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나이 73세. 평생을 음악에 바쳐온 거장은 아직도 배가 고픈 모양이다. '한국 록의 대부' 신중현이 오는 12월 1일 서울 올림픽공원에서 단독 콘서트를 연다고 한다. 장황한 설명이 필요할까. 한 해외 음악평론가는 "21세기 최고의 밴드는 비틀스가 될 것"이라는 엉뚱한(?) 전망을 내놓은 바 있다. 그만큼 오래 사랑받고 많이 불리는 비틀스 음악의 시대를 초월한 영원성을 강조한 것일 테다. 신중현도 다르지 않다. '나는 가수다' 등 요즘 잘나가는 경연 프로그램에서 신중현은 가장 많은 선곡을 받는 뮤지션 중 한 명이다. 양희은, 박완규, 강산에, 한영애, 이은미 같은 당대 최고의 가수들이 신중현 곡으로 음반을 냈거나 무대에서 공연을 했다.

사실 그의 음악에 대단한 메시지가 있는 것은 아니다. '허구한 날 사랑타령'이라 해도 될 만큼, 이룰 수 없는 사랑에 대한 그리움, 외로움으로 가득 차 있다. 하지만 그것은 민요의 5음계 등을 활용한 '한국적 정서'를 담은 멜로디 전개와 어우러져 묘하게 사람들 마음을 흔들었다. "영원한 이곳에 그대와 손잡고 햇님을 보면서 다정히 살리라."(햇님) 그래, 우리가 잊고 살았던 것. 자유, 그리고 행복.

신중현은 후배들이 가장 리메이크를 많이 한 뮤지션으로 꼽힌다. 1969년작 '봄비'는 공식 앨범에 수록된 것만 13번이 넘는다. /뉴시스

지금은 박정희 독재정권 시대 억압과 반항의 한 상징이 됐지만, 그가 사랑과 자유를 노래한 동기는 지극히 개인적이었다. 150cm가 조금 넘는 작은 체구. 그는 "혼자서 누군가를 좋아하다가 실망하거나 퇴짜를 맞거나 그런 경험"을 자주 겪었다고 회고한 바 있다. 신중현뿐이었을까. 오직 '조국 근대화의 기수'로 복무하길 강요당한 동시대인들의 처지도 이와 공명했다. 무언가를 욕망하고 표현할 자유는 어디서도 허락받지 못했다.

1972년 어느 날, 신중현은 모처에서 걸려온 전화 한 통을 받는다. "그 분을 위한 찬가를 만들어라." 한창 전성기를 구가하던 이 젊은 뮤지션의 대답은 예의 단호했다. "나는 누군가를 찬양하기 위한 수단으로 음악을 하고 싶지 않습니다."

신중현의 음악 인생은 익히 알려진 대로 그 후 쭉 내리막길이었다. 대마초 사건으로 옥살이에 활동 자체가 금지됐고, 예술혼도 동시에 거세당했다. 1980년대 들어 활동을 재개했지만 사람들 가슴을 뒤흔드는 히트곡은 더 이상 나오지 않았다.

대통령선거 때문인가, 요즘 예술은 정치·사회적 메시지를 담지 않으면 이야깃거리도 안 되는 것 같다. 특정인의 삶을 연상케 하거나 미화 또는 적대하는 영화·그림 등이 넘쳐난다. 한 감독은 노골적으로 "대선에 영향을 미치길" 바라는 영화를 세상에 내놓기도 했다.

의미야 있을 것이다. 다만 예술로서 존중해야 하는지는 의문이다. 정치적 이슈를 다루거나 정의로운 목소리를 낸다고 예술적으로 또는 정치적으로 훌륭한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 선과 악의 이분법, 특정 메시지의 강요가 불편하다. 우리는 그저 '마땅히 공감하고 마땅히 한 편이 되어야 하는' 대상일 뿐이다. 그것은 예술보다는 선전 도구로 불리는 게 옳다. 아니면 장사 수단이거나.

신중현은 음악이 '무엇을 위한' 수단이기를 거부했다. 음악은 철학도 장사도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래서인지 그의 음악은 무언가를 맹렬히 가르치거나 '집단적으로' 동원하려는 어떤 예술들과는 거리가 멀다. 시대의 아픔, 권력 비판 다 좋다. 혹은 아니어도 상관없다. 수십~수백 년의 시간을 충분히 버텨낼 수 있는 예술을 갈망한다. "한번 보고 두번 보고 자꾸만 보고 싶은" '미인' 같은 창조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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