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의 재발견] 굽이굽이 감도는 비상한 기운 서린 명당

의령군 궁류면 벽계리에서 한우산으로 길을 정하면 찰비계곡을 지난다. 여름에도 '차가운 비(寒雨)'가 내린다 하여 한우산이고, 그 물이 골짜기로 흘러 '찰비'라는 이름을 얻었다. 바위 생김새가 유난히 의젓한 의령이 품은 매력은 이 계곡에서도 한 자락 드러난다.

잘 닦아놓은 길은 찰비계곡을 지나 한우산 꼭대기로 이어진다. 궁류면 일대에 두루 걸친 한우산(836m)은 의령에서 두 번째로 높다. 봄 철쭉과 가을 억새가 매력적인 이 산은 영화 〈아름다운 시절〉(이광모 감독·1998) 마지막 장면에서 배경으로 등장한다.

한우산 꼭대기에서 눈길을 남서쪽으로 향하면 바로 자굴산(897m)과 마주친다. 의령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다. 자굴산과 한우산을 빼면 의령에서 800m가 넘는 산은 없다. 그래도 의령 땅 대부분은 산이다. 산성산(741m)·미타산(662m)·웅봉산(584m)·신덕산(533m)·선암산(528m)·마등산(427m)·잠등산(381m)·우봉산(372m) 등이 한 자리씩 차지하고 있다. 한우산에서 내려다보는 의령은 곳곳에 솟은 봉우리가 눈 닿는 데까지 이어지고 두루 퍼진 땅이다. 이 때문에 의령에서 두 번째로 높은 곳에서도 그럴듯한 들판이나 마을은 눈에 띄지 않는다. 한우산에서 멀리 보이는 시가지는 함안 것이고 창녕 것이다. 의령에서 의령이 보이지 않는다는 바깥사람들 핀잔이 아예 빈말은 아니다. 그래서인지 의령은 이곳이 품은 자산을 낯선 이들에게 냉큼 풀어놓지 않는 땅이다. 마주치고 겪으면서 다가서야 수줍게 매력을 드러내는 땅이다. 그런 면에서 경남 사람과 닮은 무뚝뚝한 고장이다.

자굴산 관광 순환도로./박민국 기자

땅 자체가 명당이다

의령을 대표하는 산은 자굴산과 한우산이다. 아쉽다면 봉수면에 있는 국사봉(688m)과 부림면에 있는 미타산(662m), 의령읍에 있는 벽화산(536m)을 더할 수 있겠다. 의령 동쪽과 남쪽을 휘감은 낙동강과 남강 역시 어느 물가에서든 수려한 풍경을 뽐낸다. 그러나 여기 사람들은 봉우리 하나, 물줄기 하나를 꼬집어 자랑하지 않는 편이다. 오히려 의령 자랑은 땅 전체를 펼쳐놓으면서 시작된다.

귀한 들판 대부분이 남쪽으로 물을 두고 북쪽으로 산을 등졌으니 전형적인 '배산임수(背山臨水)', 명당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치면 의령읍, 용덕면, 정곡면, 지정면이 그런 명당에 해당한다. 땅 생김새 자랑은 자연스럽게 의령이 낳은 큰 부자(富者) 이야기로 이어진다. 나라에서 손꼽는 부자 몇이 의령에서 태어난 게 땅에 서린 기운 덕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따지면 그 기운이 여기 사람들에게 고루 미치지는 않은 듯하다. 예부터 의령 사람들 살림이 그렇게 넉넉한 편이 아니었다.

   

의령군 전체 면적(482.9㎢) 가운데 농경지(66.6㎢)는 13.7% 정도다. 한우산에서 내려다본 풍경이 말하듯 여기 땅 대부분은 산이다. 들판은 남강을 낀 의령읍, 화정면, 용덕면 일대와 유곡천이 흐르는 유곡면, 부림면 일대에 비교적 발달했다. 하지만, 평야라고 할 만한 너른 들판을 찾기는 어렵다.

의령군 농가 수는 5200여 곳으로 전체 가구 가운데 36%를 차지한다. 농업을 빼면 제조업 인구가 전체 인구 가운데 12% 정도로 높은 편이다. 하지만, 대부분 50명 미만인 중·소규모 업체다. 의령군 주요 산업은 농업이라고 보는 게 맞다.

예부터 의령 이름을 널리 알린 것은 병풍과 한지(韓紙)다. 병풍은 궁류면 일대에서, 한지는 부림면 신반리, 봉수면 죽전리·청계리, 유곡면에서 주로 생산했다.

특히 의령 한지는 조선시대 진상품으로 중국에까지 널리 이름을 떨쳤다. 옛날 부림면 신반리에 장이 서면 전국에서 종이를 사려는 사람들이 몰려들었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 의령에서 한지로 누렸던 영화를 체감하기는 어렵다. 제작 과정이 자동화되면서 한지를 생산하던 농가 대부분은 손을 놓았다. 그리고 닥나무만 쓰던 한지도 비용을 이유로 펄프 등을 섞기 시작하며 제모습을 찾기 어려워졌다.

봉수면 서암리에 있는 '전통한지전시관'에서는 한지 제작 과정을 실물로 볼 수 있다. 의령군은 해마다 10월 신반장날에 맞춰 '의령 한지·병풍 축제'를 열어 옛 흔적을 이어가고 있다.

여기는 의병의 고장

남해고속도로에서 군북 IC로 빠져 의령으로 향하면 남강과 마주친다. 이 남강이 의령과 함안을 가르는 경계가 된다. 강을 가로질러 함안과 의령을 잇는 다리는 '정암교'다. 정암교 끝 의령 쪽에 서 있는 의젓한 문이 '의령관문'이다.

의령관문 옆에는 제법 너른 광장이 조성돼 있다. 지난 2011년 7840㎡ 면적에 조성된 광장 이름은 '의병광장'이다. 광장 가운데 우뚝 솟은 기단 위에는 백마에 올라탄 장군 동상이 세워졌다. 멀리서도 붉은 옷이 눈에 띄는 '홍의장군(紅衣 將軍)' 곽재우다.

여느 고장이었으면 그저 옛 성곽을 닮았을 뿐인 관문은 의령 입구이기에 남다르다. 이 관문에는 임진왜란 때 이 땅을 짓밟던 왜군을 당당하게 몰아낸 고장으로서 자부심이 서려 있다. 의령은 '의병의 고장'이다.

곽재우 장군 동상./박민국 기자

망우당 곽재우(1552~1617)는 의령군 유곡면에서 태어났다. 남명 조식(1501~1572)에게 배웠으며 1585년 과거에 급제했다. 그러나 지은 글을 선조가 못마땅하게 여겨 합격이 취소된다. 이후 정계 진출을 포기하고 고향에서 머무른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킨 곽재우는 의령·창녕·진주 일대에서 왜군을 상대로 승승장구하며 적 진출을 막는다. 전투 때마다 붉은 비단으로 만든 옷을 입어 '홍의장군'으로 이름을 떨쳤다. 이후 1597년 정유재란 때도 경상좌도방어사로 창녕·밀양·영산·현풍 등에서 왜군을 막으며 큰 공을 세웠다.

전쟁이 끝나고 선조는 곽재우에게 수차례 벼슬을 내리나 그는 대부분 사양하거나 짧은 기간만 관직을 맡았다. 말년에 벼슬을 사퇴하고 고향에서 지내던 곽재우는 1617년 사망한다.

의령읍에 있는 '충익사'는 곽재우 장군을 기리는 유적지다. '충익(忠翼)'은 그가 죽고 92년이 지난 1709년 나라에서 내린 시호다. 충익사 입구에는 의병탑을 세웠으며 안에는 곽재우와 더불어 활약한 장군 17명을 모신 사당과 이들 명패를 보존한 '충의각'이 있다.

또 충익사 바로 옆에는 '의병박물관'이 있다. 박물관에서는 곽재우 장군 유물을 비롯해 당시 의병 활약상을 엿볼 수 있는 시청각 자료를 볼 수 있다.

의령군은 이곳을 대표하는 볼거리 9곳을 '의령 9경'으로 묶었는데 '제1경'이 충익사다. 대부분 지역자치단체가 빼어난 풍경을 먼저 내세우는 것과는 사뭇 다르다. 지난 2010년 정부는 6월 1일을 국가기념일인 '의병의 날'로 제정·공포했다. 의령은 1972년부터 해마다 4월 22일 열었던 '의병제전'을 2011년부터 6월 1일 '의병의 날 행사'로 개최한다.

천하제일 큰줄땡기기

길이 251m, 둘레 5~6m, 무게 54.5t 규모로 만든 줄은 2005년 세계기네스북에 등재됐다. 의령에서 가장 큰 줄은 세계에서 가장 큰 줄이다. '천하제일'이라는 이곳 사람들 수식은 과장이 아니다.

줄다리기는 양쪽이 편을 나눠 힘을 겨루는 시합이다. 하지만, 의령에서 '큰줄땡기기'는 시합이 될 수 없다. 이는 온 동네 사람들이 모여도 들기조차 버거운 줄 크기 때문이다. 큰 줄 옆으로 지네 다리처럼 엮인 줄에 사람들이 달라붙지만 겨우 줄을 떠받칠 뿐이다. 애초부터 큰줄땡기기에서 힘은 겨룰 때가 아니라 거드는 데 쓰임이 있다. 여기 사람들에게 큰줄땡기기는 경쟁이 아니라 화합이다. 이는 제작과정에서부터 그렇다.

정월 대보름이 지나면 의령에 있는 238개 마을 주민들이 짚단을 모아 작은 줄을 만든다. 각 마을에서 만든 작은 줄은 주민들이 함께 메고 읍·면 집결 장소로 옮긴다. 줄을 옮길 때 마을마다 제를 올리고 축제 분위기를 부추긴다. 읍·면에 모인 줄은 경연 장소로 옮기고 사람들은 이를 엮어 큰 줄을 만든다. 이 같은 제작 과정은 큰줄땡기기 못지않게 중요하게 진행된다.

줄다리기는 한반도 중·남부 지역 농경문화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민속놀이다. 그런데 의령에서 유난히 규모가 커진 이유를 꼭 집어 말하기 어렵다. 이곳 사람들은 그저 의령 사람들이 통이 커서 그렇다며 웃어넘기곤 한다.

의령 큰줄.

의령이 자랑하는 큰줄땡기기 행사에서는 의령군이 품은 고민 한 자락이 엿보이기도 한다. 바로 고령화 문제다. 65세 이상 노인 인구가 전체 인구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7% 이상이면 '고령화사회'라고 한다. 2012년 의령군 전체 인구에서 노인인구 비율은 30.5%, 합천(31.7%)에 이어 경남에서 두 번째로 높다. 이 같은 노인인구 비율은 큰줄땡기기처럼 사람 손이 많이 드는 행사에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었다. 2005년 기네스북에 올랐던 큰 줄 규모를 더는 유지하기 어려워진 것이다. 의령군은 지난 2011년 큰줄땡기기 행사에서 큰 줄 크기를 줄인다. 251m였던 길이는 130m로, 줄머리 둘레는 4.5m에서 4m로, 지름이 12㎝이던 작은 줄은 10㎝로 줄였다. 또 벗줄 지름 역시 20㎝에서 15㎝로 줄였다. 일단 큰 줄 크기를 조정해 일품을 줄이기는 했지만, 동네마다 줄을 꼬고 옮기고 엮고 당길 사람은 당장 늘어나지 않을 듯하다. 그렇다고 앞으로 의령에 사람들이 몰릴만한 계기도 별로 보이지 않는다. 이는 큰줄땡기기뿐 아니라 의령군 전체를 생각해도 고민할 수밖에 없는 문제다.

큰줄땡기기와 더불어 의령이 자랑하는 민속놀이로 소싸움이 있다. 지금은 잠잠하나 한때 이웃 진주와 서로 '원조'를 주장하며 예사롭지 않은 다툼을 벌이기도 했다. 하지만, 고려 때 의령현이 진주 관할이었던 만큼 그 유래는 한뿌리라고 보는 게 타당할 듯하다. 어쨌든 의령 소싸움을 말한다면 비범한 싸움 소 '범이'를 빼서는 안 될 듯하다. 전국대회 19회 연속 우승 등 화려한 기록을 보유한 의령이 자랑하는 '싸움꾼'이다. 2010년 죽은 범이는 전국대회 191전 4패라는 기록을 남겼다.

의령은 해마다 '의병의 날'과 함께 '의령전국민속소싸움대회'와 추석에 '의령소싸움대회'를 열고 있다.

의령이 낳은 두 부자, 이병철·안희제

정곡면 중교리에 들어서면 너른 주차장이 눈에 띈다. 곳곳에 마을 안쪽으로 차 진입을 막는 안내가 있는 마을은 삼성그룹을 창업한 이병철이 태어난 곳이다. 마을 주변에 있는 가게 이름에는 '부자'가 많이 들어 있다. 주차장에서 200m 정도 들어가면 이병철 생가가 있다. 잘 단장한 옛 집은 토담과 바위벽으로 둘러싸여 있다. 이곳을 찾는 이들은 집 뒤편에 펼쳐진 바위벽을 예사롭지 않다며 치켜세우기도 한다.

호암 이병철(1910~1987)은 삼성그룹 창립자다. 1938년 삼성상회를 세웠으며 무역업도 했다. 1951년 삼성물산, 1953년 제일제당과 제일모직을 설립했다. 1964년 동양라디오와 동양방송을 만들고 1965년 중앙일보를 창간한다. 이후 중앙일보 등은 사돈인 홍진기 일가에 넘긴다. 1969년에는 삼성전자와 삼성전기를 설립했다.

이 나라 현대사에서 권력과 재벌 관계는 늘 탐탁잖았다. 1966년 '사카린 밀수 사건'은 재벌을 흘겨보는 이들이 꼽는 대표적인 사건 가운데 하나다. 이는 삼성이 울산에 공장을 짓던 한국비료가 사카린 2259포대를 건설자재로 꾸며 들여와 판매하려다 들통난 사건이다. 이 사건 탓에 이병철은 사업 일선에서 물러났으나 1968년 2월 다시 복귀하게 된다. 당시 야당 인사들은 박정희 정부가 재벌을 두둔한다며 강하게 비난하기도 했다. 4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그렇게 낯설지 않은 장면이다.

그런 면에서 백산 안희제(1885~1943)가 살아온 흔적은 같은 부자이면서 사뭇 다르다. 부림면 입산리에서 태어난 안희제는 어릴 때 한학과 함께 일찍이 신학문도 접한다. 1907년 부산에 구명학교를, 의령 중동에 의신학교, 이듬해 고향에 창남학교를 설립했다. 1909년 신민회에 참여해 회원 120명과 뜻을 모아 독립운동단체 '대동청년단'을 조직했다. 안희제는 1911년 블라디보스토크로 건너가 모스크바·만주 등에서 활동했다. 그리고 1914년 독립운동 자금을 조달하고자 귀국한다. 부산에서 곡물·면포·해산물 등을 판매하는 '백산상회'를 설립한 안희제는 1919년 자본금 100만 원을 들여 '백산무역주식회사'로 회사를 키웠다. 그리고 이 무역회사를 독립운동 자금공급원과 연락처로 삼는다. 안희제는 이후 교육·언론 등을 통해 끊임없이 항일투쟁을 이어갔다. 그러나 1942년 조선어학회사건과 1943년 만주 대종교단사건으로 구금돼 옥고를 치르다 출옥, 1943년 9월 2일 죽음을 맞았다.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의령군 부림면 입산리에는 안희제 생가가 있다.

궁류면에 남은 지워지지 않은 상처

의령에서 가장 풍경이 빼어난 곳으로 궁류면 일대를 꼽을 수 있다. 벽계저수지, 봉황대, 벽계계곡 그리고 찰비계곡에서 한우산으로 이어지는 경관은 의령이 품은 매력을 한데 모아놓은 듯하다. 하지만, 이곳은 의령에서 가장 깊은 상처를 품은 곳이기도 하다.

1982년 4월 26일 궁류면에 근무하던 순경 우범곤은 궁류면 일대를 한 번에 뒤집어놓는다. 사사로운 일로 마음이 상한 우범곤은 예비군 무기 창고에서 온갖 무기를 들고 나와 토곡리를 비롯해 압곡리, 운계리, 평촌리 등을 휩쓸며 총질을 했다. 그리고 자신도 잘못 터진 수류탄에 목숨을 잃는다. 이 사건으로 목숨을 잃은 이는 56명, 궁류면은 통째로 초상집이 됐다. 전두환 신군부가 정권을 쥐고 얼마 되지 않아 터진 이 사건은 온 나라를 충격에 빠뜨린다. 오늘날 이 사건은 미친 순경 한 명이 저지른 기억하기 싫은 참상으로 남아 있다. 하지만, 이 사건을 아는 사람들 중 일부는 오늘날까지도 한 개인이 아니라 역사적 배경을 아우르는 더 깊은 통찰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어쨌든 지금까지도 의령군은 궁류면에 지워지지 않은 상처를 치유하고자 많은 공을 들이고 있다. 먼저 끔찍한 사건으로 사람들에게 외면받던 고장을 단장해 '벽계관광지'를 조성했다. 또 평촌리에 세운 의령예술촌 역시 예술로 이 땅에 남은 아린 상처를 위로하고자 하는 노력 가운데 하나다. 역사도 사람도 자연도 의젓한 고장이 더는 상처받는 일이 없어야 할 것이다.

세계 최대 동굴 법당인 일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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