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광해, 왕이 된 남자〉(이하 〈광해〉)는 결국 왕이 '되지 못한' 한 남자의 이야기이다. 실제 왕과 외모가 같다는 이유만으로 잠시 왕의 자리를 대신하게 된 광대 하선. 하선은 세금제도를 개혁하고 명나라 파병의 희생을 최소화하는 등 가난한 백성을 위한 '진짜 왕다운' 모습으로 거듭나지만 끝내는 다시 천민의 자리로 되돌아간다.

그에게도 기회는 있었다. 마지막 순간, 비록 죽음이 예정된 길이었으나 충신 허균은 왕위에 오를 생각이 없냐고 묻는다. 하선은 거절한다. 아니, 피한다. 죽고 죽이는 게 왕의 자리라면 하기 싫다고 말한다.

자신에게 성심을 다한 궁녀 사월이가 눈앞에서 죽는 광경에 충격이 컸으리라. 만날 얼굴을 맞대고 국사를 논하는 조정 대신들이 자신에게 독과 칼을 겨누고 있는 현실도 견디기 힘들었을 것이다.

영화 〈광해, 왕이 된 남자〉의 한 장면./뉴시스

새삼스럽진 않다. 권력의 비정함과 냉혹함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문제는 대부분 늘 망각하고 외면하며 살아간다는 것이다. 대통령이란 존재를 보는 시각이 그렇다. 많은 국민에게 대통령은 자신의 고통을 '저절로' 해결해줄 구세주여야 한다. 권력의 험난한 세계는 가진 것 없는 자들을 위한 그 어떤 실천도 쉬이 허락하지 않지만, 자세히 알려고 하지도 알고 싶어 하지도 않는다.

〈광해〉를 보며 누구나 상상했을 것이다. 하선 같은 사람이 진짜 왕이 되어야 해. 그러나 얼마 안 가 우리 입에선 이런 짜증이 튀어나오고 있을지 모른다. "이 모든 게 하선 때문이야." 현 이명박 대통령은 물론, 고 노무현 대통령도 피해가지 못했던 아주 익숙한 레토릭 아닌가?

뒤집으면 이 말은 "모든 걸" 해결할 수 있는 전지전능한 대통령이 실존 가능하다는 뜻이다. 과연 그럴까? 조정 대신의 저항만 문제가 아니다. 대통령에겐 재벌·기득권세력의 특권을 폐하라고 요구하지만, 정작 우리의 삶은 그들의 노예 그 자체다. 서민들 생존이 어려워지든 말든 재벌이 주도하는 토목·지역 개발에 쌍수를 들어 환영하는가 하면, 대형마트와 편의점, 프랜차이즈 전문점의 화려함과 편리함에 굴종한다. 자본과 유착한 정치인·관료들의 횡포에 분개하면서도, 선거 때만 되면 그들의 경력과 연륜에 현혹되어 뽑아주고 또 뽑아주는 게 우리들이다.

이율배반이 계속되는 한 결론은 늘 같을 수밖에 없다. 하선이 왕의 자리를 받아들이든 진짜 광해가 돌아오든, 박근혜가 대통령이 되든 안철수·문재인이 대권을 잡든 마찬가지다. 재벌과 기득권세력은 변함없이 세상을 지배할 것이고, 우리에겐 좌절과 환멸만 반복될 것이다.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는 길. '도피'마저 안전하지 않았지만 하선은 또 다른 충신 도부장의 희생 덕분에 목숨을 구하게 된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어야 할까? 천한 신분이지만 진정 백성을 생각할 줄 아는 이 '진짜 왕'의 생환에 우리는 박수치고 기뻐해야 할까?

그렇다면 언제 다시 죽음과 맞닥뜨릴지 모르는 남아 있는 자들은. 또 다른 사월이와 도부장은? 백성들은? 기득권 유지를 위해 살상과 전횡, 핍박과 사대를 서슴지 않는 저 조정 대신들은!

숱한 희생을 뒤로한 채 배를 타고 어디론가 떠나는 하선의 밝은 모습에 가슴 뭉클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피해서도 안 되고, 피할 수도 없는 자리. 그렇다. 우리는 스스로 '진짜 왕'이 되어 싸워야만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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