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맛집] 거제시 장승포동 '할매함흥냉면'

'대한민국의 이름난 냉면집에서 쓰는 육수는 대부분 조미료국이다.' 지난 8월 종편 '채널A' <먹거리 X파일>은 냉면에 관한 충격적인 사실을 보도했다.

내용인즉, 시중에서 파는 냉면집 육수는 대부분 조미료로 만들어진다는 것. 방송은 전국 각지 유명한 냉면 육수 비법 전수자들을 만났다. 이들을 만나 알아본 결과 쇠고기 다시다 1만원짜리 한 봉지와 설탕 1㎏, 식초 한 바가지면 냉면 육수 55인분이 제조된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이를 본 많은 사람은 '희대의 음식 사기'라며 분노를 감추지 못했다.

이렇게 만들어진 육수는 대부분 새콤달콤한 맛을 낸다. 냉면은 본디 북한에서 유행한 음식인데, 북한에서는 냉면 육수를 동치미 국물로 만든다는 정보가 나돌면서 이와 비슷한 맛을 내려했기 때문으로 추측된다. 화학조미료라는 것이 인간이 본원적으로 갈구하는 단맛을 강조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면 반죽, 삶기, 고명 수육 토렴하기 등은 주문이 들어옴과 동시에 이뤄진다.

냉면에 대한 불안이 가중되는 요즘, 걱정을 버리고 안심하고 먹을 수 있는 냉면집이 있다. 거제시 장승포동 신부시장 뒤편 '할매함흥냉면'. 이집은 삼대가 35년 세월을 이어 온 손맛으로 유명하다. 현재 사장인 이승표 씨는 지난 1995년부터 지금까지 18년째 가게를 운영하고 있다.

함경남도 함흥 출신인 이승표 사장 할머니는 한국전쟁 당시 흥남철수작전 때 피란선을 타고 내려 와 장승포에 정착했다. 이후 몇몇 식당과 하숙 등으로 생계를 이어오다 35년 전부터 본격적으로 냉면을 팔기 시작했다. 이때 손맛이 며느리와 손자를 거쳐 지금껏 이어져 오는 것이다.

함흥식과 평양식 모두 하는데, 전문으로 하는 것은 함흥식이다. 맛을 낼 때는 할머니 때부터 전해 내려오는 전통방식을 고집한다.

먼저 함흥냉면. 함흥냉면의 생명이랄 수 있는 면은 고구마전분과 메밀을 9대 1 비율로 섞은 것을 사용한다. 본래 냉면 면발의 정석으로 여겨지는 '메밀' 비율이 적은 것은 쫄깃한 맛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메밀면이 향과 맛이 좋은 것은 맞습니다. 하지만, 경상도 입맛에는 '냉면' 하면 좀 질긴 듯하면서 쫄깃한 식감이 더 어울린다고 생각했습니다. 손님들도 더 원하고요. 이 때문에 쫄깃한 식감을 내는 고구마전분을 많이 씁니다."

양념장은 경북 영양에서 생산한 고춧가루와 생강, 마늘, 양파 등 10여 가지 재료를 갈아 만든다. 함흥냉면에 함께 올려지는 가오리무침 역시 할머니가 만들던 방식 그대로 매일 무쳐내 투박하면서도 신선한 맛이 특징이다.

   

선명하게 붉은 양념장은 보기만 해도 입에 침이 한 가득 고이게 만든다. 함흥냉면 하면 떠오르는 매콤·새콤·달콤한 자극적인 맛이 나지 않는다. 대신 입안에 매운향이 은은하게 퍼지면서 감칠맛이 도는 게 매력이다. 약간 심심하다고 느껴지는데, 이때는 양념장을 더 얹은 후 식초를 약간 치면 맛이 산다. 매운 것을 잘 못 먹는 사람은 함께 나오는 냉육수를 조금 부어 비비면 은은한 맛을 즐길 수 있다.

디음 평양냉면. 평양냉면의 생명인 육수는 한우 사골과 호주산 양지·사태 등 정육과 각종 야채 그리고 팔각, 계피, 감초 등 10여 가지 한약재를 넣고 달여낸다. 하루 장사가 끝난 저녁시간에 불을 올린 후 다음날 아침까지 12시간 이상 푹 고아야 완성된다. 육수를 뽑는 커다란 들통이 식당 입구에 자리 잡고 있는데, 덕분에 제조 과정을 눈으로 직접 볼 수 있어 믿음이 간다.

식혀 얼린 냉면 육수에 면을 넣은 후 비법 맛간장을 한숟갈 넣은 다음 파를 송송 썰어 올려 손님상에 낸다. 얼음을 넣은 게 아니라 육수 자체를 얼려 시원함이 뼛속까지 전달된다. 사실 평소 일반음식점에서 파는 냉면에 길들여진 사람이라면 싱겁다고 느낄 수 있다.

하지만 육수가 가진 차가움 속에서도 입안 가득 배어나는 고기 국물 특유의 구수함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이 평양냉면을 제대로 먹을 줄 안다는 것이 이승표 사장 지론이다.

깊은 맛을 더 느끼고 싶다면 냉면과 함께 내는 온육수를 음미하면 된다. 따뜻한 육수는 고기 국물 특유의 구수하면서도 시원한 맛이 일품이다. 전날 먹은 술로 숙취에 시달리는 주당 단골 가운데는 냉면을 시켜놓고 육수만 다섯 주전자씩 먹고 가는 사람도 있단다.

"온육수를 차갑게 식힌 것이 곧 냉면 육수인데, 식히는 과정에서 구수한 향이 감소되기 때문에 온전히 맛을 느낄 수 없는 것입니다. 냉면 육수를 다시 끓이면 온육수의 구수함이 되살아나지요."

할매함흥냉면이 믿고 먹을 수 있는 냉면집이라는 사실을 알려주는 또 하나는 바로 메뉴에 '수육'이 있다는 점이다. 수육으로 낼 만큼 많은 고기가 육수를 만드는 데 쓰인다는 방증이다. 수육은 질 좋은 고기가 아니면 맛이 제대로 나지 않기에 더더욱 그렇다.

육수를 낼 때 쓴 양지와 사태를 꺼내 식혀뒀다가 주문이 들어오면 뜨거운 육수에 토렴을 한 뒤 내놓는 수육.

수육은 육수를 낼 때 쓴 양지와 사태를 꺼내 식혀뒀다가 주문이 들어오면 뜨거운 육수에 토렴을 한 뒤 내놓는다. 삶아 낸 시간이 길다 보니 조금 질긴 것이 흠이지만, 한약재 향이 그윽하게 배어 맛을 돋운다.

이들 냉면을 만드는 과정(반죽, 면 뽑아 삶기, 고명 수육 토렴하기 등) 모두 주문이 들어옴과 동시에 이뤄지는 것도 특징이다.

또 한가지 특별한 점은 할매함흥냉면 건물이 일제강점기에 들어선 '근대건축물'이라는 점이다. 지난 2004년 경상남도에서 발간한 <근대 문화유산 목록화 사업보고서>에 1920년 말 병원으로 사용된 것으로 기록돼 있다. 건물 2층 홀은 일본식 다다미가 그대로 재현돼 있을 만큼 사료적·역사교육적 가치도 매우 큰 건물이다. 이러한 근대건축물을 방치하지 않고 현재까지 사용한다는 것도 의미 있다.

고춧가루와 생강, 마늘 등 10여 가지 재료를 갈아 만든 양념장에 신선한 가오리 무침을 올린 함흥냉면(왼쪽)과 식혀 얼린 냉면 육수에 면을 넣은 후 파를 송송 썰어 올린 평양냉면.

"어쩌면 할머니가 주신 큰 선물이죠.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서도 먹고 살 길을 열어주셨으니까요. 여기서 돈을 벌어서 아들 자식 둘 모두 서울대에 보냈습니다. 큰 애는 지난 2010년 대학 3학년때 사법시험에 합격해 이번에 졸업한 후 사법연수원에 가 있습니다. 이 역시 억척스럽게 맛을 지키고 이어 온 할머니 덕분입니다. 이 선물을 잘 지키고 또 가꿔나가야죠. 허허."

안타깝게도 할매함흥냉면은 오래된 건물 탓에 난방이 어려워 매년 10월 중순부터 3월까지 휴식기를 가진단다. 생각이 있다면 가까운 시일 내에 맛을 보는 것이 좋을 듯 싶다.

   

<메뉴 및 위치>

□메뉴: △함흥냉면 곱빼기 8500원 보통 7000원 △평양냉면 곱빼기 8500원 보통 7000원 △수육 2만 5000원 △가오리 회무침 2만 5000원 △사리 4000원.

□위치 : 거제시 장승포동 신부시장 뒤편, 055-681-2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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