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영로 옛길을 되살린다] (30) 경기도 안성 죽간~백암면

절기는 한로를 지나 서리가 내리기 시작한다는 상강(霜降: 10월 23일)을 향해가고 있습니다. 가을의 마지막 절기를 맞아 겨울이 들기 전에 한 해 농사를 갈무리해야 하니, '지금 농촌은 고양이 손도 아쉬울 때'입니다.

곡류 위주의 농사에 집중했던 예전에는 벼를 거두어들이고 그 자리에 보리나 밀을 파종하거나 남해나 창녕처럼 마늘이나 양파를 심고 나면 한 숨을 돌리게 되지만, 창원·김해 지역처럼 과수 영농을 하는 농가가 많은 곳에서는 지금 새로운 농번기가 시작되는 셈입니다. 이때의 제철 음식으로는 국화전과 국화주를 꼽지만, 가을걷이에 바쁜 나날에 이런 호사를 누릴 이가 얼마나 될까 싶습니다.

   

죽산 비석거리

오늘 노정이 시작하는 죽산은 <여지도서> 경기도 죽산 형승에 '삼남으로 가는 중요한 길목으로, 서울을 지키는 군사 요충지다'라 한 데서 지리적 특성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 이와 같은 교통지리적 요충으로 인해 죽주산성을 쌓아 그 방비에 힘써 왔던 것입니다.

<대동지지>에는 이곳 죽산 비석거리의 북쪽으로 10리 지점에 있는 진촌(陣村)에서 길이 갈린다고 했고, 앞의 책과 짝을 이루는 <대동여지도>14-4에는 진리(陣里)에서 죽산에서 양지로 이르는 남북로와 음죽에서 양성으로 이르는 동서로가 교차하는 것으로 그렸습니다.

오늘은 예서 비석거리-분행역-진말-숫돌고개-원터(이원:梨院)를 거쳐 옛적에 장터로 유명했던 백암까지 걷습니다.

매산리 석불을 지나 죽주산성을 향해 가다보면 성 아래 길가에 여러 기의 빗돌이 모아져 있는데, 이곳이 <대동지지>에 비립거리(碑立巨里)로 나오는 비석거리입니다. 이곳에는 부사 심능석(沈能奭) 등의 선정을 기리기 위해 세운 8기의 빗돌이 있는데, 바로 이리로 옛길이 지났음을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들입니다.

   

죽주산성(竹州山城)

태평미륵이 있는 등 뒤의 비봉산(372m)에는 1688m 길이의 죽주산성(경기도 기념물 제69호)이 있습니다. 처음 이 성은 구릉의 정상 부위를 따라 쌓은 둘레 270여 m의 작은 테뫼식 성이었습니다만, 고려 때 외성을 쌓았고, 그 뒤 어느 때인가 서문지 아래에서 포루 사이를 잇는 중성을 쌓아 보기 드물게 세 겹으로 된 성입니다.

그렇지만 원래의 성벽이 온전히 남아 있는 것은 외성뿐이고 내성과 본성은 심하게 훼손되었습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당시의 전황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어 그 내용을 옮겨 봅니다. 죽산현 고적 죽주고성에 '고려 고종 13년(1226)에 송문주(宋文胄)가 죽주방호별감이 되었는데, 몽고가 죽주성에 이르러 항복을 권유하므로 성안의 사졸이 나가 쳐서 쫓았다.

몽고가 다시 포(砲)로 성의 사면을 공격하자 성문은 곧 무너졌다. 성안에서도 포를 가지고 마주 공격하자 몽고가 감히 가까이 오지 못하였다.

몽고는 또 사람의 기름을 준비하여 짚에 부어 불을 놓아 공격하므로 성안의 사졸이 일시에 문을 열고 돌격하니 몽고군의 죽은 자가 이루 셀 수가 없었다. 몽고는 여러 방법으로 공격하였으나 마침내 함락시키지 못하였다'고 했습니다.

이곳에 성이 두어진 까닭은 청주와 충주의 두 길이 만나 서울로 이르고, 서울에서 삼남으로 이르는 교통의 요충지이기 때문이며, 조선시대에도 이 지역의 전략적 중요성이 강조되어 성을 보수하였던 것입니다.

분행역(分行驛)

죽주산성 아래의 비석거리를 지나 북쪽으로 길을 잡아 나서면 휴게소를 지나 얕은 재를 넘어 매산리 분행 마을에 들게 되는데, 마을 이름은 고려 때부터 그 자리를 지키고 있던 분행역에서 비롯한 것입니다. 역의 이름은 고려의 명문장가 김황원(金黃元, 1045~1117)의 시에서 그리 읊었듯 길이 갈리는 곳이라 그런 이름이 붙은 것으로 보입니다. 분행역 옛터로 드는 분행 마을 들머리의 바위에는 조선 후기에 죽산부사를 지낸 최숙(崔숙)과 이형수(李馨秀)의 선정을 기리는 빗돌이 있어 옛길의 자취를 전해줍니다.

분행역은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현 북쪽 10리에 있다'고 했고, <여지도서>에는 '고을 동쪽 5리에 있다'고 나옵니다. 또한 앞 책에는 정지상(鄭知常, ?~1135) 이규보(李奎報, 1168~1241) 등 고려~조선 전기의 문장가들이 남긴 시가 전하는데, 분행을 나누어 가는 갈림길로 이해하고 있으며, 역의 이름을 딴 분행루(分行樓)와 청미천(옛 이름 북천(北川))으로 드는 용설천 가의 갈대와 길가에 버들이 늘어진 풍경을 그리고 있습니다.

분행역 옛터를 지난 길은 지금의 국도를 버리고, 죽산의 진산인 비봉산(飛鳳山: 372m) 북쪽 기스락을 따라 걷습니다. 예전에는 대로가 지난 관도지만 지금은 겨우 농로로 그 명맥을 어렵사리 이어가고 있을 뿐입니다. 매산리 관암을 지나 옥산리 아송에서는 얕은 재를 넘어 청미천 가로 내려와 한다리보를 건넙니다.

청미천은 <대동여지도>에 북천으로 나와 있는데, 죽산의 북쪽으로 흐르는 내라 그런 이름이 붙었을 것입니다. 보를 건너서 다다른 한다리는 구한말 지형도에는 반월리(半月里)로 나옵니다. 한다리를 지나 고안리 아곡에서 옛길은 17번 국도와 만나게 되어 대체로 이와 비슷한 선형을 따라 용인으로 이릅니다.

분행역이 있던 분행마을.

숫돌고개를 지나 백암에 들다

17번 국도의 백암면 들머리에는 '백옥쌀 순대의 고장 백암면입니다'라고 쓴 간판이 길손을 맞습니다. 예서 1.5km 정도를 걸으면 예전에 진(陣)이 있던 진말(진촌:陣村)에 듭니다.

숫돌고개는 진말에서 백봉리로 이르는 그리 높지 않은 재입니다.

백봉리에서 백암면 소재지까지는 들과 산기슭이 만나는 기스락을 따라 난 길을 따라 걷다가 원대교를 지나면 원이 있던 원터마을에 듭니다. 이곳은 그 거리와 방향을 따져 볼 때, <신증동국여지승람>에 '현 서북쪽 15리 지점에 있다'고 한 이원(梨院)으로 헤아려집니다. 원터를 지나 들을 질러 난 옛길을 따라 들면 바로 백암장(白巖場)이 있던 백암에 듭니다.

/최헌섭(두류문화연구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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