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한쪽 한글·영어·숫자로 표기, 작가 가치관·취향·성격 등 드러나

미술 작품을 감상할 때 생긴 버릇이 있습니다. 대개 그림의 한쪽 모퉁이에는 작가의 '서명(署名)'이 있는데, 그것을 늘 눈여겨봅니다. 오른쪽이나 왼쪽 아래에, 한글이나 영어로 써진 서명을 보면 화가의 성격, 취향 등을 어느 정도 유추할 수 있는데, 퍽 흥미롭습니다.

서명은 작품에 없어서는 안 될 매우 중요한 요소입니다. 단순히 '내 것'이라는 증표를 넘어 조형미를 완성할 수도 못할 수도 있고, 그림을 죽이기도 살리기도 하는 등 화룡점정을 담당합니다. 뜯어보면 뜯어볼수록 재미있는 서명의 세계로 함께 떠나볼까요?

서명은 언제부터 그림에 등장하게 된 걸까요? 자화상을 회화의 한 영역으로 끌어들인 알브레히트 뒤러(1471~1528). 그가 스물아홉에 그린 '모피코트를 입은 자화상'을 보면, 왼쪽에 알파벳 'A'와 'D'가 결합한 마크가 보입니다. 바로 그의 이름 머리글자를 딴 서명입니다.

   

중세에는 화가들이 자신의 작품에 서명하는 일이 극히 드물었지만, 르네상스 시대에는 서명 또는 자신의 얼굴을 작품에 그려 넣었다고 합니다. 이유는 이렇습니다. 중세 때 화가의 지위는 보잘것 없었습니다. 석공이나 구두 만드는 사람 등과 같은 수공업자 취급을 받았죠.

하지만 르네상스에 접어들면서 화가는 화공(畵工)이길 거부하며 작품에 독창성을 불어 넣었습니다. 무엇보다 뒤러는 화가로서 자존심이 남달랐고, 그것을 '자화상'과 '서명'으로 표현했지요.

최근 이중섭(1916~1956)의 아내 이남덕(일본명 야마모토 마사코) 여사가 15년 만에 제주도 서귀포시에 왔습니다. 그는 일본 동경문화학원 재학 시절 서양화과 선배인 이중섭과 사랑에 빠져 결혼을 했는데요. 이중섭미술관 1층 전시실에는 남편을 애타게 그리는 그의 편지가 걸려 있기도 합니다. 이중섭은 '소'와 '불상' 등 민족적 의식이 강한 작품을 만들었는데, 서명에도 그의 가치관과 취향을 솔직히 드러냈습니다.

   

그의 서명은 바로 중섭을 한글로 풀어낸 'ㅈㅜㅇㅅㅓㅂ'입니다. 이중섭의 작품 이야기를 할 때면 여러 일화가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데 '일본 식민지시대에도 한글로만 서명했다'는 것도 그 중 하나입니다.

한글 서명은 박수근도 했습니다. 작품에다가 단정하게 한글로 '수근'이라고 쓰는 낙관 방식이 그의 성격을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나는 인간의 선함과 진실함을 그려야 한다는, 예술에 대한 대단히 평범한 견해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내가 그리는 인간상은 단순하다."

그의 작품은 물론이거니와 서명도 단순하고 압축된 형식을 띠지 않나요? 작지만 소박한 박수근의 서명은 작품에서 조형미를 완성하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 같습니다.

영어나 한자를 서명으로 즐겨 쓰는 화가도 있습니다. 분단과 전쟁의 시절, 정반대로 해맑은 동심과 해학을 끄집어냈던 장욱진(1917~1990)은 영어로 'UCCHIN CHANG' 혹은 '旭(욱)'이라는 한자를 쓰기도 했지요. 그는 작품의 균형과 대칭을 중요시해, 서명 또한 아무 데나 하지 않은 걸로 유명합니다.

지난해 미국 뉴욕 구겐하임 전관에서 개인전 '무한의 제시'를 열었던 이우환(1936~). 그는 한국에서 가장 비싼 작품가로 유명한데요. 점, 선, 여백으로 이뤄진 단색조의 작품처럼 그의 서명도 그리지 않은 듯한 모양을 띱니다. 그의 영어 이름은 'Lee Ufan'인데 눈을 크게 뜨고 보면 작품 맨 귀퉁이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꽃과 여인'을 즐겨 그린 천경자(1924~)는 1991년 '미인도' 위작 사건에 휘말리게 되는데요. 이 작품을 소장하고 있던 국립현대미술관과 화랑협회는 진품이라고 했지만 작가는 자신의 작품이 아니라고 해서 큰 논란이 일었습니다.

   

그는 당시 "작품 사인과 연도 표시도 내 것이 아닙니다. 난 작품 연도를 한자로 적는데, 이 그림에는 아라비아 숫자로 적혀 있어요"라고 말했습니다. 실제로 그의 작품을 보면 한자를 즐겨 쓰는 걸 알 수 있습니다.

동양화가 서양화와 다른 점이 있다면 화가의 도장이 있다는 건데요. 조선시대 좀 더 도안적인 서명이 등장하기 시작한 건 18세기 화가 변상벽의 '묘작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화재(和齋) 변상벽이 그리다'라는 서명이 화면의 오른쪽 위에 적혀 있는데, 그림이랑 퍽 잘 어울립니다.

김해성 부산대 교수는 "동양화는 그림에 글이 있고 반드시 그린 이의 도장이 있다. 제관(題

   

款)이라고 불리는 이것은 그림의 주제나 내용을 설명하는 글로서 그린 사람이 직접 쓰기도 하고, 그림을 본 사람이 그 감흥을 다시 화면 위에 적어 넣기도 한다. 동양화가들은 그림도 잘 그려야 함은 물론, 글씨와 그 내용 또한 잘 읊어야 하는 이중적 부담이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서명은 화가의 '브랜드'입니다. 그림의 가치를 평가하는 데 빠지지 않는 한 요소임에 분명하죠. '서명을 보면 화가가 보인다'라는 말도 있는 만큼 미술 작품을 감상할 때 서명도 꼭 함께 보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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