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의 재발견] 함안…굽힘없는 절개가와 아낌없는 사랑이 흐르는 곳

함안군 가야읍과 법수면에 펼쳐진 들판은 넓고 고르다. 누가 봐도 제법 넉넉한 농산물이 나는 땅임을 짐작할 수 있는 풍경이다. 그 풍요로움은 들판보다 조금만 높은 곳에 오르면 한눈에 담을 수 있다. 그래도 이 땅을 제대로 보려면 그 장소는 둑방길이어야 마땅하다. 둑이 없었다면 오늘날 반듯하게 잘 정돈된 논밭도 없다. 둑은 여기 기름진 땅을 낳은 어미 같은 존재다.

북쪽 경계선을 따라 동쪽으로 낙동강, 서쪽으로는 남강이 흐르는 함안은 땅이 낮다. 이 때문에 너른 들판은 늘 물난리를 피하지 못했다. 비가 좀 온다 싶으면 잠기는 땅에서 농사는 엄두조차 낼 수 없었다. 그저 가축이나 풀어놓고 키우기에 적당한 땅이었다. 하지만, 1930년대 들어 산인면에서 둑을 쌓기 시작한다. 쓸모없으리라 여겼던 땅은 물에 잠기지 않으니 제법 기름진 땅이었다. 가능성을 확인한 함안 사람들은 부지런히 둑을 쌓았다. 둑이 길어지는 만큼 논밭은 넓어졌다. 강과 나란히 구불구불 이어진 함안 둑방길은 그 길이가 338㎞에 이른다. 둑을 쌓아 만든 길로는 이 나라에서 가장 길다.

둑은 농지만 넓힌 게 아니었다. 한쪽에는 들판, 한쪽에는 강을 끼고 길게 이어진 평평한 길은 훌륭한 산책로였다. 둑방길은 예부터 여기 사람은 물론, 바깥사람도 가족 또는 연인과 함께 걸어봄 직한 길이었다. 또 둑과 강 사이 곳곳에 만들어진 벌은 사람에게는 보기 좋고 짐승에게는 살기 좋은 곳이 됐다. 아울러 여기 사람들은 밤에 둑방길에 올라 들판에 펼쳐진 은빛 비닐하우스 위로 달빛이 부딪히는 풍경을 상당한 볼거리로 친다. 다른 지역에서는 없는 산책로를 닦고 애써 이름을 붙이는 요즘, 함안군은 그런 수고를 하지 않아도 됐다. 게다가 둑방길은 '악양루 석양, 반구정 일출'이라는 절경까지 덤으로 안겼다. 남강과 둑방길을 훤히 내려다 볼 수 있는 악양루(대산면 서촌리), 낙동강과 남강이 만나는 지점 한쪽에 있는 반구정(대산면 장암리)에서 바라보는 풍경은 함안 사람들에게 큰 자랑거리다.

입곡저수지 수면에 하늘과 산이 거꾸로 비친 모습.물에 비친 새파란 하늘이 마치 산을 끼고 도는 길처럼 보인다.산인면 입곡리 입곡저수지. 둘레 약 4㎞, 만수면적 9359㎡, 수심 10m, 저수량 710만 톤에 이르는, 함안군에서 가장 큰 저수지다. 일제강점기인 1918년에 조성되었으며 1985년 1월 28일 군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남쪽이 높고 북쪽이 낮은 땅

함안 남쪽에는 여항산(744m)·서북산(739m)·광려산(720m)·봉화산(649m)·오봉산(525m)이 솟았다. 동쪽에는 작대산(648m)·천주산(640m)·무릉산(556m)이 있다. 함안에서 산세를 자랑할 만한 산은 서쪽에 있는 방어산(530m)을 빼면 대부분 남쪽과 동쪽에 몰려 있다. 이 때문에 남동쪽 고지대에서 비롯한 하천은 북쪽에 있는 낙동강과 남강을 향해 흐른다. 이 나라에서는 매우 보기 드문 지형이다. 그런데 자연 생김새로 그곳 사람들 성정을 미뤄 짐작했던 옛사람들 눈에는 이 같은 지형이 상당히 거슬렸던 듯하다. 물이 왕이 있는 북쪽을 향해 흐른다는 게 못마땅했던 것이다. 함안은 괜히 '역수의 고장'이라며 홀대받곤 했다. 역모나 배신은커녕 미련할 정도로 의리 있고 나라에 몸바쳤던 사람들이 많았던 이 땅이 감당하기에는 억울한 오해였다.

함안 전체면적(416.89㎢)에서 농경지(104.03㎢) 비율은 25% 정도다. 남강을 낀 군북면·법수면·대산면, 낙동강을 낀 칠서면·칠북면에 평야가 잘 발달했다. 너른 들판에서는 쌀·보리를 비롯해 채소·특용작물·과일 재배가 활발하다. 특히 군북면 '월촌수박'과 함안면 '파수곶감'은 예부터 함안 이름을 널리 알린 특산물이다. 군북면에는 함안수박전시관이, 함안면에는 파수곶감단지가 있다.

함안에 공단이 본격적으로 조성된 것은 1990년대 들어서다. 함안은 큰 도시와 가깝고 지대가 낮으며 교통이 편리한데다 물이 풍부했다. 공단이 들어서기에는 괜찮은 조건이었다. 1988년 군북농공단지를 시작으로 1991년 파수·법수·산인농공단지가 잇달아 조성됐다. 이어 2006년 황사·모로농공단지, 2007년 가야농공단지, 2009년 칠원용산농공단지가 준공됐다. 현재 칠서·함안일반산업단지가 조성 중이며 10개 공단에 등록된 업체는 200개를 웃돈다. 잘 발달된 농업과 큰 도시 옆에 들어선 공단 덕에 함안은 경남 내 군단위 지역에서 인구가 가장 많다.

-제대로 갖춰 출토된 말 갑옷

1992년 6월 6일 신문배달을 하던 학생 이병춘은 가야읍 해동아파트 공사 현장을 지나고 있었다. 그런데 우연히 굴착기가 파낸 흙더미 사이에서 예사롭지 않은 쇳조각을 발견한다. 그는 지국장 안승모에게 본 것을 그대로 전했다. 창원대 사학과 출신인 안승모는 근처 성산산성에서 발굴조사를 하던 창원문화재연구소 연구사 박종익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박종익은 굴착기가 다시 작업을 시작하려는 순간 공사 현장에 도착한다. 그리고 공사 중지를 요청하고 나서 흩어진 쇠를 모았다. 가야시대 온전한 말 갑옷이 이 나라에서 처음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이었다. 박종익은 현장에서 말 몸통 좌우를 감싸는 갑옷과 함께 말 얼굴을 감싸는 마면주(馬面胄)까지 찾아낸다. 이후 2007년 경주에서 말 갑옷이 발견되기까지 함안에서 나온 말 갑옷은 국내 최초, 하나뿐인 가야시대 것이었다. 1500년 세월을 건너뛴 유물은 화려했던 가야 철기문화를 증명했다. 더불어 함안은 아라가야 본거지가 이 땅임을 다시 확인할 수 있었다.

가야읍에 있는 함안군청 옆으로 나지막한 언덕길을 조금만 올라가면 봉긋 솟은 무덤 수십 기가 줄지어 섰다. 사적 제515호 '말이산고분군'이다. 함안군이 번호를 붙인 대형 봉분만 37기이며, 발굴조사로 밝혀진 무덤이 133기다. 함안군은 발굴되지 않은 무덤까지 더하면 그 수가 1000여 기는 될 것으로 어림잡는다. 무덤에서는 말 갑옷을 비롯해 칼, 철정 등이 발굴된다. 철정은 말 갑옷이나 칼을 만들고자 뭉쳐놓은 쇳덩이로 화폐 역할을 했던 물건이다. 모두 아라가야 사람들이 철을 능숙하게 다뤘음을 뒷받침하는 흔적이다.

철기와 더불어 아라가야 문화를 상징하는 물건은 토기다. 아라가야 사람들은 흙을 짓이겨 모양을 만들고 가마에 구워 토기를 만들었다. 가야읍 묘사리와 법수면 일대 가마 유적은 그 시대 활발했던 토기 생산 흔적이다. 말이산고분군에서도 그릇받침과 뚜껑, 항아리, 굽다리접시 등 다양한 토기가 나왔다. 이 가운데 아라가야를 대표하는 토기로는 '불꽃무늬토기'를 꼽는다. 원에 삼각형 고깔을 씌운 듯한 무늬를 새긴 그릇이다. 가야읍에 있는 함안박물관 입구에 선 큰 구조물에 낸 창 모양이 바로 토기에 새겨진 '불꽃무늬'다. 2003년 개관한 함안박물관은 각종 토기와 철기 유물 150여 점을 전시하고 있다. 아직은 드러난 것보다 숨겨진 게 훨씬 많은 아라가야 흔적이다.

-'역수의 고장'에 살았던 심지 굳은 사람들

산인면 장내마을에 들어서면 큰 원을 그리며 둘러쳐진 담을 만난다. 담 안에는 옛 가옥 몇 채가 옹기종기 모여 있고 한쪽에는 작물을 키우는 땅도 있다. 마을 입구 표지석에는 '고려동'이라고 적혀 있다. 조선왕조 500년 동안 조선 백성이기를 거부했던 사람들이 살았던 곳이다. 고려 후기 성균관 진사 이오(李午)는 조선왕조가 들어서자 고려에 대한 충절을 지키기로 하고 이곳에 거처를 정한다. 이오는 담장을 쌓고 고려 유민 거주지임을 뜻하는 '고려동학'이라는 비석을 세워 자급자족했다. 담 밖은 조선 땅이되 담 안은 고려 땅임을 못박은 것이다.

산인면 장내마을의 고려동. 고려 후기 성균관 진사 이오(李午)가 만든 곳이다. 그를 포함해 고려에 대한 충절을 지키기로 한 사람들이 조선왕조가 들어서자 이후 600년 동안 자급자족하며 모여살았다. 사진의 다리는 마을 입구의 고려교.

이오는 후손에게도 벼슬을 하지 말 것과 자신이 죽고 나서 신주를 다른 곳으로 옮기지 말 것을 당부했다. 후손들은 그 뜻을 받들어 600여 년 동안 이곳을 떠나지 않았다고 한다.

두 임금을 모시지 않는다는 절개는 조선 전기 문신 조려(1420~1489)에게 이어진다. 생육신 중 한 사람인 조려는 1455년 수양대군이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를 빼앗자 평생 숨어 지낸다. 조려는 함안에서 강원도 영월을 종종 찾아가 단종에게 문안을 올렸다고 한다. 또 단종이 죽자 그 시신을 거둬 장례를 치르고 나서 동학사에 모셨다. 군북면에는 조려가 태어난 '어계생가'가 있다. 또 군북면 원북리에는 조려를 비롯해 이맹전, 원호, 김시습, 성담수, 남효온 등 생육신 6명을 모신 '서산서원'이 있다.

군북면 원북리 서산서원. 수양대군이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를 빼앗자 이에 항거해 관직을 버리고 고향 함안으로 돌아와 평생 숨어지냈다는 조선 전기 문신 조려의 위패가 모셔진 곳. 그를 포함해 생육신 6명의 위패가 봉안돼 있다.

함안에서 내세우는 임진왜란 최초 의병에 대한 기록도 지나칠 수 없겠다. 1592년 4월 14일 부산에 상륙한 왜구가 동래성을 점령하고 김해까지 진출했다는 소식은 가야읍 검암까지 들려온다. 이 소식을 들은 이령은 의병 100여 명을 이끌고 4월 18일 김해에 도착한다. 이령은 이틀 동안 밀려드는 왜구에 맞섰다. 하지만, 수에 밀려 결국 전사하고 만다. 이후 곽재우가 의령에서 의병을 일으킨 게 4월 22일이다.

이 같은 결기는 일제강점기 때도 드러난다. 1919년 3월 9일 칠북면 연개장터에서 대규모 만세운동이 일어난다. 경남에서 처음 일어난 3·1 만세운동이다. 이를 시작으로 12일 대산 평림의거, 18일 칠서 이룡리의거, 19일 함안읍의거, 20일 군북의거, 23일 칠원의거 등 함안에서는 34일 동안 10회에 걸쳐 의거가 이어진다. 시위에 참여한 인원은 1만 2000여 명에 이른다. 함안에서 의거로 형을 받아 마산형무소에서 복역한 이는 기록에 남은 것만 97명이다. 당시 마산형무소가 담당했던 지역에서 잡혀들어온 이들을 지역별로 보면 마산 42명, 창원 41명, 통영 23명, 창녕 23명이다. '마산형무소는 함안 사람의 재실'이라는 말은 그렇게 나왔다.

물이 남에서 북으로 흘러 '역수의 고장'이라는 달갑지 않은 이름을 얻은 곳. 하지만, 함안 역사를 조금만 훑어 보면 배신·반역은 이곳 사람들 성정과는 매우 동떨어진 것임을 알 수 있다. 오히려 의리와 절개가 있는 인물을 받들고, 나라가 위급하면 먼저 나섰던 심지 굳은 사람들이 살았던 곳이 함안이다.

-바라보면 욕이 나왔던 산

함안을 대표하는 산은 여항산(770m)이다. 지금은 낙남정맥 최고봉을 내세우며 등산객을 부르는 명소지만, 한국전쟁 당시 여항산 일대는 가장 치열했던 전쟁터였다. 하루에도 몇 차례 주인이 바뀌었다는 이곳은 당시 마산을 지키는 최후 방어선이기도 했다.

1950년 8월 마산을 둘러싸고 파상공세를 퍼부은 부대는 인민군 6사단이었다. 이에 미 제25사단은 여항산·필봉·서북산·야우산·옥녀봉을 잇는 능선에 진지를 세워 맞선다. 미군 25사단과 인민군 6사단은 몇 차례 전투를 벌인다. 산에서 버티는 인민군도 산을 되찾으려는 미군도 모두 처절했다. 전투는 적과 아군이 구분 없는 소모전이었다.

8월 18일 인민군 6사단은 대대적인 공격을 펼친다. 사흘 동안 이어진 전투에서 미군과 인민군은 19차례나 고지를 뺏고 뺏기는 백병전을 펼친다. 9월 중순까지 이어진 전투에서 입은 피해는 미군과 인민군 가릴 것 없이 막대했다. 오죽하면 여항산 탈환에 지친 미군은 산을 가리켜 '갓 뎀(God deme)'이라고 내뱉기 일쑤였다. 여항산을 부르는 다른 이름인 '갓데미산'은 이렇게 나왔다. 이후 군인은 물론 경찰까지 동원한 총력전으로 미군과 국군은 인민군이 마산으로 진입하는 것을 막아낸다.

하지만, 치열한 전투는 더 큰 비극을 낳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1950년 7월부터 함안 일대에서 미군 폭격과 경찰, 지방경비대가 벌인 민간인 학살은 이곳 사람들에게 깊은 상처를 남겼다. 지난 2005년 '한국전쟁전후 민간인학살 진상규명 범국민위원회'가 엮은 〈한국전쟁전후 민간인학살 실태보고서〉를 보면 함안 지역에서 벌어진 민간인 학살 사건은 9건, 희생자는 수백 명에 이른다.

-아래로 아래로 끝없는 사랑

칠원면 구성리 칠원교회. 아들 동인·동신 형제를 죽인 이를 양자로 삼고 전쟁중에서도 한센인을 보살피며 헌신하다 순교한 목사 손양원씨가 어린 시절 다닌 교회. 그의 아버지 손종일 씨가 초대 장로였다. '순교자 기념교회'로 지정된 칠원교회는 올해 설립 106주년이 됐다.

목사 손양원(1902~1950). 자식을 살해한 이를 양자로 삼은 사람, 전쟁 중 돌보던 한센인을 두고 떠나지 못해 결국 죽음을 맞은 사람. 사람이지만 감히 사람이 닮을 수 없는 삶, '성자'라는 호칭도 아쉬움이 남는다는 그는 칠원면 사람이다.

칠원교회 초대 장로였던 아버지 손종일(1871~1945)을 따라 교회에 다닌 손양원은 1917년 세례를 받는다. 1923년 도쿄 스가모중학교, 1925년 경남성경학원을 졸업했으며 부산 나병원(상애원) 전도사로 부임해 한센병 환자를 돌본다. 1938년 평양장로신학교를 졸업한 손양원은 이듬해 7월 한센병 환자들 쉼터인 여수 애양원에 들어간다. 그러나 1940년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우상 숭배를 비판하다 교도소에 갇혀 1945년 해방 직후 석방된다. 1946년 경남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은 그는 애양원에서 한센인을 위해 헌신한다.

1948년 10월 손양원은 목회자이기 전에 아버지로서 가장 비극적인 날을 맞이한다. '여순사건'이 일어난 날 아들 동인·동신 형제를 잃은 것이다. 슬픔에 몸부림치던 손양원은 결국 응징이 아닌 용서를 택한다. 아들을 죽인 이를 사형 직전 구해내 양자로 삼은 것이다. 이후에도 한센인을 위한 헌신은 계속 이어진다. 하지만, 이 같은 헌신이 낳은 결과는 안타까운 순교였다. 1950년 6·25 전쟁이 일어나자 여수도 곧 인민군에게 점령당한다. 하지만, 손양원은 끝까지 피란 행렬에 동참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억지로 피란선에 태웠는데도 그는 '양떼(한센인)를 두고 떠날 수 없다'며 다시 애양원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9월 28일 인민군에게 잡혀 사형당한다. 그가 어린 시절 다녔던 칠원교회는 올해 설립 106년째를 맞았다.

   

함안을 대표하는 역사적 인물로는 조선시대 성리학자 주세붕과 고려 때 무신 이방실을 꼽는다.

조선시대 성리학자인 주세붕(1495~1554)은 칠원면에서 태어났다. 1522년(중종 17년) 생원시와 별시문과에 급제, 관직생활을 시작해 홍문관직제학·도승지·호조참판 등을 역임했다. 1543년 풍기군수로 있으면서 우리나라 최초 서원인 '백운동 서원'(경북 영주시 순흥면)을 세운다. 칠서면에는 주세붕 묘역이 조성돼 있다.

여항면에서 태어난 고려말 무신 이방실(1298~1362)은 함안이씨 시조다. 고려말 나라를 괴롭혔던 홍건적을 격퇴하며 이름을 드높인다. 1361년 홍건적 20만 명이 압록강을 건너자 이방실이 이끌던 고려군은 개경을 빼앗긴다. 그러나 이듬해 이방실은 최영·이성계 등과 함께 개경을 되찾고 홍건적을 압록강 밖으로 몰아낸다. 그 공적으로 공민왕에게 신임을 받으나 이를 시기한 이들에게 피살된다.

더불어 세계에서 주목하는 서양화가 이우환(1936~ )도 함안 군북면 출신이다. 이우환은 지난 2011년 백남준·차이궈창(중국)에 이어 아시아 작가로는 세 번째로 미국 구겐하임미술관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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