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용호의 '우포늪에 오시면'] (21) 나무개벌(목포)의 50년 어부 이야기

우포늪에 많은 사람들이 방문합니다. 우포늪에는 새로운 연하디 연한 버드나무의 새 생명이 연두색 꽃을 만들어 내는 4월의 봄부터, 방문객을 시인으로 만들어 버리는 아름다운 가을까지 많이 오십니다. 12월 중순부터는 주요 손님 중의 하나인 학생들이 겨울 방학을 맞을 준비로 바쁘니 방문객이 조금 줄어듭니다. 그렇지만 학생 방문객들 대신 또 다른 반가운 겨울 손님, 겨울철새들은 여전히 올해도 잊지 않고 멀리 시베리아 등에서 우포늪을 찾아 왔습니다.

며칠 전 우포엔 올해 처음 눈이 펑펑 많이도 내려 아름다운 모습을 만들어 주었습니다. 비 오는 우포도 아름답지만 이렇게 1년에 한두 번 오는 반가운 손님, 눈 오는 날의 우포늪은 환상적입니다. 말 그대로 "야! 대단한데" 하는 말이 절로 나옵니다. 우포늪에 내린 눈은 재미있게도 다양한 모습을 자연적으로 연출해주는데, 눈이 녹은 중간중간은 둥근 원처럼 보이기도하고 새 모양으로 생긴 장면도 있어 유심히 관찰하시면 아주 재미있고 귀한 장면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우포의 다양한 모습을 보고 싶어 하시거나 사진 찍기를 좋아하는 분은 날씨를 체크하여 그런 날에 오셔야 될 것 같습니다. 눈이 오면 철새들이 먹이가 많은 우포늪에 옮겨 오기도 하는데 며칠 전 눈이 많이 왔던 오후엔 다른 곳에 있던 귀한 흑두루미 무리들이 우포늪 위를 나는 아름다운 장면을 볼 수가 있었습니다.

우포 습지와 지역주민의 관계를 생각하다가 우포늪에 언제부터 사람들이 살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우포늪이 위치한 창녕군에 사람이 살았던 가장 오래된 흔적은 아마도 8000년 전 신석기시대 사람들일 것입니다.

우포늪의 겨울 풍경. /경남도민일보 DB

낙동강 부근에 살던 8000년 전 그 사람들은 200년이나 된 소나무를 잘라 그 당시의 최신의 기술로 배를 만들었습니다. 그 배와 함께 6000년 전의 노가 발견되기도 한 부곡면 비봉리는 그 당시 사람들의 흔적이 남아 있는 귀중한 문화유산입니다. 일전에 부산시에 위치한 국립해양박물관을 방문하였는데, 그곳에서 한국 최초의 배인 창녕의 비봉리 배와 노 모형이 진열되어 있어서 매우 반가웠던 일이 생각납니다.

우포늪에는 언제부터 사람이 살았을까요? 우포늪이 바라보이는 주매마을에선 1980년대 초에 가야시대의 창녕형 토기들이 다량 출토되었습니다. 주매마을은 장연 노씨들이 400년 이상 살아온 집성촌인데, 1500여 년 전의 가야토기들이 다량 발견되어 우포 습지에 오래 전부터 사람이 살아왔음을 증명해주고 있습니다. 주매마을은 전형적인 배산임수형의 마을로 집들 뒤에 산과 저수지가 있습니다. 그 마을에서 가야 사람들은 논농사도 하고 우포늪에서 물고기도 잡아먹으며 생활했을 겁니다. 우포늪식당 뒤쪽의 나지막한 산들에서는 물론이고 우포늪에 인접한 부근 산에서도 높이가 30cm 정도 되는 큰 토기 등이 많이 나와 트럭에 싣고 갔다고 친척 중 한 명이 말해 주었습니다. 우포늪 중 하나인 나무개벌(목포)에 사시는 장재마을의 오춘길 씨는 소목마을 주민 한 분의 밭에서 토기들이 다수 발견되었는데 마을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었다고 합니다.

우포늪에선 올해가 작년처럼 추워서 그런지 얼음이 일찍 얼었습니다. 우포늪의 하나인 나무개벌(목포)에서 72년 평생을 살아오신 오춘길 어르신은 "동지 전에 얼음이 어는 것은 드문 일"이라고 합니다. 어린 시절 겨울의 나무개벌은 요즈음보다 얼음이 더욱 많아 어른들이 지게 지고 노동마을 쪽으로 나무하러 가기도 했고, 어린애들은 자기들이 만들어 손으로 밀면서 타던 스케이트를 재미있게 타다가 숨구멍이라 불리는 중간중간 안 얼거나 얇게 언 곳에 빠져 죽을 뻔하기도 했던 곳입니다. 나무개벌의 어부 오춘길씨(72)가 사시는 장재마을(장자골)엔 수도가 들어오기 전 우물(새미)이 없어 나무개벌 물을 길어 식수로 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목포제방이 만들어지기 전에 여름엔 낙동강 물이 올라와 마을 앞까지 담아 버렸습니다. 그러면 농부들이 심었던 나락은 농사가 영 시원찮아지기도 했습니다. 장재마을 뒤엔 황새봉이라는 산이 있습니다. 황새가 많아 황새봉인가 생각하고 있었는데, 오춘길 씨는 "모양 때문이 아닐까"라고 하십니다. 산 양쪽이 황새 날개같이 생겨 불리지 않았겠냐고 하십니다.

장재마을엔 우포늪 스토리텔링에 소개된 '서로 군대 가겠다던 형제' 이야기가 있는 곳입니다. 일제강점기 군대 가면 태평양 어느 곳에서 죽어, 살아 돌아온다는 보장이 없을 때 형제가 서로 군에 갈테니 남아 집안을 돌보라며 손잡고 울었다는 사연이 있던 곳입니다. 형제가 서로 양보하며 울었던 곳에 심어졌던 느티나무 터, 부인네들이 손을 호호 불면서 얼음 깨어 겨울에 빨래하던 빨래터는 흔적이 점점 없어져가니 훗날 우포늪 방문객들을 위해서도 표시를 하는 것이 필요할 것입니다.

방문객들이 우포늪에 오시면 보게 되는 마을과 마을 사람들에 대해서 안내해 드리고자 합니다. 나무개벌, 목포 앞에 위치한 장재마을은 일제강점기 주매마을 노씨 사람들이 주매마을이 일본 군사용지가 되어 할 수 없이 들어와 살게 된 곳이 사지마을과 장재마을입니다. 해방 뒤 일부는 주매마을로 돌아갔지만 많은 사람들이 남아 살았다고 합니다. 오춘길씨는 장재 마을에서 태어나 살아오셨습니다. 장재마을엔 대부분이 농사를 짓는데 오춘길 씨만이 유일하게 어부이십니다. 우포인 소벌과 나무벌에서 물고기를 50여 년간 잡아오신 어부시기에 그 분을 통해 이전과 지금의 우포늪의 변화를 알아보고자 여쭈었습니다. 그 분에 따르면 10여 년 전 부터 배스와 블루길이 있기 시작했는데 지금은 가는 곳마다 배스와 블루길이라고 합니다. 70년대엔 민물꽁치와 민물게가 있었는데 지금은 볼 수가 없다고 아쉬워합니다.

민물꽁치는 주둥이가 날카롭고 몸은 둥글둥글했으며, 민물게는 예전의 나일론 그물에 걸려 그물을 해치곤 했는데 오염되어 버려 그런지 요즘은 전혀 볼 수 없답니다. 민물장어도 많았는데 지금은 '우짜다가' 한 마리씩 잡히는 귀한 존재가 되었답니다. 벌에서 목욕을 하면서 조개도 잡고 했는데 요즘은 조개도 없다고 하십니다. 이전엔 잉어를 붕어보다 귀하게 생각했는데 요즘은 붕어로 회도 하고 진액도하니 붕어가 잉어보다 귀중하게 되었다면서 대접받는 것도 변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분이 부탁을 하나 하시네요. 붕어 10마리를 잡으면 암컷이 9마리이고 수컷은 1마리 정도로 성별 불균형을 이루고 있어 학술적 연구를 해볼 필요가 있다고 합니다. 논에 미꾸라지도 없고 논우렁이(논꼬디)도 줄어들었고 70년대에 비하면 물고기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하시네요.

오래전 사람들이 장재마을 앞을 지나 마산터 길과 사지포 제방 끝의 산으로 해서 창녕읍내로 갔다는데 주막들이 중간중간에 있었다고 합니다. 6·25전쟁 전까지 있다가 전쟁 후 사라져 버렸다고 합니다. 이는 생전에 저에게 말씀 해주신 고(故) 노지열 씨의 말씀을 확인해주는 것입니다. 노씨들이 많던 이 마을에서 고 노지열 씨가 이 분과 의형제를 맺었기에 마을 또래들이 냉대를 못했고 평생을 두 분은 좋은 친구로 잘 지내왔다고 합니다.

우포늪에 오셔서 혹 만나는 노인들이 있어 그 마을과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시면 우포늪을 이해하는 데 더욱 도움이 되리라 생각 됩니다. 그래서 저는 우포늪 인근의 이야기들을 기록하고 정리하여 방문객들에게 들려주고자 합니다.

최근 습지에서 중요해진 화두 중의 하나가 바로 습지지역 주민들의 지속적인 사용(sustainable use)입니다. 습지가 주민들에게 어떻게 사용되어 왔는가를 아는 것은 중요한 일입니다. 우포 관련 주민들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사진을 모아 볼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겨울이라 우포늪에 철새인 기러기와 노랑부리저어새, 큰고니 등 다양한 새들이 옵니다. 멀리 시베리아에서 우포를 찾아 그들의 할아버지와 할머니 그리고 아버지와 어머니가 살던 고향 땅과 물을 찾아온 손님입니다. 우포늪을 찾은 새 한 마리와 길가의 풀 한포기도 그냥 지나치지 마시고 보셨으면 좋겠습니다.

/노용호(우포늪관리사업소 연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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