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글을 완성하지 못했어. 글쓰기는 물구나무서기, 항문으로 먹고 입으로 뱉어내는 것. 일찌감치 숙제는 포기됐어. 네 몸은 검은색 저수지. 어설픈 잠수부는 육지를 잊어버렸지. 게을렀어. 잠이 많아졌지. 살도 쪘네. 네 방은 날마다 만든 무인도, 정지된 시간. 우리는 태양 아래 벗은 몸. 날씨도 잊었나. 세상도 몰랐지. 아무 하는 일도 없었어. 아무것도 이룬 것도 없었지. 네 목소리는 초록색 바람 소리, 대나무 통 울리는 소리, 댓잎 서걱대는 소리. 너, 라는 진공관. 난 숨을 쉬었을 뿐. 근데 호흡이 달라지려하는 건 또 뭐야.

음악이 있었구나. 술도 있었고, 비도 왔었나. 뭉글뭉글 안개는 음악이 되었네. 70년대 여가수의 끈끈한 목소리, 음악 소리에 취해 매일 마시던 포도주 빈병들, 지금은 어느 쓰레기장에서 뒹굴고 있을 낯선 포도밭. 싸구려 포도주 잔에 비친 맹랑한 달빛, 현란한 도시 야경, 시적으로 몽롱했던 네 창문. 맞아, 얼추 시도 함께 썼지. 기타도 어설프게 퉁겨댔어. 난 노래를 불렀어. 넌 내목소리가 정난이 같다고 했지. 내 목소리가 정말 그러하니.

그때 검은 새벽산은 혼란스런 시가지를 품어 안고 있었나. 그 산을 보며 또 어떤 약속을 했던가. 난 오십이 넘으면 가수를 할 거야. 70년대 묻혔던 낯선 여가수들의 노래를 다시 불러볼 테야. 그럼 죽은 아버지가 내 앞에 다시 와 웃으시겠지. 내 노래는 슬퍼, 언제나 과거야.

과거는 또 언제 현재와 함께 고이는 강이 돼버린 걸까. 고인 물의 평화. 그래, 바다를 향해 가려고 굳이 애쓰지는 말자. 목적이란 없어. 난 노래만 부를게. 그때까지 넌 잊지 않고 기타를 퉁겨줘. 내 목소리가 마음에 드니. 난 그렇게 너와 함께 떠도는 악사, 넌 무엇이 되지 않아도 좋아. 숨쉬기가 나쁘지 않아. 너, 라는 진공관. 난 호흡이 달라지려하는 것일 뿐. 근데 몸이 달라지려하는 건 또 뭐야.

   

새봄엔 수로왕릉 근처에 터를 잡자. 왕릉 뜰의 큰 나무들처럼 게을러지자. 땅에 배를 깔고 헤벌쭉 드러누운 그 몸들처럼 널브러지자. 그곳에서 먼 시간들을 평평하게 살자. 가뿐 호흡을 고르고 무거운 몸을 내려놓자. 그 땅 이름은 너, 라는 진공관. 난 몸이 바뀌고 있을 뿐. 근데 글이 달라지려하는 건 또 뭐야.

글은 나중에 다시 써 볼게. 노력이란 목적의 멍에를 써야하는 노동. 애써 노력하지 말자는 얘기. 그래서 글은 절대 완성되지 않았어.

/서은주(양산 범어고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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