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직에는 대립하는 사람들이 있게 마련이다. 개성이 다르고 의론이 맞지 않으면 조정자도 골머리를 앓기 십상이다. 신상필벌의 원칙에 의거, 촉한의 조야(朝野)를 일신시킨 제갈공명도 예외일 수는 없었다. 대군을 이끌고 위나라 정벌에 나섰던 공명은 항상 위연(魏延)을 선봉으로 내세웠으며, 양의(楊儀)를 군수품 조달의 책임자로 데리고 다녔다.



위연은 장사(長沙)에서 유비진영에 합류한 이래 뛰어난 무용과 지략으로 북벌군 진영에서 제 몫을 톡톡히 해냈다. 공명은 인간적으로 위연을 신뢰하지 않았지만 그 용맹을 높이 평가하면서 수족처럼 여겼다. 양의는 계획을 짜서 부대를 편성하고 군량미를 계산하는데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으며, 일처리가 매끄러워 공명으로부터 전폭적인 아낌을 받았다.



촉군 진영의 대들보인 두 사람은 그러나 사사건건 대립했다. 위연은 군수참모에 불과한 양의가 촉한의 대장인 자신을 업신 여긴다며 매양 잡아먹을 듯이 양의를 비난했다. 양의는 양의대로 위연을 칼 든 무사로 평가절하 하면서 자신의 재략을 존중하지 않는데 대해 불만을 품고 이를 갈았다. 두 사람에게 의지하고 있던 공명은 항상 두 사람이 사이좋게 지내지 못하는 것을 한스러워 하면서 어느 한쪽으로 치우쳐 다른 한 쪽을 버리는 일을 하지 못했다.



죽을 때까지 대립관계를 청산하지 못한 두 사람에게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것은 오만과 시기다. 위연은 사졸을 잘 양성하고 뭇 사람들을 뛰어넘는 용맹을 지니고 있었으나 성격이 오만하기 그지 없었다. 특히 자신을 따르지 않는 사람들을 매양 비난했기 때문에 당시 촉한 사람들은 대부분 그를 꺼렸다. 위연은 심지어‘자오곡(子午谷)을 통한 전격전’을 공명이 받아들이지 않자 공명을 공공연히 겁쟁이라고 비난하면서 자신의 재능이 십분 발휘되지 않음을 한탄했다. 양의 또한 공명의 장하(帳下)에서 자신과 견줄만한 사람이 없다고 여기고, 묵묵히 일하는 다른 사람들이 공을 세우는 일이 생기면 시기와 질투를 그치지 않았다. 그래서 공명은 양의가 가진 실력에도 불구하고 그를 후계자로 삼는 것을 포기했다.



길고 긴 대립이 두 사람에게 가져다 준 상처는 깊었다. 공명이 죽으면서 뒤처리를 양의에게 부탁하자 이에 불복한 위연은 양의를 공격했다. 그러나 이러한 행위가 공명의 유지(遺志)에 반하는 일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병사들이 위연의 곁을 떠나자 결국 양의가 보낸 추격병에 의해 주살당했다. 촉한의 대장으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위연으로서는 어처구니 없는 죽음이었다. 양의는 위연의 머리가 도착하자 발로 밟아 지근대면서 “평범하고 보잘것 없는 놈아. 또다시 나쁜 일을 할 수 있겠느냐”고 분풀이를 한 뒤 위연의 삼족을 멸했다.



한편 양의는 ‘위연의 난’이 평정된 뒤 당연히 자신이 공명의 뒤를 이을 것으로 생각하다 장완에게 밀려 한직으로 떨어지자 불평과 불만을 거두지 않았다. 심지어 “이럴 줄 알았으며 군대를 이끌고 위나라에 항복하는 것이 좋을뻔 했다”는 극언을 서슴지 않다 조정으로부터 체포령이 떨어지자 자살했다.



시대는 인걸을 낳고 인걸은 공명을 이룬다고 했다. 그러나 인걸로 평가받은 두 사람은 비극적인 결말을 맞았다. 게다가 그 비극을 후손들에게까지 안기는 우를 범했다. 가뜩이나 약소국인 촉한의 국력을 한 단계 떨어뜨린 그들의 대립에 대해 진수는 다른 수식어가 필요없는 멋진 평론을 붙여놓았다. “그들이 초래한 재앙과 허물은 그들 자신으로부터 나오지 않은 것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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