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면식 없던 백발의 어르신…"나라 위해 큰 일 하라" 선물

지난 금요일 제54회 사법시험합격자 발표가 있었다. 아마도 신림동 고시촌은 합격의 기쁨과 낙방의 아픔이 공존하며 종일 술렁거렸을 것이다. 사법시험 합격생은 그 누구보다 행복한 하루였을 것이다. 합격자 명단에서 자신의 이름을 보는 순간 지난 수년간의 고되고 힘든 순간들이 떠올라 벅차오르는 눈물을 감출 수 없었던 이들도 있었을 것이다.

54회 사법시험 합격자 발표 소식을 들으니, 지난날의 나의 모습이 오버랩된다. 그때가 2008년 10월경이니 벌써 4년 세월이 흘러갔다. 2008년 나는 무척이나 자신감이 없었던 시절이다. 2007년 4번째로 본 사법시험 2차 시험에서 낙방을 하고 춥고 어두운 겨울의 터널을 지나 1차 시험에 합격을 하고 정신이 없는 상태에서 나는 무더위와 싸우며 2차 시험을 마쳤다.

그리고 다시 10월 합격자 발표의 날이 다가왔다. 1차 시험에 처음 합격했을 때 나는 초시로 단번에 시험에 합격하겠다는 자신감에 차있었다. 고시촌에서 도를 닦듯이 오랫동안 공부하는 장수생은 나의 미래의 모습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초시는커녕 재시에서도 낙방을 했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자신감에 차있었다. 하지만, 세 번째 2차 시험에도 떨어지고 마지막이라고 생각했던 4번째 시험에도 떨어지면서 난 처음으로 고시원 옥상에 올라가 서럽게 울었다. 그리고 나의 미래의 모습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장수생이 나는 되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철없이 자신감을 넘어 오만함이 가득했던 나는 수치심과 열등감으로 몸을 떨어야 했다.

2008년 10월 21일 그날은 제50회 사법시험 합격자 발표가 있는 날이었다. 도무지 잠이 오지 않아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고 아침 일찍 고시원을 나가 관악산을 거닐다가 발표시간이 다가오자 나는 상원서적으로 향했다. 그리고 합격자 명단에서 나의 이름을 보았을 때 그때의 감정을 나는 아직도 잊을 수 없다.

시험에 합격했다는 소식을 부모님께 전하고 나는 고향으로 향했다. 고향에는 부끄럽게도 나의 뒤늦은 합격을 축하한다는 플래카드가 나부끼고 있었다. 생각 같아서는 당장 떼어내고 싶었지만 부모님의 기뻐하시는 마음을 생각하여 그대로 두었다. 지금 생각해도 부끄러운 일이다. 고향에 도착하니 친척, 동네주민분들께서 진심으로 축하해주었던 기억이 난다. 나의 고향은 아직도 개발이 제대로 되지 않은 시골마을이라, 아직도 사법시험이 마치 과거시험에 급제라도 한 것처럼 대단한 시험으로 생각한다.

그렇게 동네주민과 부모님의 축하를 받으며 오랜만에 마음 편히 고향집에 머무르던 어느 날, 백발이 성성한 동네 어르신 한 분이 찾아와 정성스럽게 포장한 무엇인가를 전해주셨다. 솔직히 그분은 부모님과는 친분이 있는 분이셨지만, 나는 일면식도 없는 낯선 분이었다.

그분께서 별다른 말씀 없이 전해 주신 것은 한 자 한 자 정성스럽게 직접 쓰신 독립선언서이었다. 사법시험에 합격했으니 독립선언서를 마음깊이 새기며 나라를 위해 큰일을 하라는 뜻으로 정성스럽게 작성한 그 독립선언서를 나에게 시험합격 선물로 준다는 것이었다. 당혹스러웠다. 얼핏 보아도 작은 글자로 빽빽하게 기재된 독립선언서는 작성하는데 많은 시간과 정성이 들어갔을 것이다. 나와 일면식도 없는 그분께서는 왜 보잘것없는 나에게 그렇게 정성이 가득 담긴 독립선언서를 준 것일까?

2008년 사법시험 합격 후 나라 위해 큰 일 하라며 어르신이 주신 독립선언문.

아직도 나는 그때 받은 독립선언서를 소중하게 보관하고 있을 뿐, 사무실이나 집의 벽에 걸어놓지 못하고 있다. 그것은 그 독립선언서가 나에게 너무나 과분한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지금 나라를 위한 큰일은커녕, 조그마한 법무법인에서 사건이 복잡하다, 의뢰인이 너무 까다롭다고 투덜거리며 변호사의 능력을 수시로 시험당하는 그저 그런 변호사의 길을 살고 있다. 나는 그분이 의도한 대로 그러한 큰 뜻을 펼칠 수 없는 그러한 사람이기에 그분의 정성이 가득 담긴 독립선언서를 받을 자격이 없기에 독립선언서를 떳떳이 내보이지 못하는 것이다.

사법시험 합격자 발표일이 다가오면, 난 그때 받아 책장 한구석에 고이 보관해온 독립선언서를 펼쳐본다. 내가 사법시험에 그토록 매달렸던 이유는 무엇인지? 지금 내가 사는 변호사의 길은 옳은 것인지를 그 짧은 순간이라도 고민해본다.

이제 사법시험 합격은 큰 영광이 아니다. 그러나 사법시험 합격으로 자신이 원하는 삶에 더 쉽게 다가갈 수 있는 것도 사실이다. 제54회 사법시험에 합격한 선배·후배들께 진심으로 축하의 말을 보낸다. 고된 노력의 결과가 이제 이루어졌으니 당연히 축하 받을 만하다. 그러나 사법시험에 합격한 많은 이들이 나같이 평범한 변호사의 삶을 살지 말고, 보다 의미 있고 어려운 이들의 삶과 함께할 수 있는 그러한 법조인의 삶을 살기를 기원해본다. 그러한 삶을 살지 못하는 평범한 변호사이기에 그런 기원을 할 자격이 없을지도 모르겠지만.

/kellsen(JUSTITA·http://kellsen.tistory.com)

기사제보
저작권자 © 경남도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