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플파워] "지역사회 문제 바로잡기 해 가장 먼저 나선 분"

수십 년 동안 시대의 불의에 맞서 싸우고 지역사회 문제에 늘 함께 해왔던 한 진보학자의 죽음에 동료 교수들과 시민사회 진영에서는 이승에서의 마지막 인사로 그에게 ‘시민사회장’으로 답했다. 진주지역 내에서 ‘시민사회장’이라 이름 붙여진 최초의 장례였다.

‘고 이창호 교수 시민사회장’이 동료 교수와 시민들의 애도 속에 지난 9월 6일 오전 진주 경상대학병원 장례식장에서 거행되었다. 고 이 교수의 ‘시민사회장’은 고인의 죽음을 두고 진주지역 시민사회 진영에서 ‘지역에서 해온 공과가 너무나 크다. 차마 이대로 보내드릴 수 없다’는데 의견을 모아 진행된 것이었다.

<한국 사회의 이해> 사건을 무죄로 끌어내다

고 이창호 교수는 1994년 당시 경상대학 재직 교수들을 국가보안법으로 몰아간 <한국사회의 이해>, 그 사건의 중심에 있었던 한 사람이었다.

고 이창호 교수 영정./권영란 기자

<한국 사회의 이해> 사건은 대학교수들이 공동으로 펴낸 강의교재를 보수 언론과 검찰이 반국가이적물로 규정,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몰아간 사건이었다. 고 이 교수는 장상환·정진상·김준형·최태룡·이혜숙·백좌흠·김의동·김준형·송기호 교수와 함께 교양교재 ‘한국사회의 이해’를 저술하고 그 교재로 강의했는데, 검찰은 교수들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수사, 기소했었다. 하지만 법원은 교수들의 편을 들어 무죄를 선고했고, 1심과 2심에서 모두 무죄, 대법원(당시 주심 김용담)은 사건이 벌어진지 11년만인 2005년 3월 무죄를 선고해 확정했던 것이다.

   

고 이 교수는 참여정부시절 검찰개혁을 주장하면서 ‘검찰은 쇄신이 가장 어려운 조직’이라며 ‘고등검찰제 폐지’ ‘지방검찰청장 직선제’ 등을 제안했던 법학계의 대표적인 진보학자이기도 했다. 2004년부터는 ‘국가정보원 과거사건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 위원으로 해 KAL858 폭파사건을 담당해 미얀마 현지조사 등을 진행하기도 했다.

2004년 8월, 양민학살사건 학술심포지엄에서 그는 “‘산청함양거창 양민학살 사건의 법적 재검토’ 발제에서 국가범죄내지 국가폭력이자 “집단범죄, 집단학살죄”라고 밝히고 과거청산의 일반원칙을 세울 것”을 제안하기도 했다. 1951년 국군에 의해 자행된 산청함양거창 학살사건과 관련한 유가족 보상과 명예회복을 위한 특별법 개정이 다시 추진되어야 한다는 강력한 주장으로 제기됐다. 이는 1996년 여야 합의로 특별법이 개정됐고, 2004년 3월에도 ‘특별조치법 개정법률’이 국회에서 여야 합의로 통과됐음에도 불구하고 정부가 이를 거부한다고 한 것에 대응이었다.

고 이창호 교수는 지역 시민사회에서도 폭넓은 활동을 펼쳐 민주노총 지도위원, 민주주의법학연구회 회장을 역임했고, 민교협·교수노조 활동, 전교조 경남지부 지도위원, 참교육학부모회 진주지회 고문 등 교육운동에도 전념했었다.

안타깝고 간절한 모두의 마음을 담아

고인의 시민사회장 장례위원회에는 진주지역 13개 단체가 참여했다. 고철환·김세균·김수업·김장하·박노영·박노정·서창호·이민환·장임원·하해룡 고문, 안병욱·오충일·정현찬·조창래 장례위원장으로 구성되었다. 김기진 교수와 박광희 목사가 집행위원장, 백좌흠 경상대 교수가 호상 등을 맡았다. 진주지역은 물론 서울 등 타 지역에서도 고인과 같이 오랫동안 활동을 해왔던 이들이 참여하여 고인의 영결식을 준비했다.

   

‘고 이창호 교수 시민사회장’은 정진상 경상대 교수의 사회로 진행되었다. 정진상 교수는 “오늘 고인의 장례는 모든 절차를 시민사회에서 맡아 주관하고 있다. 이는 고인과 뜻을 같이 해왔던 오랜 벗들과 지역 시민들이 고인을 너무 일찍 애통하게 보내는 안타깝고 간절한 마음이기도 하다. 이를 받아들인 유가족에게 고마움 전한다”고 밝혔다.

이날 장례는 먼저 고인이 즐겨 불렀던 ‘임을 위한 행진곡’을 다함께 불렀고, 조가와 조시 낭송에 이어 고인과 뜻을 같이 해왔던 동료 교수, 지역사회 인사들의 조사로 이어졌다. 고인의 생전 활동모습을 담은 영상이 상영되기도 했다.

장상환 경상대 교수는 조사를 통해 “같이 겪었던 1994년 <한국사회의 이해>사건이 먼저 떠오른다. 그때 선생은 진면목을 발휘했다. 사건 해결에 앞장서 온몸을 던지셨다. 우리의 ‘사령관’으로 모든 일을 지휘했다”고 술회했다. 이어 장 교수는 “지난해 말 선생은 올해 대선에서 민주진영 후보를 위해 싸워보겠다고 말씀하셨다. 이제 다 내려놓으시라, 남은 일은 우리의 몫이다”며 마무리했다.

박광희 목사는 “몇 해 전 한 행사 때 사회자가 ‘노동자들도 오셨냐’고 물으니까 고인이 벌떡 일어나 ‘교수도 노동자다’며 손을 흔들어 인사하셨다”며 고인의 사람됨을 엿볼 수 있는 짧은 일화를 말했다.

장례 집례위원인 이기동 씨는 “대학이라는 울타리에 있었지만 고인은 지역사회 문제를 바로 잡아가는데 가장 먼저 나섰었고, 지역 내 시민사회단체에서 활동하는 사람들과 가장 친밀한 관계를 유지해온 분이었다”고 말했다.

   

고인의 오래 전 제자였다는 하정우 씨는 “상하, 귀천 등 경계가 없는 자유롭고 정의로운 분이었다. 또 그만큼 신념과 열정이 뜨거웠다. 하지만 심성이 한없이 여리고 고운 분이었다. 그래서 스스로 힘들었던 게 많으셨다”고 회고했다.

고인의 운구행렬은 경상대 법과대학 광장에서 제자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제자들이 만들어 높이 세운 노란 근조깃발에는 ‘국가보안법이 없는 나라에서 편안하시길’ ‘교수님 사랑해요’ 등의 문구가 펄럭이고 있었다. 운구행렬은 다시 진주시 명석면 계원리 자택에 들러, 마지막으로 진주 안락공원에 안치됐다.

고 이창호 교수는 지난 3월 ‘위암’ 진단을 받고 5개월 여 투병생활을 해오다가 지난 9월 4일 별세했다. 58세 짧은 생이었다.

   
   

<조사>

‘우리의 사령관’을 떠나 보냅니다

이 선생님, 어찌된 일입니까?
사랑하는 가족과 친구, 친지들을 두고
환갑도 지나지 않은 채 우리 곁을 떠나시다니. 정말 믿어지지 않습니다.
이 선생님, 진주사회과학연구회를 통해 이선생과 나누던 25년의 시간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매주 만나 공부하고 술잔을 기울이며 담소를 나누었지요. 선생님은 명석하여 복잡한 문제들도 간명하게 정리하곤 했습니다. 작은 체구임에도 건강했던 이선생은 지리산 등산을 즐기셨습니다. 등산 가면 좋은 음식 솜씨로 식사 준비를 도맡았습니다. 산에 오르면 ‘지리산’,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 등의 노래를 즐겨 부르셨지요. 지금도 가사가 생각납니다. “나는 저 산만 보면 피가 끓는다. 눈쌓인 저 산만 보면 지금도 흐를 그 붉은 피 내 가슴 살아 솟는다 ---”
이 선생님, 선생님은 경상대 민교협 간사와 회장을 맡으면서 대외협력 업무를 도맡았습니다. 전교조 교사들이 교육민주화에 나섰을 때 교수들의 지원에 앞장섰습니다. 정이 많았던 선생님은 사회단체 대표들과 만나 의논하는 시간을 아까와 하지 않았습니다. 회의 후의 술자리가 잦아지면서 선생님에게 음주 부담이 커지지 않았는지, 힘든 일을 너무 오래 맡으신 것이 아닌지 후회됩니다.

이 선생님, 1994년 ‘한국사회의 이해’ 사건이 터졌을 때 선생님은 진면목을 발휘했습니다.
사건 해결에 앞장서 온몸을 던지셨습니다. 선생님은 ‘우리의 사령관’으로 모든 일을 지휘했습니다. 검찰의 출두요구에 대해 개학 때까지 학교에서 농성하면서 여론의 호전을 기다렸습니다. 마침 형법 전공으로 변호사 선임 등 법률적 뒷받침도 꼼꼼하게 챙겼습니다. 사건 발생 이듬해에 매월 공판을 방청할 학생들을 위한 차량 주선 등 온갖 일들을 도맡으셨습니다.
선생님, 민주화 후 선생님은 국정원 과거사 정리위원회에 참여했습니다. 2006년 서울로 올라가 상근위원으로 일하는 짐을 지셨습니다. 국정원 관료들과의 갈등을 해소하느라 잦은 술자리를 가진 것이 건강을 해친 듯합니다.

선생님, 왜 그렇게 술을 많이 드셨습니까. 무엇이 선생님의 여린 감성을 그토록 자극했습니까. 민주화에도 불구하고 자본과 권력의 횡포가 심해지는 세상에 분노해서 그랬습니까. 자주 건강 검진 받도록 챙기지 못한 것이 못내 후회됩니다.
지난 해 말 선생님은 올해 대선에서 민주진영 후보를 위해 힘써보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다 내려놓으십시오. 남은 일은 우리의 몫입니다.
선생님, 감사합니다.
선생님, 평안히 가십시오.

2012년 9월 6일
경상대 진주사회과학연구회 회원 장상환

*조사를 쓴 장상환 교수는 경상대학 경제학과 교수로 고 이창호 교수와 수십 년 동안 같이 해 온 오랜 벗이자 <한국사회의 이해> 등 여러 시국사건을 같이 겪어온 이다.

<조시>

그는 ‘사람겉헌 사람’입니다
-고 이창호 교수를 떠나보내며

‘사람겉헌 사람’이 우리 곁을 떠납니다.
그 자리 비어있음을 아직은 알지 못합니다.

우리는 그를 여전히 잘 모릅니다.
참 많은 세월을 같이 하면서
참 많은 사상과 신념을 나누고
그의 강직함에 많은 지지와 찬사를 보냈지만,
그가 세상에 진 빚에 얼마나 힘들어했고
그가 사람들의 눈물에 얼마나 가슴저며했는지
그이 또한 무섭도록 질긴 외로움에 얼마나 가슴을 쳤는지
우리는 그의 따뜻한 눈물을 잘 모릅니다.
우리는 그이의 고단한 생애를 잘 모릅니다.

꽃이 피면 한 잔 하자고
새 잎 피면 한 잔 하자고
비가 오면 한 잔 하자고
사람이 좋아 한 잔 하자고
사람이 또 서러워 한 잔 하자고
아직 ‘신새벽’이 오지 않았다고
어둔 밤길을 걸어 다시 한 잔하자고
그는 그렇게 우리들 손을 끌었습니다.

오는 바람 내가 다 막으마.
그는 누구보다 먼저 저만치 걸어갑니다.
기다리는 것보다 내가 맨발로 맞으러가마는
성급함보다 더한, 그이의 간절함입니다.
그의 발걸음이
‘만인의 만인에 대한 사랑’이었음을
남은 우리는 이제 어렴풋이 느낍니다.
아직, 그이가 일구던 땅은 결실을 거두지 못했습니다.
아직, 그이가 기다리던 ‘그놈의 세상’은 오지 않았습니다.
오늘은 그이의 뒷모습조차 가뭇가뭇합니다.

태풍이 지고 우레가 지고 긴 여름이 지고
그리고 그이가 떠납니다.
간밤 어둠 속으로 비바람 거세게 쓸려간 뒤
오늘 아침 마당가에는 배롱나무 꽃잎들이 점점이 붉습니다.
그 꽃자리 위로 그이의 이름을 가만히 불러들입니다.
그이는 ‘사람겉헌 사람 이창호’입니다.

2012년 9월 6일
권영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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