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와 함께 바람난 주말] (45) 대구 김광석 다시 그리기 길

한 해를 보내며 생각이 많아지는 건 오히려 이맘때다. 12월은 연말 분위기에 휩쓸려 오히려 들뜬 채 보내버리기 쉽다. 식상한 표현이지만 달력이 한 장 남고 보니 이런저런 생각에 마음이 심란하다.

결혼을 하고 엄마가 되면 적어도 계절 변화에 둔감해질 줄 알았다. 잔뜩 우울함을 머금은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가는 풍경에 덤덤해지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막상 이 계절을 맞고 보니 괜스레 울적하기도 하고 생각이 많아진다.

지금보다 더욱 격정적이던 20대, 그때를 견디게 했던 노래를 찾아 떠난 곳은 '김광석 다시 그리기 길'(대구광역시 중구 달구벌대로 450길, 내비게이션에서 방천시장을 검색해 찾아도 된다).

그를 만나러 간다는 생각에 괜스레 설렌다. 고 김광석(1964∼1996). 그의 노래가 입안에 맴돈다.

"또 하루 멀어져간다. 내 뿜은 담배연기처럼, 작기만 한 내 기억 속에 무얼 채워 살고 있는지. 점점 더 멀어져간다, 머물러 있는 청춘인 줄 알았는데 비어가는 내 가슴 속에 더 아무것도 찾을 수 없네…."(서른 즈음에)

지금 30대와 40대의 터널을 지나는 사람이라면 김광석의 음악에 자신의 삶을 투영해봤을 것이다. 김광석 노래를 형상화한 조형물이 설치된 골목에는 그의 모습을 그린 벽화도 곳곳에 있다. 350m 남짓 되는 이 길은 가을철 천천히 산책하기에 안성맞춤이다.

지금 30대와 40대의 터널을 지나는 사람 중에 그의 음악에 자신을 투영해 보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어딘가에 있을 사랑을 기다리며, 첫사랑을 떠나보내며, 이별 뒤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고 소주잔을 기울이며 그의 음악을 들었을 것이다.

청년은 입영통지서를 받고서, 그리고 그 청년이 서른이 되면서 그의 노래에서 인생을 배웠을 수도 있겠다.

대구시 중구 대봉동은 김광석이 태어난 곳이다. 그의 음악이 흐르고 그의 노랫말과 모습이 사진과 그림으로 남아 있는 '김광석 다시 그리기 길'은 방천시장 바로 옆에 자리하고 있다.

   

올 들어 가장 춥다는 뉴스를 듣고 떠난 길, 매서운 바람에 몸이 저절로 움츠러든다. 대봉동 신천대로 둑길 벽면에 조성된 '김광석 다시 그리기 길'은 350m에 이른다. 총 27명의 작가가 참여했고 평면·입체·조형 등 다양한 장르의 40여 작품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햇볕 한 줌이 아쉬운 둑길 아래 길은 더욱 을씨년스럽다.문화체육관광부는 지난 2008년부터 침체한 전통시장에 문화의 숨결을 불어 넣어 시장을 문화체험 공간이자 일상의 관광지로 활성화하기 위한 '문전성시-문화를 통한 전통시장 활성화 시범사업'을 추진했다. '김광석 다시 그리기 길'은 방천시장 문전성시 프로젝트의 하나로 지난 2010년 11월 20일 완성됐다.

"잊어야 한다는 마음으로 내 텅 빈 방문을 닫은 채로, 아직도 남아 있는 내 텅 빈 방안에 가득한데…. 하얗게 밝아온 유리창에 썼다 지운다 널 사랑해." 마침 '잊어야 한다는 마음으로'가 휑한 거리에 울려 퍼진다. 가을의 끝자락은 언제나 그렇듯 스산하다.

그는 여전히 사람 좋은 환한 웃음으로 우리를 맞이한다. 알고 있을까? 아직도 그의 미소를 그리워하고 노래에 위로를 받는 사람이 많다는 걸.

노래를 곱씹으며 발걸음을 옮긴다. 노래를 형상화한 갖가지 조형물에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두 바퀴로 가는 자동차도 있고, 포장마차 주인이 되어 눈이 반달이 될 때까지 웃는 모습으로 따뜻한 국물을 건네는 곳에선 그와 잠시 마주 앉았다.

'시민참여코너-이등병의 편지'에는 누군가의 소원을 담은 자물쇠들이 펜스에 매달려 있고, 바다를 한없이 바라보는 그의 뒷모습에 쓸쓸함을 투영해본다. 흐린 가을 하늘이 그려진 벽화에 튀어나온 나무 우체통을 보니 누군가에게 편지를 써야 할 것 같고, 빨간 공중전화를 보니 누군가가 그리워진다.

   

걷다가 잠시 쉬고 싶다면 골목 중간쯤 위치한 속닥속닥 수다방을 찾으면 된다. 자동판매기에서 200원짜리 커피 한잔을 뽑아 눈치 볼 것 없이 마음껏 쉴 수 있는 공간이다.

오롯이 '김광석 다시 그리기 길'만 보러 왔다가는 아쉬움이 남을 듯하다. 설렁설렁 걸어도 30분이면 충분할 거리다. 어디나 그렇듯 벽화골목이 자리한 곳은 가난의 냄새를 많이 풍기고 있다. 어쩌면 산업화의 뒷길에 밀려난 그 쓸쓸함을 벽화라는 낭만과 감성으로 치장하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가을의 끝자락에서 청춘을 노래했던 김광석, 그의 노래와 그의 미소가 그립다면 한 번쯤 찾을 만하다.

   

◇인근 먹을거리 = 김광석 다시 그리기 길과 마주한 방천시장에선 김광석을 모티브로 한 식당들이 눈에 띈다. '김광석 전용 특별열차' 식당으로 들어가 추위를 피하기로 했다. 준비되지 않은 채 갑작스레 찾아온 추위는 정신이 번쩍들 정도로 새삼스럽다.

메뉴 앞에 김광석의 노래들이 하나씩 붙어 있다. '일어나' 보리밥을 시켰다. 가격은 3500원. '서른 즈음에' 막걸리는 2000원. 부담없는 가격이다.

인심도 후하다. 보리밥에 갖가지 나물과 반찬들, 그리고 시골 된장국 등 먹고 싶은 만큼 덜어 먹으면 된다. 셀프다. 밥을 한 그릇 비우고 나면 주인은 뜨끈한 누룽지를 양철 주전자에 담아 내놓는다. 보리밥을 후딱 비우고 누룽지가 든 사발을 두 손으로 움켜쥐고 그의 노래를 들으며 홀짝대니 마음이 따뜻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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