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사정부와 부적절한 동거 '원죄'

지난 달 경남펜클럽 회장인 강희근(58) 시인이 문학의 자율성과 창조성을 키우려면 한국문인협회(일명 문협)를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해 주목을 받은 적이 있다.(본보 11월 19일 1면 참조).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문협이 회원단체로 포함된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일명 예총)에 대한 해체론의 역사는 1970년대 후반까지 거슬러 올라간다는 사실이다.
1970년대말부터 여러 경로를 통해 간간이 제기되던 예총해체론은 1980년 4월 18일 당시 한국문화예술진흥원장으로 있던 송지영씨의 대구 발언을 계기로 급물살을 타게 된다. 송원장은 대구지역 문화예술계 인사들과 사석에서 이야기를 나누며 예총해체론을 피력했던 모양인데, 그 내용이 4월 21일자 매일신문(대구지역일간지)에서부터 시작해 4월 28일자, 5월 2일자 동아일보, 5월 7일자 경향신문, 5월 11일자 독서신문 등 일간지와 신동아 7월호, 월간조선 8월호 등에 잇따라 취급되면서 예총의 존폐여부가 문화예술계는 물론 언론계의 주요 관심사로 부상했던 것이다.
당시 송원장이 언급했던 예총해체론의 주된 내용은 “예산은 갖다 쓰면서 하는 일은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송원장을 정점으로 폭발됐던 예총해체론은 단순히 ‘예산’과 ‘일’에 관한 것만은 아니었다. 예산과 일은 결과를 가리킬 뿐 예총해체론의 뿌리는 오히려 예총의 태생적인 결함에 닿아 있었다.
예총의 전신은 1948년 대한민국 정부수립과 함께 만들어진 전국문화예술단체총연합회, 줄여서 ‘문총’이다. 이 단체는 해방이후 좌익계열 문화단체에 대응하기 위해 소위 민족진영이 결성했던 ‘전국문필가협회’ ‘한국청년문학가협회’등이 통합된 조직이었다. 말하자면 좌익의 조직에 대응하기 위한 우익의 조직이었던 셈이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 ‘대결의 정점’이었던 6.25 전쟁이 끝난 뒤로 문총은 그 형태를 유지하고는 있었지만, 문총과 이해를 달리하는 여러 종류의 문화예술단체들이 문학 장르를 중심으로 속속 나타나게 된다. 김동리를 중심으로 한 ‘한국문학가협회’, 김광섭을 중심으로 한 ‘자유문학가협회’, 50년대에 등장한 문인들을 중심으로 한 ‘전후문학가협회’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당시는 이들 단체간에도 교류가 적지 않았다. 다른 단체에 속한 문인들에게 자파의 문예지를 개방하는 데 인색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1961년 5.16 군사쿠데타를 기점으로 상황은 완전히 바뀐다. 그때까지 존재하던 모든 문화단체는 군사정권 하에서 ‘자진해산’이라는 형식으로 강제 해체됐고, 6개월여 지난 12월 5일 공보부와 문교부 주선으로 문화예술인 30여 명이 모여 예술인간의 친목도모와 권익옹호를 목적으로 하는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 결성을 의결하면서 건축.국악.무용.문학.미술.사진.연극.연예.영화.음악 등 10개 협회가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이들 협회가 1962년 1월 5일 ‘국회의사당’에 모여 창립총회를 마치고 유치진을 초대회장으로 선출함으로써 예총의 역사는 시작됐다.
일련의 진행과정을 봐서 알 수 있듯이 정통성이 아쉬웠던 당시의 군사정부는 가장 제멋대로인 예술인들을 통제함으로써 정권 선전에 동원하고 싶었을 것이다. 이후 정부의 문화예술지원은 “예술계를 대표한다”는 구실로 거의 전적으로 예총에 집중됐고, 예총 또한 정부의 거국적인 행사에 앞장서서 참가해 춤과 노래로 봉사함으로써 그 은혜에 보답했다. 이와 같은 예술과 권력의 부적절한 동거가 예총해체론의 단초를 제공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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