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의 대명절인 추석이 1주일도 남지 않았다. 고향 앞으로 갈 생각에 벌써부터 설레는 건 나뿐만이 아닐 것이다.

추석이 되면 여러 생각이 나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강렬한 기억은 할머니 댁에 가서 어른들과 함께 앉아 송편을 빚었던 모습이다. 어릴 적 추석이 되면 난 항상 할머니 댁에 가서 송편을 빚었다.

아버지는 여덟 형제 중 여섯 번째로 우리 엄마가 막내며느리였다. 대가족이었던 우리는 명절 이틀 전부터 차례를 지내기 위해 음식을 해야 했고, 차례음식 외에도 가족들이 먹을 세 끼 음식을 해내느라 여자들은 부엌에서 나오질 못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어머니는 정말 추석 내내 일을 하고 명절이 끝나야 허리를 펴고 누울 수 있었다. 할머니 할아버지 다 살아계시고 형제가 많다 보니 추석 연휴 내내 친인척 가족과 손님이 끊이지 않았다. 손님이 올 때마다 상을 내오기 마련이었는데 그때 꼭 빠지지 않는 것이 바로 송편이었다.

난 송편을 만들 때가 제일 좋았다. 추석 전날 엄마 손을 잡고 방앗간에 가서 쌀을 빻아서 오면 저녁에 남녀 할 것 없이 온 식구가 함께 둘러 앉아 쌀 반죽을 하나씩 옆에 두고 콩이나 깨 같은 소를 넣으며 송편을 만들었다. 어른들은 송편을 빚을 때면 꼭 한마디씩 했다. 누구 송편이 더 예쁘나. 나중에 누가 더 예쁜 반쪽 만나려나.

어린 나는 결혼이 내 얘기도 아니면서 괜스레 예쁘게 빚어야겠다는 일념에 손에 힘이 들어가곤 했다. 나중에 꼭 멋진 사람 내 반쪽으로 만나야지 하면서…. 그렇게 난 송편을 만들면서 가족들끼리 도란도란 앉아 담소를 나누는 그 시간이 즐거웠다.

요즘은 송편을 직접 빚는 집이 드물다. 재료 준비부터 완성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는 송편. 몇 시간씩 쪼그리고 앉아서 모양을 일일이 만들다보면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 사먹는 거에 비해 맛은 그다지 없다는 것이다. 시집을 와서 난 딱 한 번 송편을 빚었다. 어머님은 며느리가 고생하는 게 싫은 건지 그 다음해부터는 송편을 필요한 만큼 근처 떡집에서 사오셨다.

그렇게 시대가 많이 변했다. 요즘엔 명절 음식 만드는 것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려 하지 않는다. 제사상도 배달시키는 요즘, 누가 한 자리에 몇 시간씩 앉아서 같은 일을 반복하려 하겠는가. 옛날에 비해 가족 수도 적어졌으니 음식량도 그만큼 적어지고, 적어진 음식량만큼 우리 몸은 편해졌지만 가족끼리 무언가를 공유하며 함께 이야기 나누는 시간은 적어졌다. 송편에 대한 기억이 정말 추억이 될까봐 두렵기도 한 요즘이다.

   

딸을 키우면서 난 다시 송편이 빚고 싶어졌다. 내 딸도 나처럼 명절에 대한 기억이, 명절에 대한 추억이 있었으면 하는 바람에서인지도 모른다. 이번 추석에는 직접 딸을 데리고 방앗간에 가서 쌀을 빻아 송편을 빚어야겠다. 예쁜 송편을 빚어야 나중에 잘생긴 신랑을 만날 수 있다는 덕담도 함께.

나중에 우리 딸이 커서 그 딸에게 송편에 대한 추억을 이야기해줄 수 있도록 말이다.

/김성애(구성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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