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게 이런곳] 남해고속도로 섬진강휴게소

10·26!

1979년 10월 26일은 박정희 대통령이 자신의 심복이었던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에 의해 살해된 날이다. 이로써 '박정희 시해범'이 된 김재규는 그해 12월 계엄군법회의 최후진술에서 "민주화를 위하여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쏘았다", "계획적인 혁명 거사였다"라고 주장했지만, 대개는 차지철 경호실장에 대한 박정희의 무조건적인 신임과, 그로 인한 차지철과 갈등 때문에 우발적으로 저지른 범행으로 알려져 있다.

김재규는 전두환·노태우 등 신군부 쿠데타세력의 집권 직후인 1980년 5월 24일 전격 사형 집행되었다. 그의 무덤은 경기도 광주시 오포면 능평리 삼성공원묘원의 외진 곳에 자리잡고 있다. 무덤 앞의 '의사 김재규 장군지묘'라는 묘비는 여러차례에 걸쳐 훼손되는 등 수난을 겪기도 했다.

남해고속도로 순천 방향 섬진강 휴게소에 있는 '호남 남해고속도로 준공기념탑'. 박정희 대통령 임기 중인 1974년 11월 14일 세워졌다. 이순신 장군의 승전 유적지이기도 한 곳이어서 조국번영의 상징으로 '승리의 여신상'을 함께 세웠다고 한다. /김주완 기자

그런데 이런 김재규와 박정희가 사이좋게 공존하고 있는 공간이 남아 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드물다. 하동과 전남 광양의 경계 지점인 남해고속도로 섬진강휴게소(순천방향)가 바로 그곳이다.

섬진강휴게소는 특이하게도 부산방향 휴게소와 순천방향 휴게소가 육교로 연결되어 있다. 부산방향에서 이 육교 위에 올라서면 길쭉하게 솟아오른 탑이 보인다. 그 탑에는 얇은 천을 걸쳐 몸매가 드러난 서양 여성이 월계관을 떠받드는 모습으로 서 있다.

그 아래엔 '호남 남해고속도로 준공기념탑'이라는 글자가 양각으로 새겨져 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글씨다. 탑 오른쪽에도 같은 글씨가 음각으로 새겨진 오석이 있고, '제자 대통령 박정희'가 선명하다.

박정희 대통령의 1973년 1월 14일 고속도로 준공식 치사 중 "10월 유신의 기치 아래 총화 단결하여 번영의 80년대를 향해 줄기차게 매진해 나갑시다"는 말이 음각된 오석도 있다.

'호남 남해고속도로 준공기념탑' 아래에 있는 기념비. 박정희 전 대통령의 글씨다. 아래에 작은 글씨로 '제자 대통령 박정희'라고 썼다. /김주완 기자

탑 뒤쪽으로도 약 3m에 이르는 부조벽에 그리스 신화에 나옴직한 사람들이 새겨져 있는데, 작자의 이름은 이일영이다. 그 부조벽의 뒤쪽에는 또 이런 글귀가 양각으로 새겨져 있다.

"이 고속도로는 박정희 대통령 각하의 영도 아래 전 국민이 굳게 뭉쳐 조국 근대화의 신념을 지니고 땀흘려 일한 결정이며 우리 후손에게 물려줄 값진 민족자산으로 전 국토의 4대 권역을 완전한 1일 생활권으로 묶어 균형적인 발전을 기약하는 지름 길이다. 1974년 11월 14일 건설부장관 김재규"

탑 뒤쪽에 새겨진, 당시 건설부장관 김재규의 축문. '이 고속도로는 박정희 대통령 각하의 영도 아래 전 국민이 굳게 뭉쳐 조국 근대화의 신념을 지니고 땀흘려 일한 결정이며…'라는 내용이 담겨있다./김주완 기자

그런데 우리나라 고속도로 준공기념탑에 서양 여성과 그리스 신화의 인물들이 들어서 있다는 게 좀 생뚱맞다. 역시 돌에 새겨진 설명글을 보니 '승리의 여신상'이란다. 전문은 이렇다.

"호남 남해 고속도로는 1970년 4월 15일 1차 구간 대전-전주간을 기공 12월 30일에 개통하고 1971년 11월 26일 2차 구간인 전주-부산간을 착공 1973년 11월 14일 완공 준공을 가졌다. 이 고속도로 준공으로 전 국토가 1일 생활권이 된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호남과 영남의 중간지점이며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승전 유적지인 이곳에 조국 번영의 상징으로 승리의 여신상과 높이 25m의 탑을 세운다. 이 탑은 연인원 3800여 명이 동원되어 이일영 화백이 제작·건립하였다. 1974년 1월 14일 한국도로공사"

아하! 이순신 장군의 승전 유적이니까 '승리의 여신상'이라는 거구나. 그래도 충무공과 그리스 신화의 여신은 아무래도 좀 안 맞는 듯하다. 심지어 탑 뒤편에는 올림픽 성화대 형상의 조각도 있다. 찾아보니 이일영 씨는 박정희 시절 전국의 현충탑 등 군사시설물의 설계와 디자인을 거의 도맡아 하다시피 한 작가였다.

어쨌든 이 탑과 여신상이 세워진 것은 1972년 10월 유신 이후인 1974년이었고, 그 후 5년이 지나 박정희는 이 탑을 건립한 김재규의 총탄에 쓰러진다. 올해는 10월유신 40주년이고, 이 탑이 세워진지 38주년, 박정희 대통령 피살 33주년이 되는 해이다. 오늘이 그 날이다. 섬진강휴게소에 갈 일이 있으면, 한 번쯤 둘러보며 유신독재와 박정희, 김재규를 생각해봐도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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