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찍이 베르트하이머는, 인간의 눈이 '모든' 영상 자극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고 뇌가 이러한 감각 정보들을 일관된 이미지로 재구성한다는 가설을 구상함으로써 게슈탈트 심리학(형태심리학)의 기초를 제공했다.

'게슈탈트'란 형태나 모양을 의미하는 독일어로, 이 이론에 의하면 '인간의 지각은 자극 요소들 외에 별도의 통합·분리·분절·군집의 과정을 거친다'고 한다. 위대한 사상가들이 공통적으로 인간의 의식을 가장 큰 미스터리라고 생각했듯이 인간의 뇌 속에는 100조 개의 신경망이 함께 작용한다. 그래서인지 같은 이미지를 앞에 두고 전혀 다른 해석을 하기도 하는 것이다.

아마도 선거가 우리를 학습하게 하는 모양이다. 때로는 학습이 착각을 불러온다고 했던가! 요즘 대통령 후보를 희화화한 홍성담 화백의 그림이 화제다.

어쨌든 시대가 그늘질수록 풍자는 넘쳐난다. 풍자, 해학, 패러디, 비유, 은유를 통한 사회ㆍ문화ㆍ현실 질서에 대한 비판과 반항은 계속해서 존재해 왔다.

특히 간섭과 제한이 심화되고 서민들의 삶이 팍팍한 사회일수록 이러한 현상은 더욱 심화된다. 사실 이야기를 가진 문학적인 그림들은 현대미술에서 배제당했다. 현대미술은 미술에 붙은 이야기를 배제하고 오로지 미술 그 자체만을 다루려고 했기 때문이다.

문학은 미술에서 추방되었고 이제 미술은 미술 내적인 문제나 시각적인 것만을 대상으로 하면서 주제나 내용을 지워냈다. 미술은 오로지 눈으로 보는 그 상태, 그 자체만을 즉물적으로 확인시키는 다소 난해하고 건조한 것이 되었음도 부정하긴 어렵다.

그래도 한편에서는 미술에서 추방된 문학성, 이야기성을 여전히 그림 안으로 호출하는 경우를 자주 만난다. 풍자와 해학도 그런 예라고 볼 수 있다.

그림을 보면서 어떤 사연과 내용이 자꾸 연상된다는 얘기다. 특정한 사연을 도상화하고 있는 그림, 그림책처럼 그림 하나하나가 사연과 이야기를 열매처럼 매달고 있고 그 장면 하나로 인해 여러 상념과 사연을 부풀려낼 수 있다는 뜻이다.

   

근대 이전의 그림은 모두 문학적인 그림들이었다. 특정한 텍스트에 기반한 이야기 그림들이었다. 서구의 경우 그리스, 로마 신화나 성경에 나오는 일화가 그림의 내용들이었고 영웅담이나 전설들이 그림으로, 조각으로 형상화되었던 것이다. 우리의 경우 역시 신화나 불교 교리, 유교 경전의 내용이 이미지로 불려나왔었다.

그래도 그림은 그림이다. 대통령이나 대통령 후보나, 풍자ㆍ해학ㆍ패러디ㆍ비유ㆍ은유의 대상이 되는 나라, 그냥 그림을 그림으로 보아주는 시대가 오긴 오는 것인가? /황무현(조각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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