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쁘다의 조선시대 옛말인 '어엿브다'는 원래 '불쌍하다'란 뜻만 갖고 있었다, 그러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그 본래의 의미가 사라지면서 '사랑스럽고 귀엽다'란 뜻으로 의미 이동이 이루어진 것이다, 란 말로 국어수업을 명쾌하게 끝낸 나는 교실 문을 닫고 나오자 이내 허탈감에 산란해졌다.

교무실로 돌아와 뜨거운 커피 한잔에 혼돈스러운 마음을 가라앉혀 본다. '불쌍하다'란 원래 뜻이 사라져버려 크기가 작아진 '예쁘다'란 그 단어보다, 그런 식으로 단정적인 규정을 해버린 내가 오히려 더 왜소해 보이는 이유에 관한 고민들, 말하자면 일종의 우울증 같은 것.

과연 지금, '예쁘다'란 말에 '불쌍하고 가련하다'란 옛 의미가 영영 떠나버리고 없는 걸까. 눈에 보이는 것만이 전부일까. 모든 것은 다 말해질 수 있는 걸까. 그렇게 명확하며 규정 가능한 것들뿐이며, 모든 것은 한 그릇에 완벽하게 담길 수 있는 걸까.

예쁘다란 그릇에 '가련하고도 아름답다'란 내용은 전혀 어른거리지 않는 걸까. 그렇다면 보다 섬세해 보자. 아주 가끔은 정말로 예쁘고 아름다운 대상들로부터 우리는 어떤 아련한 동정심을 은근한 안개처럼 느끼게 되지 않나. 도대체 명료하다고 하는 것들은 얼마만큼의 구체적인 땅을 차지할 수 있나.

이를테면, 구체적인 우리의 몸이라는 '삶'조차도 모순적이게도 아주 극단에 있는 '죽음'까지 함께 결을 나눠가진다는 점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이미 '죽음'의 것들인, 우리 몸속에 들어온 곡식들, 공기들, 물들. 이들은 다시 삶을 살린다.

그러므로 우리 몸은 거대한 무덤. 또 죽음의 경우는 어떤가. 소설가 신경숙은 자신의 일곱 편 장편소설 속 주인공들을 모두 죽여버렸다. 왜 그랬느냐는 어느 평론가의 질문에 놀란 신경숙이 답한 말. '나는 단 한번도 그들이 죽었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노라고, 단지 이 거리에 없을 따름이지 어디엔가에 살아 있노라고.'

실제로 삶은 '죽음'이 되어 흙이 되고 공기가 되며 다시 비가 되고 퇴비가 되어 '삶'이 된다. 죽음은 그렇게 삶과 다시 겹치고 섞여 있다.

그러니 세상은 온통 한마디로 말해질 수 없는 것투성이 아닐까. 삶과 죽음처럼, 의식과 무의식처럼, 명확하게 규정지을 수 있는 개념과 말해질 수 없는 분위기와 뉘앙스처럼.

   

어떠한 방식으로든 명확하게 말하지 못할 세상. 세상은 우리가 섣불리 규정짓느라 놓쳐버린, 절대 말해질 수 없는 무수한 것들의 전체.

이제 그 전체 자체로 받아들여야 할 때. 다음 국어시간에는 이 '어엿브다'란 말의 말해질 수 없는 의미들에 대해 말해볼까 한다. 아무래도 요즘 나는 '시(詩)'를 배우는 중인 듯하다.

/서은주(양산 범어고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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