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새누리당 대선 후보의 여성 대통령론에 대한 범진보진영의 시각은 크게 두 방향으로 나뉘는 것 같다. 하나는 그야말로 남성중심주의적이고 보수적인 대응이다. "박근혜는 출산과 보육, 장바구니 물가를 고민하는 삶을 살지 않았다. 그에게 '여성성'은 없다"는 '대한민국 남자' 문재인 민주당 후보 측의 논평이 대표적이다.

예의 진보진영 내부로부터 세찬 뭇매를 맞았다. "여성의 역할을 가정주부, 어머니에 국한하는 퇴행적 인식"(프레시안)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다고 박근혜가 여성을 대표한다거나, 사회적 약자·억압받는 주체로서 '여성성'이 있다는 옹호론은 없다. 당연하다. 특권과 권위주의의 상징이자, 여성의 삶과 권리를 위해 대차게 싸워본 적도 없는 박근혜가 여성을 입에 올릴 자격이 있을까.

급식 조리원 등으로 구성된 학교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지난 9일 전국 총파업을 벌였다. 대부분 여성인 이들의 요구는 정규직화와 호봉제 도입이다. /뉴시스

다른 하나는 "박근혜가 무슨 여성인가"라는 보다 근본적인 정체성 공격이다. "'여성성'이 없다"를 넘어, 실제 이 같은 주장이 나오고 있다. 앞서 민주당의 논평에도 이런 관점의 표현이 있으며, 좀 더 단정적인 시각으로는 지난 9월 말 〈경향신문〉에 실린 여성학자 정희진의 '공주는 여성인가'라는 칼럼이 있었다.

메시지는 공감할 만하다. '권능한 아버지의 딸', 박근혜의 정체성은 공주일 뿐 여성도 시민도 아니라는 것이다. 다만 어렵다. 그럼 공주는 여성일 수 없는가? 물론 여기서 '여성'은 생물학적 여성이 아니라 흔히 '젠더'(gender)라고 하는 사회·문화적 성별 구분에 근거한다. 하지만 생물학적 여성과 젠더로서 여성을 명확하게 구분·인식하며 일상을 사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더 걸리는 건 '여성이냐 아니냐'는 이분법적인 문제제기 방식이다. 그럼 어디까지가 여성이고, 어디까지가 여성이 아닐까. 페미니즘 이론 영역에선 익숙할지 몰라도 일반인들에겐 무척이나 낯설고 심지어 폭력적인 물음이 될 수 있다. 정치선동 구호라면 모를까, 소통의 자세도 아니다. 당신은 진짜 여성인지 '감별'해주겠다는 사람과 대화를 나누고 싶은가?

이런 식의 구분 짓기, 낙인찍기는 지난 4월 총선 때 새누리당에 다수당을 안겼던 지역민들을 향한 비판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당시 일부 진보 지식인들은 (같은 국민도 아닌) '새누리당 노예'이니 '속물'이니 극언을 서슴지 않았다. 그저 잘 살고 싶은 욕망을 표현했을 뿐인 사람들에 대한 이 같은 언사는, 그들이 단지 '새누리당 지지자'라는 정체성으로만 살아가지 않는다는 중요한 진실을 은폐한다.

초점은 젠더 감별이 아니라 '아직 여성이 아닌' 여성들에게 어떻게 다가가 어떻게 말을 걸지가 되어야 한다. 남편의 폭력에 고통 받으면서도 만날 남성·보수 정치인에 투표하는 가정주부가 있을 수 있다. 재벌 회장님을 존경하고 동료를 하찮게 여기는 비정규직 여성 노동자도 있을 수 있다. 이들의 행태가, 굴절된 정체성이 못마땅하다고 '속물'이라며 외면할 것인가?

흔쾌하긴 어렵지만 박근혜 역시 마찬가지일 수 있다. 여성 대통령론은 여성의 권리를 고민하는 사람들이 '타고 넘어가야 할' 이슈이지, "여성도 아닌 게!"라며 단박에 냉소하고 배제할 것이 아니다. 오히려 날로 심각해지는 여성 비정규직 문제 등에 대한 근본 대책을 강하게 밀어붙일 기회이다.

박근혜가 진정 여성 후보라면 진지하게 응답할 것이고, 우물쭈물하면 '말로만' 여성이라는 허구적 실체가 만천하에 드러날 것이다. 그 어느 쪽도 이 땅의 여성들에게 나쁠 것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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