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영로 옛 길을 되살린다] (31)경기도 용인 백암리~김령역

오늘은 순대가 맛있는 백암리를 출발, 근곡사거리에서 서쪽으로 용인을 향해 걷습니다. 근곡리 앞 청미천(옛 이름은 대천(大川)) 물녘의 갈대며 억새는 하얗게 센 머리를 풀고 겨울 맞을 채비를 하고 있습니다. 물가의 제법 너른 들은 벌써 가을걷이를 마쳤고, 곱게 단풍든 가로수 아래로 배추를 싣고 집으로 향하는 경운기 행렬조차 목가적 풍경으로 와 닿습니다.

좌찬역 옛터 가는 길

태평촌(太平村)을 지나 가좌리의 맞은바라기로 보이는 들에는 이름이 미륵뜰(미륵평: 彌勒坪)이나 내력은 알 수 없습니다. 북쪽으로 길을 잡아 행군이로도 불리는 토성이 있는 행군리(行軍里) 들머리 원삼사거리에 이르면 멀리 좌찬고개가 보입니다.

좌찬고개 가는 길./최헌섭

곧바로 고개 아래의 좌찬역(佐贊驛)이 있던 좌항리 좌전마을에 드니, 겨우 백암에서 10리를 걸은 셈입니다.

좌찬역은 <고려사> 참역 경주도(慶州道)에 딸린 15역 가운데 하나로 죽주의 좌찬(佐贊)으로 나옵니다. <신증동국여지승람>과 <여지도서> 죽산현 역원에는 '고을 북쪽 50리에 있다'고 나옵니다. 이 도로는 수도 한양과 삼남을 오가는 큰길이어서 <여지도서> 죽산현 도로에는 좌찬역을 잇는 길이 좌찬역대로(佐贊驛大路)라 했습니다.

동쪽 태봉산 옆 건지산은 봉수가 있어 이곳에서는 봉화몽오리라 부릅니다. <세종실록> 지리지 죽산현에 '봉화가 1곳이니, 현의 북쪽 건지산(巾之山)이다. 일명 검단산(劒斷山)이라 한다. 동쪽으로 충주 망이성(望伊城)에, 서쪽으로 용인 석성(石城)에 응한다'고 나옵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죽산현 봉수에는 '건지산봉수는 동쪽으로 충청도 충주 망이산(望夷山)에 응하고, 서쪽은 넉인현 보개산(寶蓋山)에 응한다'고 나옵니다. 마을을 둘러보고 좌찬역 옛터를 나서서 194.7m 높이의 낮지 않은 좌찬고개를 넘어 양지로 향합니다.

좌찬고개

양지와 용인의 경계에 있는 지경(地境) 고개인데, 고갯마루 아래쪽에는 짐승을 닮은 듯한 큰 바위가 팽나무 군락에 싸여 있어 옛적 길손들의 이정표 구실을 했을 성 다습니다. 이곳을 지나 고갯마루에 올라서면 즐비하니 늘어선 음식점들이 길손의 발길을 잡습니다.

좌천고개 가는 길에서 만난 큰 바위. 팽나무 군락에 싸여 이정표 역할을 하고 있다./최헌섭

옛 지지에 이 고개는 관애로 분류되어 있어 교통·군사상 요충으로 인식됐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여지도서> 죽산현 관애에 '좌찬현은 고을 북쪽 50리에 있다'고 했음이 예증입니다. 좌찬고개의 지명 유래와 관련, 1차 왕자의 난에 따른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고 비방을 일삼은 박포(朴苞: ?~1400)가 이곳에서 귀양살이한 이야기가 전해 옵니다. 좌찬성 벼슬을 지낸 그가 이곳 좌항리에서 귀양을 산 데서 좌찬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고려시대에 이미 좌찬역이 있었으니, 공교롭게도 이름이 같은 그의 벼슬이 겹치면서 빚어진 가탁(假託)임을 알 수 있습니다.

양지가는 길

좌찬고개에서 예전 세곡 보관 창고가 있던 도창마을을 지나 낮은 용구리고개를 넘습니다. 고개를 넘어 양지로 가는 중간 지점인 새말에는 김상익 효자비가 있어 이리로 옛길이 지났음을 일러줍니다.

새말에서 좌찬역을 지나 양지를 들르는 에둠길과 용인으로 향하는 지름길이 갈리는데, 무슨 까닭인지 옛길은 질러가는 길을 따르지 않습니다.

역도 개설의 목적이 왕명 전달에 두어졌기 때문일 것입니다. <대동여지도> 14-4에는 새말에서 추계(秋溪)를 건너 옛 양지현으로 드는 길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추계라 했으니 양지의 남쪽 내인 갈(가을)내를 그리 적은 것으로 보입니다.

지금도 양지 동북쪽에는 옛 추계향(秋溪鄕)이 있던 추계리가 있습니다. 옛 현의 중심지는 지금 양지면 소재지가 됐고, 면사무소에는 양지현감 김덕붕의 선정비(1576년 건립) 등 빗돌 8기가 옮겨져 있습니다. 한가운데에는 마을 입구를 표시하던 비석이 있었다는 이문(里門)터가 있었다지만, 지금은 자취를 살피기 어렵습니다.

근곡사거리에서 태평촌 가는 길. 붉게 물든 가로수 아래 배추를 가득 싣고 가는 경운기가 가을의 풍경을 더한다. /최헌섭

용인가는 길

양지를 지나 월곡에서 재넘이고개를 넘어 송동 신평으로 이르는 길 남쪽의 송문리 정문(旌門)마을은 조선 후기 효자 송지렴의 정려문에서 비롯한 이름입니다. 송동을 지나 신평에 들면, '살아 진천 죽어 용인'이라 했던 용인 언저리입니다.

조선 태종 13년(1413), 용구(龍駒)와 처인(處仁)의 앞뒤 글자를 따 용인이라 했으니 내년이면 600년이 되는 이름입니다.

조선시대 용인은 지금의 기흥구청 일원이 중심지였고 지금 김량장동 일원은 상업·교통의 중심지였습니다. 운학천과 양지천이 합류하는 용인시종합운동장 서쪽 술막은 옛 교통의 중심지임을 일러주는 지명입니다. 바로 이곳은 고려시대부터 이어져 온 김량장(金良場)이 있던 곳으로 술막 또한 번성했던 장시의 자취를 간직한 이름임을 알겠습니다.

김량장은 김령역에서 비롯한 이름이, 뒤에 '김량장'으로 변한 것으로 보입니다. 달리 일설에는 김량(金良)이라는 장군이 산 곳이라 김량이라 했고 뒤에 그곳에 장이 열려 김량장이라 했다고도 합니다.

이밖에도 '양질의 금이 나오는 곳', '쇠가 많이 나는 고개' 등 다양한 유래가 전해 옵니다. 하지만 역사적 사실로 살피면, 서쪽 김령역에서 비롯한 이름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특히 마지막 설은 김령(金嶺)이란 역의 이름을 푼 것이니 그 혐의가 짙습니다. 어쨌든 김량장동은 이런 유래가 있으며, 지금도 5일과 10일 정기 시장이 열려 옛 전통을 잇고 있습니다.

   

김령역

신도시 용인을 벗어나는 즈음의 역북동 역말은 양재도(良才道)에 딸린 김령역(金嶺驛)이 있던 곳입니다. 그러니 역북동이란 지명은 지금의 국도 42호선 남쪽에 있던 김령역의 북쪽이라 붙은 것이지요. 김령은 우리말로 쇠재·새재이고 쇠·새는 동쪽을 뜻하니 옛 용인의 중심지인 기흥의 동쪽 고개 아래에 있어 그런 이름이 붙은 것으로 보입니다.

/최헌섭(두류문화연구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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