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 연세에 힘겨웠을 남해바래길, 그처럼 아름다운 풍경도 또 없을 길

남해 바래길은 경상남도 남해인들이 척박한 자연환경을 극복하며 가족의 생계를 위해 갯벌이나 갯바위 등에서 해초류와 해산물을 담아왔던 남해토속말 '바래'에서 따온 남해인들의 애잔한 삶을 체험할 수 있는 길이다.

바람 세차게 불어오는 날, 비 온다는 일기예보에 자형은 누나더러 가지말라고 당부했지만 누나는 나와 어머니와 함께 이 남해 바래길을 11월10일 걸었다.

남해 바래길 2코스인 앵강 다숲길을 걸었는데 실제는 중간인 두곡월포 해수욕장에서 시작해 가천다랭이마을까지였다.

'함께 걸어요! 남해바래길'이란 주제로 남해바래길 센터에서 주최한 제2회 남해바래길 걷기 가을소풍에 다녀왔다. 카메라를 가방 속에 넣고 왔지만 걷는 내내 꺼내지 못했다. 그저 어머니께서 준비한 뜨거운 물에 믹스커피를 숙호숲에서 타서 마셨다. 사진은 코스대로 걸은 것이 아니라 최종 도착지였던 가천다랭이마을에서 찍은 사진을 배치한 것이다. 도착하고서야 카메라를 끄집어내어 찍은 까닭은 바람이 세차게 불어 귀찮았다. 어머니와 누나랑 걷는 길에 카메라 찍는다고 주위 풍경과 이야기에 쏘옥 빠져 있을지 몰랐기 때문이다.

바래길 오르막에서 어머니가 힘겨워 하신다. 손을 내밀어 끄는데 어머니는 "오늘 길은 내가 두 번 가기는 어렵겠다" 하신다.

두곡해수욕장에서 시작한 길은 나름 평탄했다. 바다를 길동무로 삼아 왼편에 세우고 걸어가는 기분은 바람이 세차게 불어도 견딜 수 있었다. 일부 구간은 태풍 '산바'의 영향으로 유실되어 돌아가기도 했다. 해안도로와 농로는 농어촌과 농어업인들의 생활터전인 삶 속에 있어 시멘트 포장길이라 걷는 게 다소 불편했다. 하지만 어쩌랴, 그분들 삶의 현장에 우리가 불쑥 끼어들었으니.

홍현해우라지마을을 지나 가천다랭이마을까지 3.5㎞는 흙길이었다. 흙길이라 반가웠지만 길은 해안절벽을 가까이 한 까닭에 왼편의 바다를 길동무 삼아 걷기에는 바다에 안길까 못내 조심조심 걸었다. 초등학교 다니는 아이들을 데리고 오지 않아 오히려 잘 했다는 생각이었다. 70대의 어머니는 그저 경남 진주의 남강변을 거니는 길인 양 여겼다고 했다. 그러니 얼마나 이 벼랑길이 무섭고 힘들었을까….

다랭이 지게길을 따라 거닐다보면 해안절벽위에 정자가 세워져 있다. 광활한 바다를 한눈에 담을 수 있는 전망대다.

3시간여 걸어 드디어 가천다랭이 마을에 도착했다.

가천 다랭이 마을은 해안절벽을 끼고 있어 배 한 척도 없다. 가파른 해안절벽에 둘러싸인 마을은 배를 댈 수 있는 선착장도 만들 수 없어 가파른 땅을 한 층 한 층 돌로 축 쌓아 다랭이 논을 만들었다고 한다. 3월부터 10월까지 농사철이면 각종 농사체험도 할 수 있다고 하는데 우리가 찾은 11월에는 온통 남해의 명산품 마늘이 심어져 푸른 바다에 푸른 빛을 발하고 있었다.

바다 쪽으로 내려가다 보면 민망해서 고개를 돌리다가도 다시금 돌아보게 하는 게 있다. 경남 민속자료 13호인 남해 가천 암수 바위가 그 주인공이다. 이 암수 바위를 여기 사람들은 미륵불이라고 부른다. 속미륵은 남성의 성기를 닮았고 암미륵은 임신하여 만삭이 된 여성이 비스듬히 누워 있는 모습과 비슷하다고 한다.

다랭이논.

1751년(영조27년) 남해 현령 조광진의 꿈에 한 노인이 나타나 "내가 가천에 묻혀 있는데, 그 위로 우마(牛馬)가 다녀 몸이 불편하니 꺼내어 세워주면 필히 좋은 일이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후 현령은 이 암수바위를 꺼내어 미륵불로 봉안하였다. 또 논 다섯 마지기를 이 바위에 바치고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어민들은 지금도 이 바위를 발견한 날인 음력 10월23일을 기해 이곳에서 제사를 지내면서 뱃길의 안전과 많은 고기가 잡히기를 빌고 있다. 이 바위는 원래 풍요와 다산을 기원하던 선돌이었다. 그러나 세월의 흐름에 따라 그 기능이 바다와 마을의 수호신으로 확대되어 미륵불로까지 격상된 것 같다. 그럼에도 본래 지녔던 풍요와 다산의 기능은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이곳은 오늘날에도 아들을 갖게 해달라고 기원하는 장소로 남아 있다.

다랭이 지게길. 이곳부터는 옛날 다랭이 마을의 조상들이 지게를 지고 땔감과 곡식을 나르던 길을 복원하여, 다랭이마을의 숨은 비경은 감상할 수 있는 곳이다.

다랭이 지게길을 따라 거닐다 보면 해안절벽 위에 세워진 정자에서 앵강만을 구경할 수 있다. 남해 바래길센터에서 발행한 안내 책자에는 지중해와 뉴질랜드의 오클랜드 정취를 느끼게 하는 조용한 호수 같은 앵강만을 구경할 수 있다고 적혀 있다.

아름다운 해안 절벽이 보기에는 아름답지만 걸어오는 바래길은 위험하다. 왼편의 낭떠러지는 '추락조심'이라는 경고판이 곳곳에 세워져 있다. 안전펜스 등이 있지만 좀 더 보강했으면 하는 바람이 들었다. 쉬어갈 벤치도 중간중간 더 있었으면 했다.

가천 다랭이 마을은 바람이 불어오는 마을이었다. 바람이 세차게 불어 몸무게 육중하게 나가는 나 자신이 이날따라 고마웠다.

해안가의 아름다운 풍경에는 다들 힘겹게 왔다는 고생을 잊어버리게 했다. 이런 절경이 바래길에 숨어 있었구나 싶었다. 지리산둘레길은 이 바래길에 비하면 순하고 평탄한 길이다.

어머니 손을 잡고 바닷가에서 가천다랭이마을 해안도로까지 올라오는 누나도 힘겨운 하루였다. 집에 돌아와 가족 모두를 불러 감자탕으로 저녁을 먹었다. 어머니께서는 동생이 따라준 소주를 쭈욱 단숨에 들이켜시며 "참 달다"고 하셨다.

"오늘 길은 내가 두 번 가기는 어렵겠다"며 다음에는 가지 않으시려는 어머니. 하지만 "아름다운 풍경은 잊지 못하실 거"라고 하셨다.

/해찬솔(해찬솔 일기·http://blog.daum.net/haechansol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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