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상에서 온몸으로 말기 암과 싸우는 친구는 처절했다. 복수가 찬 배는 둥글게 부풀어 오르고 손바닥은 이유도 알 수 없이 보랏빛으로 변해 있었다. 산소 호흡기에 의지해 가쁜 숨을 몰아쉬는 친구에게 내가 해 줄 수 있는 것은 기도뿐이었다.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그 외롭고 고단한 투병은 이제 막바지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여분의 삶과 아직도 다하지 않은 고통, 그리고 가까이에서 언뜻 언뜻 그림자를 드리우는 죽음조차 오롯이 친구 혼자 감당해야 할 힘들고 외로운 길이었다.

친구는 숨쉬기가 힘들어서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다. 곁에서 멀쩡한 모습으로 위로를 건넨다 한들 무슨 위안이 되겠는가. 죽음 앞에서는 모든 평범한 것이 절대적으로 빛을 발한다. 늘어가는 뱃살을 걱정하고, 여전히 오르지 않는 남편의 월급과 오늘 저녁 모임에 들고 나갈 가방을 고민하는, 내가 살아가는 일상의 그저 그런 삶이 너무나 사치스럽게 느껴진다. 그저 살아 있다는 것, 그저 내일도 오늘처럼 살 수 있다는 것이 찬란한 축복이 된다.

죽음은 소멸이다. 그가 살아온 전 생애는 한 순간에 빛을 잃고 기억도 소멸된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 그 소멸이 사라진 존재를 더욱 선명하게 부각시킨다.

그는 나의 고향 친구이다. 어린 시절 작은 시골 초등학교에서 6년간 한 교실에서 공부하며 함께 자랐다. 한동안 소식이 끊어졌다가 어른이 된 어느 날 다시 만났을 때, 그는 초등학교 시절 내가 자기에게 시험 답을 가르쳐 주었다고 기억하고 있었다. 요즘 말로 '커닝'을 한 셈이다. 그 결과로 그 아이는 성적이 수직 상승했고 입학 후 처음으로 아빠께 칭찬을 들었노라고 했다.

커닝의 대가로 그날 친구는 내게 진하게 술을 한 잔 샀다. 나는 전혀 기억조차 못하는 일을 그토록 오랜 세월이 지난 뒤에도 고마운 기억으로 간직하고 있었다. 그 친구에게 뭔가 해 준 것이 있어서, 기억 속에 늘 고맙게 남아 있을 수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친구는 사경을 헤매는데 나는 마음의 빚을 헤아린다. 삶과 죽음이 엇갈리는 순간이다.

친구의 손에 적은 돈이 담긴 봉투 하나를 내밀면서 "얼른 나아서 맛있는 것 사 먹어" 공허한 인사를 건넨다. 그 애도 나도 이제 이런 날이 남아 있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 밥 한 술 시원하게 삼키고, 남편과 부부 싸움도 하고, 오르지 않는 아이의 성적 때문에 속상해 하는 그런 평범한 날이 다시는 오지 않으리라.

   

죽음의 그림자 앞에서 삶은 더욱 명징해진다. 왜 더 많이 행복하고 기뻐하며 살지 못했던가. 왜 주어진 것에 대한 감사보다 갖지 못한 것에 대한 결핍으로 그렇게 괴로워했나. 왜 내 곁에 있는 소중한 것을 발견하지 못하고 먼 곳에서 손에 잡히지도 않는 그 무지개에 현혹되어 살았던가. 그렇게 많은 실수를 저지르고도 왜 이 평범한 진리를 깨닫지 못했던가. 왜 우리는….

/윤은주(수필가·한국 독서교육개발원 전임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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