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영로 옛길을 되살린다] (29) 경기도 이천~안성 죽산

한가위 잘 보내셨는지요. 이즈음, 낮이 짧아지기 시작하는 추분을 지나 이슬이 얼기도 한다는 한로(寒露)가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들녘은 황금빛 물결로 덮였고, 감·사과 따위 제철 과일이 하루가 다르게 익어 가는 완연한 가을입니다. 지난 여정을 마친 충청도 땅 경계에서 오늘 여정이 미칠 경기도 죽산 매산 삼거리까지의 옛길은 지금의 지방도가 덮어쓰고 있습니다.

경기 땅에 들다

석원(石院 돌원·도란)을 지나 죽산으로 길을 잡아 가면, 경기도 이천시 율면 석산리 석교촌(石橋村)에 듭니다. 이곳은 옛적 음죽현감이 만든 돌다리가 있던 마을인데, 1990년대 중반에 318번 지방도를 건설하면서 없앴다고 합니다.

옛길은 청미천의 지류를 건너 충북 음성군 생극면 용대리를 지나 경기도 이천시 율면 산양리 방축말에 들면서 충청도를 벗어나게 됩니다. 이제 경기(京畿) 땅에 들었으니 종점이 멀지 않음을 알게 됩니다.

이천시와 안성시의 경계에 있는 용산동은 <대동지지>에 용산등(龍山嶝)으로 나오는 곳입니다. 예서 안성시와의 얕은 재는 두 시의 경계를 가르는 지경고개인데, 고개의 서쪽 마이산에는 망이산성과 망이산봉수가 있습니다.

망이산성과 망이산봉수

지금 마이산(馬耳山, 472m)으로 불리는 망이산(望夷山)은 정상 부위의 내성과 북쪽 봉우리들의 마루를 따라 긴네모꼴로 쌓은 둘레 2080m의 외성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내성은 백제시대에 흙으로 쌓은 것으로 그 둘레는 250m정도입니다만, 성 안에서 고구려 계통의 기왓장이 다수 출토되는 것으로 보아 고구려 산성으로 헤아리기도 합니다. 그것은 가까운 죽산이 고구려의 개차산군(皆次山郡)이었던 점에서도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라 여겨집니다.

정상에 서면, 서쪽을 제외한 북·동·남쪽 일대가 한 눈에 조망됩니다. 절벽으로 된 남쪽은 험준한 편이지만 북쪽으로는 낮은 구릉과 그 너머로 평원이 넓게 펼쳐져 있습니다.

이런 입지를 볼 때 성은 남쪽의 적을 대비하여 쌓은 것으로 보입니다. 북쪽으로 저평한 구릉을 잇는 마루금을 따라 쌓은 외성은 통일신라시대 후기에 쌓은 것이며, 고려 광종 때에 크게 고쳐 쌓아 남부지방을 관할하는 전진기지 구실을 하였습니다. 하지만 조선시대 이래의 지지에 이 성에 대한 기록이 나타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이미 그 전에 성으로서의 쓰임이 다한 것으로 보입니다.

정상에 있는 망이산봉수는 <세종실록지리지> 충청도 충주목 봉수에 처음 나옵니다. '망이산(望伊山) 봉수는 동쪽으로 음성 가섭산에, 서쪽으로 죽산(竹山) 검단산(儉丹山)에 응한다.'고 돼 있습니다. 그런데 이 책의 다른 군현에는 그 이름을 망이성(望夷城) 봉수라 했습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충주목 봉수에는 '망이성(望夷城) 봉수는 동쪽으로 음성현 가섭산(迦葉山)에 응하고, 남쪽으로 진천현 소을산(所乙山)에 응하고, 서쪽으로 경기 죽산현 건지산(巾之山)에 응한다'고 나온 것이 그 예입니다. 이곳 망이산 봉수는 동래에서 출발하는 제2거의 직봉(直烽)과 계립령과 추풍령을 넘어오는 간봉(間烽)이 만나는 결절지점으로, 안성·용인·광주를 거쳐 서울의 목멱산 봉수로 전달합니다.

너본바위 가는 길

이곳에서 산성과 봉수를 살피고 고개를 내려서면 쉼터가 나타납니다. 서둘러 길을 나서느라 아침을 챙기지 못했는데, 이즈음에 이르니 허기를 참기 어려울 지경입니다. 마침 길가에 내다 놓고 파는 과전에 들러 과일을 구하려 하자 마음씨 좋은 주인장은 상품 가치를 잃은 복숭아를 가득 내놓고 그저 먹으라고 권합니다. 아마 우리 행색이 동정심을 불러일으켰나 봅니다.

주린 배를 채우고 다시 길을 잡아 나섰는데, 얼마지 않아 부르는 소리에 돌아보니 그새 주인장이 이곳의 특산품인 포도를 봉지 가득 담아서 가다가 먹으라고 쥐여줍니다. 눈물 나게 고마운 인심에 감사하며 힘차게 길을 잡아 나서니, 화봉리 판교마을 입구의 간판에 적힌 포도마을이 예사롭지 않게 보입니다. 이곳의 포도는 유기(鍮器)와 함께 안성을 대표하는 특산품입니다.

이천시와 안성시 경계에 있는 용산동에서 너본바위(광암) 가는 길. /최헌섭

안성 포도는 1901년 프랑스 외방선교회의 공베르 신부(Gombert Antoine)가 구포동 성당 구내에 마스캇 함부르그 등 유럽계 종자를 심은 데서 비롯했으며, 본격적인 대량 재배는 1925년부터로 알려져 있습니다. 포도가 유명한 화봉리는 <대동지지>에 광암(廣巖)으로 나오는 마을로 이곳에서는 너본바위라 부릅니다. 구체적으로는 지금의 화봉리 광천마을을 이르는데, 지금의 318번 지방도가 지나는 화봉사거리 남쪽마을입니다. 앞 책에서는 오늘 출발한 용산등에서 이곳까지의 거리를 10리라 했습니다.

구제역의 살풍경

장암리는 '갈솔미' 또는 '가루살미'라 하는데, 이 마을에는 김유희(金有凞)의 효자정문(1885년 명정)과 어머니 여양 진씨의 효부정문(1871년 명정)이 나란히 모셔져 있습니다. 원래는 이천 설성면 송계리 팔계마을에 있던 것을 1978년에 지금의 자리로 옮겨왔다고 하니, 이러한 정려문을 길의 잣대로 삼으려면 이런 내력을 잘 살펴야 하겠습니다. 장암리는 축산업으로 유명한 곳입니다.

하지만 지난 2011년 온 나라를 공포로 몰아넣은 구제역(口蹄疫) 열풍이 이곳을 휩쓸었고, 지금도 곳곳에 살(殺) 처분한 가축을 묻은 구덩이가 당시의 참혹한 모습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당시 이 살풍경한 현장을 목도한 필자는 큰 충격을 받았는데, 인간의 탐욕이 불러온 이 참상을 어떻게 참회해야 할지 지금도 고민스럽기만 합니다.

죽산가는 길

장암리에서 죽산천을 건너 비석거리가 있는 죽산리로 이릅니다. 지나는 길에 천주교 죽산성지를 거쳐 가는 길가에서 무자수(무자치, 물뱀)가 개구리를 몸에 칭칭 감아 질식시키는 모습을 봅니다만, 생태계의 먹이사슬이 작용하는 장면이라 간섭하지 않고 지나칩니다.

지금의 죽산은 한적한 소도시에 지나지 않지만, 전통시대에는 교통의 요충으로 중시된 곳이었습니다. 삼국시대에는 백제 고구려 신라가 차례로 차지하며 국경을 다투었고, 그런 전략적 중요성은 후삼국 통일전쟁 때에도 이어져 왕건과 견훤이 이곳을 두고 패권을 겨루기도 했습니다.

이후 고려가 이 지역을 차지하면서 남방 지역에 대한 전진기지로 활용하였고, 그 자취는 이곳의 망이산성·죽주산성·봉업사에 고스란히 남아 있습니다. 그 가운데서도 죽산 들머리의 봉업사(奉業寺)는 통일신라시대에 창건된 이래, 광종 때에 이르러 태조 왕건의 전승지를 기리기 위해 왕의 진영(眞影)을 두고 숭모했던 곳입니다. 광종은 죽주(竹州: 지금의 죽산)의 교통·전략적 중요성을 인식하고 봉업사와 함께 죽주산성과 망이산성을 정비하여 남방을 견제하는 거점으로 삼았던 것이지요.

이런 교통지리적 중요성은 고려 중엽에 몽골의 침입을 방어한 사실이나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해 문경으로 갔다가 돌아올 때, 이곳 봉업사에 모신 태조의 진영을 알현한 <고려사>의 기록으로도 헤아려 볼 수 있습니다.

봉업사지

죽주산성 남쪽 기슭에는 고려시대 진전사원(眞殿寺院: 돌아가신 왕의 진영을 모시고 명복을 비는 절, 조선시대의 원찰과 비슷하다)인 봉업사(奉業寺) 터가 있습니다. 절의 이름이 확인된 것은 1966년의 경지정리 때 나온 향완과 금고(쇠북)에 새겨진 명문에 의해서입니다.

   

통일신라시대에 창건된 봉업사는 고려시대에 이르러 더욱 중시되었는데, 그것은 고려 태조의 진영을 모셨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실은 <고려사> 공민왕 12년(1363) 2월 병자에 '죽주(竹州: 지금의 죽산 일원)에 행차하여 봉업사에서 태조의 진영을 알현했다'는 기록으로 방증되며, 최근의 발굴조사에서 준풍(峻豊: 광종 때의 연호, 960~963)이라 새긴 명문기와와 막새, 청자, 중국 자기들이 다량으로 출토된 것은 그런 전성기의 모습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습니다.

절의 이름으로 보아 봉업사는 나라를 창업한 것을 기려 세운 호국 사찰로 헤아려집니다. 그러나 1997년의 발굴조사에서 출토된 명문 기와를 통해 사찰의 창건 시기가 통일신라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그 이름은 화차사(華次寺)였음이 밝혀졌습니다. 봉업사지에 남아 있는 유물은 죽산리 오층석탑(보물 435호)과 당간지주(경기도 유형문화재 89호)가 있으며, 이밖에 칠장사로 옮겨진 석불입상이 있습니다.

/최헌섭(두류문화연구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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