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동·오동동 이야기] '홍화집'과 전설의 연극배우 장민호 선생

한때 마산 예인(藝人)들이 즐겨 찾은 선술집이 '고모령'이었음은 자타가 인정하는 사실이다. 그만큼 '고모령'이 마산의 명소(名所)였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 '고모령'은 1998년 서성동 '고모령'을 끝으로 종언(終焉)을 고하고 만다. '고모령'이 없어지자 필자는 '고모령'에 버금가는 또 다른 선술집을 찾아 헤매다가 드디어 마산 남성동 골목에 위치한 '홍화집'을 발견하게 된다. '홍화집'은 '고모령'보다는 한 단계 높은(?) 통술집이었고 이때부터 '홍화집'과 필자의 인연이 시작되는 것이다.

처음엔 '홍화집'이란 옥호(屋號)가 무척 낭만적이었다. 어느 날 여주인에게 옥호의 내력을 캐묻게 된다. 그녀는 주량에 있어서는 내공이 깊었고 인품도 '고모령'의 문자은 여사와 용호상박이었다.

"우째 홍화집이란 옥호가 좀 섹시합니다. 무슨 사연이 있지예?", "아유 사연은 무슨 사연. 그냥 하다보니까….", "술을 좀 하십니까. 잔을 권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몰라서….", "주면 마시고 안주면 안마시는거지요…."

연극배우 권성덕 선생(사진 왼쪽 서 있는 사람)이 홍화집에서 노래를 부르는 장면. /라상호

과연 고수다웠다. 사족(蛇足)을 달지 않은 선문답이 그걸 입증한다. 우연하게 시작한 대작(對酌)의 시간이 제법 흘렀다. 그녀는 대구 출신이라 했고 30대 무렵 마산으로 왔다고 했다. 처음에는 남성동 슈바빙 레스토랑 부근에서 '홍화집'이란 옥호를 내걸고 10여 년간 장사를 했고, 그 다음에는 현재의 위치로 옮겨 지금까지 대략 25년쯤 하고 있단다. 아마도 한창 때 그녀의 미모는 굉장했을 것이다. 오랜 세월이 지난 오늘날의 모습도 보통 아니기 때문이다.

필자가 '홍화집'을 거론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바로 지난 2일 새벽에 타계하신 원로 연극배우 장민호 선생 때문이다.

한국 연극계의 산 증인이자 전설로 존경받던 선생이 향년 88세로 타계하셨다는 연락을 받고 필자는 깜작 놀랐다. 갑작스런 비보(悲報)였기 때문이고 선생과 필자는 깊은 인연이 있기 때문이다.

이북 황해도 신천 출신인 선생은 1946년 서울에 와 조선배우학교에 입학하면서 연극을 시작한 후 작년 3월 국립극단에서 공연한 <3월의 눈>이란 연극에 이르기까지 평생 동안 200여 편이 넘는 작품에 출연하셨다. 리얼리즘 연극의 최고봉으로 꼽히는 선생은 특히, 괴테 <파우스트>에서 '파우스트 역'을 네 번이나 맡았을 정도로 파우스트 역을 깊이 있게 한 배우로 소문나 있다.

지난 2일 타계한 고 장민호 선생 영정 앞에 그를 추모하는 한 남자가 서 있다. /뉴시스

필자는 선생을 '홍화집'에 여러번 모신 적이 있고, 그때마다 선생은 '홍화집' 분위기를 좋아하셨다. 2007년 여름에 개최된 이아타 세계연극제때와 2008년 마산국제연극제 창립 20주년 행사때 필자가 선생과 밤늦도록 통음(痛飮)한 곳도 바로 '홍화집'이다. 당시 필자는 연극제 대회장이었던 선생과 원로연극배우 백성희·권성덕, 희곡작가 노경식, 연극배우 최종원·강태기 등 한국 연극사에 내로라하는 연극인들을 '홍화집'에 모셨다. 필자도 주량이 적은 편은 아니나 장민호 선생을 따라갈 수가 없었다. 당시 선생의 연세는 팔순이 훨씬 넘었음이다.

2008년 여름, '홍화집'에서 주석(酒席) 분위기가 무르익어갈 무렵 장민호 선생께서 필자의 손을 꽉 잡으신다.

"이 회장 능력이 대단해. 서울 사는 우리를 마산까지 집합시키고 말이야.", "과분한 말씀입니다. 선생님.", "이런 분위기에서 술을 안 마시는 사람은 연극할 자격이 없지. 안 그래? 다들 건배하자고."

선생의 권유로 좌중의 주당들은 모두 잔을 높이 든다. '홍화집' 여주인까지 동참한다. 건배를 외치는 고함소리가 주점 안을 휘감는다. 잠시 후 술잔을 기울이던 권성덕 선생이 느닷없이 노래를 한 곡조 뽑으신다. '빈대떡 신사'라는 노래였다. 순간 좌중의 분위기는 절정에 달한다. 대 스타가 노래를 부를 줄은 아무도 생각 못했던 것이다. 그만큼 그날 분위기가 좋았다는 말이다. 왜 아니랴. 서울에서도 장민호·백성희·권성덕·노경식 등 한국을 대표하는 연극인을 한자리에 모시기가 어려운데 하물며 마산에서, 그것도 허름한 통술집 '홍화집'에 이분들이 떡하니 좌정하고 있음이니….

여주인 최경주 여사도 신이 났는지 서비스라면서 계속 맥주를 내놓는다. 그리고 장민호 선생과 대작도 한다. 가히 진풍경이다. 한국 최고의 배우와 대작을 하는 간 큰 주모(酒母)는 별로 없기 때문이다. 술을 못 마시는 사진작가 라상호 형은 연신 카메라 셔터를 눌러댄다. 자리를 함께 한 대 스타들의 인간적인 면모를 기록으로 남기고 싶은 욕심에서이리라.

그런데 며칠 전 장민호 선생의 빈소에 문상을 갔을 때 선생의 영정사진을 보고 필자는 깜짝 놀랐다. 영정사진은 2008년 마산국제연극제 때 사진작가 라상호 형이 찍은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문상을 마치고 상주(喪主)에게 선생의 영정사진은 마산 홍화집에서 찍은 것이라고 했더니, 따님이 "아버님께서 저 사진을 평소에도 좋아하셨고 영정사진으로 쓰라"는 유언까지 하셨다고 했다. 한국 연극계의 전설 장민호 선생은 가셨지만 '홍화집'만은 영원히 마산을 지켜주길 바라는 마음이 간절해짐은 어쩐 일일까.

/이상용(극단 마산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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