마을 일원이 역자리가 아닐까 싶습니다. 낙생역(樂生驛)은 조선시대에 양재→천천현(穿川峴)→낙생역→구흥(駒興)(용인)→김령(金嶺)(용인)을 잇던 역으로 고려시대의 안업역(安業驛)이 조선시대에 이르러 그리 고쳐진 것입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광주목 역원에 판교원(板橋院)과 같이 '주의 남쪽 45리에 있다'고 하였습니다. 달리 돌마역(突馬驛)으로도 불렸는데, <여지도서>에 돌마역으로 실려 있고, <광주부읍지> 등의 지지에서는 '낙생역은 주의 남쪽 40리 돌마면(突馬面)에 있다'고 한데서 그 유래를 헤아릴 수 있습니다.

너더리

역이 있던 곳은 널(목판:木板)로 놓은 다리가 있던 곳이라 '너더리' 또는 '널다리'라고도 하였습니다. 그 이름은 옛날 운중천에 둔 널로 만든 다리에서 비롯하여 한자로는 '판교(板橋)'라 적게 된 것입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광주목 역원에 "판교원(板橋院)이 부 남쪽 45리에 있다"고 했으며, <해동지도>에는 판교주막(板橋酒幕), <조선지도>에는 낙생면의 낙생역 자리에 판교역(板橋驛)을 표기해 두었습니다.

이곳은 예로부터 교통의 결절지대라 갈림길이 발달해 있었고, 조선시대 천천산(穿川山)·천천령(穿川嶺)·월천현(月川峴) 봉수가 가까이에 있습니다. 낙생역이 있던 곳을 지나면, 삼거리(三巨里)인데 <해동지도>에는 이곳에 삼가주막(三街酒幕)이 있다고 표기하였고, 지금도 판교 나들목이 자리하고 있어 예로부터 교통의 요충임을 알 수 있습니다.

천천현 봉수

너더리에서 금현동을 지나면, 서쪽으로 해발 170m 되는 평정봉에 천천현 봉수(천림산(天臨山) 봉수라고도 함)가 있습니다. 부산 다대포 응봉에서 처음 보내는 제2거의 마지막 봉수로 남쪽의 석성산봉수를 받아 목멱산(남산)봉수에 연결합니다.

정밀지표조사와 발굴조사를 통해 현존 봉수 중 그 규모가 가장 크고 굴뚝과 방호벽·담장이 옛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어 경기도 문화재 제179호로 지정되었습니다. 봉수는 5개의 굴뚝이 동-서 방향으로 나란히 배치되어 있고, 북쪽으로 서울의 목멱산 봉수를 향하고 있습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광주목 봉수에 '천천현 봉수는 남쪽으로 용인현 보개산에 응하고, 북쪽으로는 서울 남산 제2봉수에 응한다'고 했고, <중정 남한지>에는 이 봉수에 근무하던 봉수군의 인원은 봉군(烽軍) 25명, 보(保) 75명이라 하였으니, 봉군 5명이 조를 이루어 5교대로 월 평균 6일씩 근무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걸음이들은 때론 어두운 밤을 헤치며 걷다가 길을 묻기도 한다.

달래내고개

이 고개는 달이내고개 또는 주천현(走川峴) 월천현(月川峴), 천천현(穿川峴)이라고도 합니다. 고개의 이름은 <조선지도> 등 고지도에 나오는 고개 동쪽의 천호천(穿呼川)에서 비롯한 것으로 보입니다. 바로 지금의 탄천에 대한 이곳의 옛 이름이 천호천인데, 그것은 달내를 한자의 뜻을 빌려 그리 적은 것입니다. 그러니 달래내고개는 고개의 이름으로 가까이에 있는 달내를 끌어와 붙인 이름입니다. 한자로 적은 주천 월천 천천의 앞 글자가 달릴 주(走) 달 월(月) 뚫을 천(穿)으로 그 뜻은 모두 북쪽을 이르는 우리말 '달'을 표기하기 위해 훈차한 것입니다. 이런 지명은 전국적으로 적잖은 예가 알려져 있는데, 충주 달천(달래강)에서 살펴 본 바 있습니다. 이곳 달래내고개 또한 단지 모처의 북쪽을 흐르는 내를 이르는 '달내'가 '달래다'는 동사로 이해되면서 '달래나보지' 유형의 근친상간 설화를 이끌어 낸 것으로 보입니다.

전하는 지명 유래설화는 이러합니다. 옛날 이 마을에 '달아'와 '달오'라는 남매가 일찍 부모를 여의고 서로 의지하며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하루는 달오가 냇가에 빨래하러 나간 누나를 맞으러 갔을 때 갑자기 소나기가 퍼부었고, 동생을 보자 반가운 생각에 무심결에 일어난 달아는 비에 젖어 몸매가 고스란히 다 드러나 있었습니다.

   

비에 젖은 누나를 보고 성적 충동을 느낀 동생은 부끄러움에 어쩌지 못하고 자신의 생식기를 돌로 찧어 죽고 말았습니다. 이를 안 누나는 자신의 조심스럽지 못한 행동이 동생을 죽게 만들었다는 죄책감에 '달래나 보지, 달래나 보지' 하며 슬피 울다가 결국에는 나무에 목을 매어 자결하였다고 하여 이 고개를 '달래내고개'라고 부른다고 전해집니다. 서사구조는 충주의 달천에서 본 바와 다름없이 근친상간에 대한 금기를 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글을 마무리하고 있을 즈음에 이와 같은 근친상간 금기를 무참히 깨어버린 살 떨리는 기사가 실렸습니다. 초등학교 때부터 친오빠로부터 성폭행을 당했다는 한 주부의 슬픈 이야기였습니다.

달래나보지 유형의 남매간 성적 결합 이야기는 거의 모두 그 직전에 근친임을 깨닫고 관계를 파기하는 것으로 결말이 납니다. 간혹 동굴이라는 은밀한 장소를 이용하여 관계가 이루어지기도 하는데, 이 경우에는 벼락이 쳐서 남매가 하늘의 징벌을 받는 결말로 이어집니다.

그것은 이야기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욕망보다 도덕을 중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곳 달래내고개 설화에서 오늘날 우리가 새겨야 할 교훈도 바로 이런 게 아닐까 싶습니다.

/최헌섭(두류문화연구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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