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어발식 확장·일감 몰아주기 등 '한국판박이'…강한 의지와 지속적 개혁으로 성공

이번 대통령선거 최대 화두 중 하나인 경제민주화·재벌개혁 해법과 관련해 중요한 시사점을 던져주는 나라가 있다. 최근 팔레스타인 민간인 학살로 전 세계적 비난을 받고 있는 이스라엘이 그 주인공이다.

특정 기업의 시장·경제력 독점 등 우리와 비슷한 문제를 안고 있는 이스라엘은 지난해 시민들의 광범한 저항운동을 계기로 상당히 혁신적이고 강력한 개혁 조치를 펼쳐나가기 시작했다. 이스라엘판 '재벌개혁'의 내용과 특징, 의미 등을 정리한 이지수 경제개혁연구소 연구위원(미국 뉴욕주 변호사)의 최신 보고서를 통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을 살펴본다.

지금은 정치 쇄신과 야권후보 단일화, '박정희 대 노무현' 구도 등 다른 이슈에 다소 뒷전으로 밀린 양상이지만 경제민주화와 재벌개혁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다수 국민의 요구 사항임에 틀림없다. 박근혜·문재인 등 주요 후보가 일제히 관련 공약을 발표했고, 또 얼마 전 문재인-안철수 후보 단일화 TV 토론에서 핵심 쟁점으로 맞부딪치기도 했다.

일요일 영업을 홍보하고 있는 창원시내 한 대형마트./경남도민일보DB

하지만 출자총액제한, 순환출자 금지, 대형유통업체 입점허가제 등 거론되는 대안들이 과연 실질적인 해법이 될지 의문을 제기하는 목소리가 적지 않다. 치밀한 전략 없이 일부 법 개정, 행정 규제 강화 등에만 치우쳐 있는데다, 재벌·기득권세력의 사활을 건 반발과 저항을 어떻게 뚫어낼지 뚜렷한 확신을 못 주고 있기 때문이다.

반면 이스라엘은 일단 강력한 의지와 지속성 측면에서 우리와 확연한 차이를 보여주고 있다. 거대 기업의 지나친 경제력 확대 등을 상시 견제할 '시장집중위원회'라는 특별기구를 설치한 것이 대표적이다.

수상과 재무성 장관 직속인 시장집중위원회는 지난해 9월 중간 보고서를 통해 금융과 산업 자본의 엄격한 분리, 재벌 소유구조의 대대적 재편과 소액주주 권한 강화, 그룹 내 특수관계인 간 거래의 투명화 등을 시급한 과제로 제시한 바 있다.

재벌개혁 특별기구와 특별법원 설치

이지수 경제개혁연구소 연구위원에 따르면, 1인당 국민소득 3만 1000달러의 경제 규모를 자랑하는 이스라엘은 우리나라와 마찬가지로 급속한 외형적 성장의 폐해가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 세부 내용까지 유사하다. 특정 기업집단의 경제력 독점, 문어발식 확장, 복잡한 소유구조, 금융과 산업의 밀착 등이 그것이다. 상위 10대 기업의 시가 총액이 전체의 40%가 넘고, 가족 또는 개인의 이해관계에 의해 지배를 받는 상장회사가 전체의 약 75%(총 613개)에 달할 정도이다.

이스라엘 정부의 대응 방향은 '매우 구체적'이다. 이 연구위원은 "시장에서 무엇이 잘못되었고 어떤 것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지 정확히 파악해, 과감하면서도 실효적으로 개혁을 추진하고 있다"며 "평가를 하기엔 시간이 얼마 흐르지 않았지만 이스라엘은 재벌개혁과 관련해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올해 4월부터 본격화된 이스라엘의 재벌개혁 조치는 크게 사전적 규제와 사후적 규제로 나눌 수 있는데, 사전 규제 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은 특수관계인 간 거래의 승인 절차를 엄격히 한 것이다. 이를테면 이스라엘은, 우리나라 대기업처럼 특정 계열사·관계회사에 '일감 몰아주기' 등을 시도할 경우 해당 이해관계와 무관한 독립주주들로 구성된 주주총회의 승인이 필요하다. 이사회 역시 이해관계가 있는 이사는 의결권 행사는 물론, 회의 참석조차 금지하고 있다. 모두 국내에서는 도입은커녕 공론화조차 되지 않은 해법들이다.

사후 규제는 더욱 파격적이다. 주주들이 이사회의 불법행위 등에 맞서 집단소송을 진행할 경우 정부가 소송 비용을 지원한다. 우리나라도 집단소송을 인정하고 있으나 늘 비용 문제가 걸림돌이 됐던 점을 감안하면 엄청난 진일보이다.

이지수 연구위원은 이보다 더 중요하고 의미 있는 개혁은 바로 '특별법원의 설치'라고 설명한다. 이스라엘 정부는 증권과 회사법을 다루는 특별법원을 설치했는데, 빠른 속도로 '진화'하는 기업들의 불법적 행태나 증권 관련 사안에 신속하고 정확하게 대응하기 위한 것이었다.

예의 그 파급력은 상당했다. 특별법원은 특수관계인 간 거래와 관련한 첫 사건에서 비록 모든 '절차'를 준수했다 하더라도 추가로 '완전한 공정성'의 기준을 지켜야 할 의무가 있다고 판결해 파장을 일으켰다. 즉 "주주들은 가능한 최고 높은 가격을 받을 권한이 있고 지배주주의 경우 다른 주주들이 손해를 보는 어떠한 거래도 할 권한이 없다"며 절차뿐만 아니라 실질적인 내용까지도 사법적 판단의 대상으로 삼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한 것이다.

결집된 시민의 힘이 밑바탕

이스라엘판 재벌개혁 평가에서 결코 빠뜨려선 안 되는 것은, 이 모든 조치가 가능했던 배경엔 바로 시민들의 결집된 힘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시민들은 지난해 6월경부터 높은 주택 임대료 등 악화된 삶의 질에 반발하며 최대 도시 텔아비브 중심가에서 시위를 시작했다.

서민들뿐만 아니라 중산층까지 가세해 폭넓은 지지를 얻었고 전국에서 총 30만 명이 거리로 나섰다. 네타냐후 총리를 비롯한 이스라엘 내각은 시민들의 분노를 진정시키기 위해 재벌개혁을 결정하고 의회 승인절차에 돌입할 수밖에 없었다.

지난 8일 서울 광화문에서 재벌개혁 퍼포먼스를 하고 있는 경실련 회원./뉴시스

김병권 새로운사회를여는연구원 부원장은 이와 관련해 지난 5월 발표한 보고서에서 "이스라엘의 재벌개혁은 구조적으로 악화되는 불평등→경제위기로 인한 물가 부담과 소득 정체→독점재벌들의 독과점 가격과 정부의 취약한 공적 지출에 대한 분노→30만 명이 참여하는 저항과 재벌개혁 요구→재벌 해체에 준하는 개혁 방안 결정이라는 긴박한 과정을 밟아왔다고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우리 현실은 어떨까? 1997년 IMF 경제위기 이후 재벌개혁 화두가 끊임없이 제기되어 왔지만 별 진전이 없는 데는 무엇보다 시민들의 강력한 지지가 부재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정치권의 구체적이고 치밀한 전략과 공감대를 확산하려는 노력, 그리고 시민들의 성원이 결합했을 때 많은 국민이 원하는 재벌개혁은 성과를 거둘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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