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자와 조형예술이 다양한 매체와 도구로 만나는 '문자문명전'이 지난 10일부터 16일까지 창원 성산아트홀에서 열렸다. 이 전람회는 문자문명의 시작을 시사하는 창원 다호리 고분에서 발견된 다섯 자루의 붓을 매개로 문자와 일상 언어를 조형의 요소로 해석하거나, 문자에서 형상과 조형의 의미를 찾는 전시이다.

전시에 앞서 '다호리 붓과 문자문명의 전개'를 주제로 학술세미나도 가졌다. 한국에서 서예(書藝)와 일본의 서도(書道), 중국의 서법(書法)이 한자리에 모여 예와 도, 그리고 법으로 문자가 가진 다양한 소통의 방식을 모색한 것이다.

예로부터 자로 잰 듯 정확한 것은 화공(畵工)이고, 마음먹은 대로 손이 가는 것을 화재(畵才)라 한다. 조선 후기 화가 공재(윤두서)는 이를 두루 갖추면 화도(畵道)가 이루어진다고 했다. 공재가 말한 그림의 길은 무엇인가.

작품 속의 숨겨진 문자와 텍스트, 그리고 이미지가 같은 공간에서 뒹구는 서구 미술과 만난 동양의 문자들은 화면(평면)이라는 공간 개념과 화해를 이뤄야만 했다. 주체인 그리는 자와 객체인 그림을 분간하지 않았던 형이상의 세계는 과연 화면이라는 전혀 다른 미학적 전통과 만날 수 있을까?

20세기 서양이 자기 전통을 부인함으로써 모색한 새로운 표현들 가운데 추상표현주의와 엥포르멜의 '서체적' 표현이 있었다. 그럼에도 '즉흥'이라는 새로운 개념은 우연성, 시간성, 음악성(운율), 속도감과 더불어 문자의 속성을 공유하면서 물리적인 공간을 객체로 인식하는 드로잉이란 이름을 얻었다.

애초 동양의 문자에는 조형예술의 실마리가 들어 있었다. 하지만 소통의 진행 방향을 달리하는 이유로 더디고 더디게 문자와 조형 언어로 다시 같은 자리에 서게 된 것이다.

   

문자가 남기는 흔적은 화면 위에서 회화적으로 존재한다. 우리가 붓 한 획에 모으는 정신을 중요시했던 것은 바로 그 제스처에 응집된 기운이 그림을 완성한다고 보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결국 문자를 조형적 요소로 활용한 작품과 애초 해독 불가의 글자그림이 뒤섞여도 다채로운 울림이 가능한 이유는, 문자가 독립적 존재로 의미를 갖는 동시에 미술과 교류하면서 그 의미가 풍요로워지는 탓이다. 문자문명전은 이런 점에서 가능성이 있는 문화콘텐츠임이 분명하다.

2000년 전 다호리에 살았던 그들이 붓으로 하고자 했던 것은 무엇일까? 전시가 끝나고도 여전히 아쉬움이 남는 것은, 김종원 한국문자문명연구회장의 말처럼 문자, 즉 형음의(形音義)를 붓이라는 도구로 어떻게 끌어내고 미학적으로 표현할 것인가 하는 고민이 아직 부족한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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