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인사·팔만대장경은 합천의 '일부'일 뿐

합천(陜川)은 한자 그대로 읽으면 '협천'이다. 1413년(태종 13년)부터 불린 고을 이름이 협천이다. 곳곳에 솟은 산과 그 사이 좁은 계곡, '좁은 내'라는 이름은 땅 모양새와 맞아떨어진다. 지금 합천은 1910년대 초까지 협천이었다. 협천을 합천으로 부른 것은 1914년 협천군·초계군·삼가현이 묶이면서다.

〈합천군사(陜川郡史)〉는 당시 사람들이 '세 개 고을을 합하였으니 협(陜)보다 합(合)이 맞다'며 주장했다고 기록한다. 그때부터 한자는 그대로 쓰되 '합천'이라고 읽기로 했다는 것이다. 어쨌든 '협'보다 '합'에 담긴 뜻은 후덕하기는 하다. 그리고 터전 이름에 큰 뜻이 담기기를 바라는 마음이 요즘 사람이라고 다를 리 없다.

그렇다고 합천을 좁은 땅에 억지로 붙인 이름으로 여기는 것은 곤란하다. 합천에서 좁은 것은 계곡과 들판이다. 합천군 면적(983.47㎢)은 경남에서 가장 넓고 서울보다 1.6배 크다.

높고 넓지만 좁은 땅

합천에서 가장 높은 산은 가야산(1430m)이다. 하지만, 합천 땅을 가장 수월하게 내려다볼 수 있는 곳은 오도산(1134m)이다. 합천 제2봉답게 곳곳에서 볼 수 있는 봉우리 정상에는 통신사 중계소가 서 있다. 이 중계소로 가는 입구는 묘산면 가야마을에 있다. 중계소를 관리하고자 닦아놓았을 길은 정상까지 이어진다. 거리는 10㎞ 정도, 차로 20~25분이면 오도산 꼭대기에 닿는다.

합천은 가야산·오도산을 비롯해 두리봉(1133m)·깃대봉(1113m)·단지봉(1029m)·비계산(1126m)·두무산(1038m)·황매산(1108m) 등 1000m가 넘는 산이 즐비하다. 또 매화산(954m)·숙성산(899m)·산성산(741m) 등 600m를 훌쩍 넘는 산도 흔하다.

합천영상테마파크.

오도산 정상에서는 이 땅에 두루 퍼진 산세를 한눈에 담을 수 있다. 하지만, 봉우리들 틈에서 얼핏 드러나는 들판은 규모를 따지기 민망하다. 오도산에서 멀리 보이는 합천호 넓이에 버금가는 땅조차 찾기 어렵다. 합천군 전체면적에서 농경지(153.03㎢)는 고작 15.6% 정도다.

그럼에도 전체 인구 가운데 절반 이상이 농·축산업을 하고 있다. 환경이 받쳐주지 않는다고 다른 일을 할 수도 없는 처지다. 율곡·야로·적중 3개 농공단지가 있으나 전체 산업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크지 않다.

경남에서 가장 넓은 땅이지만, 이곳 사람들이 삶을 꾸리기에는 좁았다. 합천 밖에서 살길을 찾는 사람들이 많았던 것은 당연했다.

합천읍에는 '합천원폭피해자복지회관'이 있다. 척박한 땅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이곳 사람들에게 닥친 비극이 낳은 시설이다.

1945년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떨어진다. 일본인은 물론 그곳에서 일하던 상당수 조선인도 피폭을 피할 수 없었다. 훗날 조사된 조선인 피해자는 어림잡아 2만 5000~4만 명. 이 가운데 2500~4000명 정도가 합천 사람인 것으로 알려졌다. 나라에 하나뿐인 원폭피해자복지회관이 합천에 들어선 이유다. 단지 합천에 피해자가 많이 살았다는 것이다. 이는 합천을 떠난 사람이 그만큼 많았다는 말도 된다. 먹고살 길을 찾아 떠났던 사람들은 처참한 모습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 아픔은 대물림됐다. 합천읍에 있는 원폭 피해자 2세들 쉼터인 '합천평화의집' 역시 나라에 하나뿐인 시설이다. 피폭 1세대와 달리 2세들은 그 피해 사실조차 공식적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합천을 동서로 가로지르는 큰 물줄기는 황강이다. 그나마 살림에 보탬이 되는 들판은 황강 언저리에 있다. 율곡면·쌍책면·청덕면·초계면·적중면 일대다. 하지만, 예부터 귀한 들판 대부분은 비가 오면 쉽게 잠겼다. 물을 다스리지 않고서는 입맛만 다셔야 할 땅이었다.

그런 면에서 황강 치수 사업은 이곳 사람들에게 오랜 소망이었다. 1988년 완공된 합천댐은 제법 쓸만한 땅을 농민들에게 안긴다. 살림을 불릴 정도는 아니어도 이곳 주민들은 제대로 농사를 지을 수 있게 된다. 더불어 합천댐은 바깥사람들에게 내세울 만한 경치도 만들어냈다. 높이 96m, 길이 472m인 댐 건설로 조성된 '합천호'는 산으로 덮인 땅에 색다른 매력을 더했다. 합천군은 합천읍에서 황강을 거쳐 합천호로 이어지는 봉산면까지 길가에 벚나무를 심어뒀다. '합천백리벚꽃길'로 불리는 이 길은 호수와 더불어 '합천 8경' 가운데 하나다. 흐드러진 벚꽃 사이로 길게 이어진 길은 누구라도 매력을 느낄만한 드라이브 코스다. 합천은 마라톤대회를 열어 함천댐 주변 풍경을 뽐내곤 한다.

그렇더라도 합천은 역시 산이다. 합천 8경 가운데 6개가 산이 빚어낸 절경이다. 가야산, 해인사, 홍류동계곡, 남산제일봉, 황계폭포, 황매산 등이다. 산에 기대지 않은 풍경은 백리벚꽃길과 황강 하류에 있는 함벽루(합천읍) 정도다.

함벽루.

가야산은 해인사와 홍류동계곡, 남산제일봉 등 합천 3경을 껴안은 명산이다. 즉 합천이 자랑하는 절경 절반이 가야산에서 비롯한다.

해인사는 통도사·송광사와 더불어 나라를 대표하는 사찰이다. 팔만대장경과 더불어 세계가 인정하는 유산이기도 하다. 남산제일봉은 봄 진달래, 가을 단풍, 겨울 설경 등 철마다 매력적인 매화산 제1봉이다. 홍류동계곡은 가야산 국립공원에서 해인사 입구까지 4㎞에 이르는 계곡이다. 가을 단풍이 흐르는 물에 붉게 비쳐 '홍류동'이라는 멋진 이름을 얻었다.

용주면 구장산에 있는 황계폭포는 20m 높이에서 떨어지는 물줄기가 감탄을 자아낸다. 가회면에 있는 황매산은 산 전체가 거대한 바위로 보이는 잘생긴 산이다. 특히 이 나라 기암괴석을 모두 모아놓은 듯한 모산재 산행길 풍경이 등산객에게 인기다. 상당히 가파른 등반길이 버겁지만, 마주치는 절경이 주는 즐거움은 쌓인 피로와 충분히 맞바꿀만하다.

사실 풍경이 빼어난 산을 금강산에 빗대어 '소금강'이라고 이름 붙인 곳은 드물지 않다. 하지만, 여기 사람들은 황매산이야말로 소금강 이름이 분에 넘치지 않는다고 자신한다.

유·불교 흔적이 고루 섞인 곳

경남 곳곳에서 발견되는 가야문화 흔적은 합천에도 있다. 지난 2004년 완공한 합천박물관(쌍책면)에는 옥전고분군에서 나온 가야시대 '다라국' 유물이 전시돼 있다. 하지만, 다라국은 가야시대를 통틀어 보면 주연보다 조연에 가깝다. 1~2세기 사이 경북 고령에서 일어난 대가야에 흡수되기 때문이다.

합천읍에 있는 대야성은 이곳이 삼국시대 전략적 요충지였음을 짐작하게 하는 흔적이다. 642년 백제 장군 윤충은 대야성을 점령한다. 그리고 대야성주 김품석과 아내에게 자결을 명한다. 하지만, 이 전투는 훗날 역사에서 백제가 사라지는 빌미를 제공한다. 김품석은 태종무열왕, 즉 김춘추의 사위였던 것이다. 김춘추는 이 대야성 전투 18년 뒤인 660년 황산벌 전투에서 승리하며 백제를 무너뜨린다.

남명 조식(1501~1572)이 말년을 보내고 대종사 성철(1912~1993)이 태어난 산청군이 특별한 곳이 되었듯이, 합천은 조식이 태어났고 성철이 해인사에서 입적했기에 특별한 곳이다. 산청 편에서 이미 다룬 두 인물을 빼더라도 합천에서는 유·불교계에서 두드러진 인물 한 명씩은 꼽을 수 있다. 유학자 정인홍(1535~1623)과 승려 자초(1327~1405), 즉 무학대사이다.

조식이 키운 제자 가운데 으뜸으로 꼽히는 정인홍은 가야면 출신이다. 정인홍은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활약하며 '영남 의병장' 호를 받았다. 벼슬은 대사헌을 비롯해 좌의정·우의정·영의정까지 거친다. 하지만, 인조반정(1623년) 이후 서인에게 역적으로 몰려 사형당한다. 비록 비극적인 죽음을 맞았지만, 그에 대한 후세 평가는 박하지 않다. 전해지는 품성과 학문적 성취 덕이다.

특히 역사학자 신채호(1880~1936)는 '삼걸론(三傑論)'을 주장하며 역사상 빼어난 인물로 을지문덕, 이순신과 더불어 정인홍을 꼽았다.

고려 말 승려 자초는 삼기현(현재 대병면) 출신이다. 18세에 출가했으며 천문·지리·음양·도참술에 능했다고 한다. 특히 자초는 뛰어난 풍수도참사상가였다. 이성계가 '왕(王)'자 꿈을 꾸었을 때 이를 풀이하며 연을 맺고 친밀한 관계를 이어갔다. 또 한양 천도 결정에도 영향을 미친다. 유교를 받들고 불교를 배척하겠다던 조선이었지만, 자초만은 이성계에게 끝까지 신뢰받았다.

합천에 고루 남은 유·불교 흔적은 인물에서 그치지 않는다. 합천은 조선시대 국가 교육기관인 향교가 4곳에 있다. 합천향교(야로면), 초계향교(초계면), 삼가향교(삼가면), 강양향교(합천읍) 등이다. 비교적 최근에 세운 강양향교를 빼더라도 3곳이다. 조선시대 목(牧)·부(府)·군(郡)·현(縣)에 하나씩만 두도록 정한 향교가 합천에 많은 이유는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문이다. 합천군, 초계군, 삼가현에 각각 있던 향교가 합천군으로 묶이면서 한 행정구역에 포함된 것이다. 향교와 더불어 합천에는 서원 수도 22개에 이른다.

합천이 내세우는 사찰로는 연호사(합천읍)가 있다. 함벽루 옆에 있는 이 절은 643년(선덕여왕 12년)에 창건됐다고 한다. 황강과 함벽루, 사찰이 어우러지는 풍경이 매력적이다.

황매산 자락에 안긴 영암사지(가회면)도 지나칠 수 없다. 신라시대 지었을 것으로 추정하는 절터다. 지금은 일부 남은 석재 구조와 유적이 가까스로 옛 흔적을 증명한다. 그래도 절터 가운데 삼층석탑과 마주 보는 곳에 서 있는 쌍사자석등, 주변 황매산 풍경은 보는 이들을 흐뭇하게 한다. 그리고 합천에는 해인사와 팔만대장경이 있다.

가야산 해인사 팔만대장경

합천에는 가야산이 있다. 가야산에는 해인사가 있다. 그리고 해인사에는 팔만대장경이 있다. 합천이 아무리 척박한 땅이라고 해도 해인사와 팔만대장경을 내세울 때면 언제든지 당당할 수 있다. 법보(法寶) 해인사는 불보(佛寶) 통도사와 더불어 경남이 품은 이 나라 보배다.

802년(신라 애장왕 3년)에 창건한 해인사는 잦은 화재로 그 원형을 알 수는 없다. 현재 해인사 전각은 대부분 조선 말기에 지어졌다. 그나마 팔만대장경을 보관한 대장경판전이 1488년(성종 14년)부터 지금까지 제모습을 지키고 있다. 긴 세월 모진 수난을 겪으면서 버틴 대장경판전을 대견하게 여기기에 앞서 기억할 사람이 있다. 바로 6·25전쟁 당시 공군비행단 참모장이었던 김영환(1921~1954)이다.

   

김영환은 6·25 전쟁 때 T-6 훈련기를 조종하며 진격하는 적과 맞섰다. 이후 전세가 역전되자 도망치지 못한 인민군 일부는 해인사를 근거지로 삼아 활동한다. 1951년 김영환에게 해인사 폭격 명령이 떨어진다. 하지만, 그는 빨치산 몇 명 잡으려고 문화유산을 태울 수 없다며 명령을 거부한다. 유네스코 등재 세계문화유산 대장경판전과 세계기록유산인 팔만대장경은 그렇게 또 위기를 넘겼다. 해인사는 지난 2002년 김영환을 기리는 공덕비를 세웠다.

법보사찰이 지닌 위엄은 해인사만으로 충분하다. 하지만, 해인사에 경건한 신비로움을 보태는 것은 대장경판전과 그 안에 있는 팔만대장경이다. 해인사 대적광전 뒤에 'ㅁ'자 형태로 지어진 대장경판전은 긴 세월 의젓하게 팔만대장경을 지켜내고 있다.

현대 과학이 풀이한 대장경판전 신비는 크게 3가지다. △가야산 계곡 바람을 잘 활용한 입지 △모래·횟가루·찰흙·숯으로 깐 바닥 △아래위 크기를 다르게 한 창(窓) 등이다. 습기를 막고 건조한 공기가 늘 건물 안을 돌 수 있도록 한 기술이다. 현대 기술로도 감히 넘보지 못하는 옛사람들 지혜다.

해인사 소리길 낙화담.

비석과 표지석

합천읍을 가로지르는 황강을 끼고 너른 공원이 펼쳐져 있다. 간단한 체육시설과 녹지로 꾸민 공원에는 드문드문 기념물이 한 자리씩 차지하고 있다. 그 가운데 하나가 '파리장서비'다. 1919년 전국 유림대표 137명이 독립을 청원하는 편지에 서명해 파리 강회회의에 참석한 열강에게 전한 '파리장서사건'. 비석에는 당시 합천 유림 11명이 장서에 서명했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11명은 문용, 송호완, 송호곤, 송호기, 송철수, 박익희, 송재락, 전석구, 전석윤, 김상진, 김동수 등이다. 전국에서 두 번째로 많은 수다.

공원 입구에는 표지석이 있다. '대통령이 출생한 자랑스러운 고장임을 후세에 영원히 기념하고자 대통령 아호를 땄다'는 설명 앞에 적힌 이 공원 이름은 '일해공원'이다. '일해'는 12대 대통령 전두환(1931~) 아호다.

당시 군수였던 심의조는 전국적으로 불거진 거센 논란에도 '일해공원' 명칭을 고수했다. 그리고 2008년 12월 31일 자로 표지석을 세운다. 일해공원 글귀는 전두환이 썼다.

건들지 못했던 자연에 거는 기대

"농사지을 땅이 있나, 공단이 들어올 수 있나, 소라도 키워야지."
합천 한우 명성 한 면에는 이 같은 자조가 걸쳐 있다. 예부터 합천은 내줄 게 넉넉하지 않은 땅이었다. 여기 사람들이 여기저기 손을 뻗쳐 봤자 나올 것도 없었다. 합천을 둘러싼 청정한 자연은 개발하지 않아서 지켜낸 것이 아니었다. 개발할 수 없어서 지켜진 것이었다.

하지만, 오랫동안 건들 수 없어 내버려뒀던 땅은 어느덧 기회로 다가온다. 여기 사람들은 그렇게 지킨 자연에서 서서히 가능성을 찾기 시작한다. 답은 오직 '관광 합천', 다른 곳으로 눈 돌릴 곳은 애초부터 없었다.

지난해 개최한 '대장경천년세계문화축전'은 합천이 지닌 가장 큰 자산을 최대한 살리려는 시도다. 해마다 100만 명 넘게 찾아오는 해인사와 연계한 행사다. 합천군은 2013년 대장경천년세계문화축전을 '관광 합천'을 널리 알리는 계기로 삼고자 벼르고 있다. 합천읍에 있는 영상테마파크도 이제는 해마다 40만 명 넘는 관광객이 찾는 명소다. 딱히 용도가 떠오르지 않던 땅이 사실 쓸모없는 게 아니라는 것을 확인한 극적인 예다. 1930~1980년대 서울 시가지를 재현한 이곳은 전국에서 제대로 된 근·현대극을 찍을 수 있는 곳으로 각광받고 있다. 사람이든 돈이든 가장 가까운 대도시인 대구로 다 간다며 대구를 '빨대'라고 하던 한탄도 바뀌고 있다. 대구에서 벌어서 합천에서 쓰게 하겠다는 것이다. 더불어 2013년 착공하는 함양~울산 고속도로에 거는 기대도 크다. 다른 곳에서 누렸던 게 늘 부족했던 합천은 이제 어디에도 없는 것을 가진 곳으로 거듭나고 있다.

기사제보
저작권자 © 경남도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