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영로 옛 길을 되살린다] (28) 모로원~석원~석교촌

가을이 완연한 이즈음은 절기상 백로에서 추분으로 넘어가는 때입니다. 백로(올해는 9월 7일)에서 첫 5일인 초후(初候)는 기러기가 날아오고, 두 번째 5일인 중후(中候)에는 제비가 강남으로 돌아가고, 추분과 가까운 말후(末候)에는 뭇 새들이 먹이를 갈무리한다고 합니다. 이렇듯 철새들의 이동이 분명한 시점인데, 조상들은 이때 내리는 비와 바람으로 한해 농사를 결정짓는 중요한 잣대로 삼았습니다.

그런데 요즘 내린 비와 바람은 심해도 너~무 심해서 걱정입니다. 오늘 여정은 숭선참 옛터에서 모로원-장자울고개-이진봉 앞길-응천-아홉살이고개(구사리고개)-관말-석원(어재연 생가)-석교촌을 지나 경기도에 드는 길입니다.

모로원(毛老院)

숭선참 옛터에서 문락리를 지나 3km 정도 걸으면, 모로원이 있던 모남리 모도원 마을에 듭니다. 모로원에 대해 <신증동국여지승람> 충주목 역원에 '우원(隅院)은 고을 서쪽 65리에 있다' 고 했습니다. <대동여지도>에는 숭선참에서 내를 건너 충주에서 60리 떨어진 곳에 모로원(毛老院)을 표시하였고, <조선도>에는 고개 너머에 모도원(慕道院)을 그려 두었습니다.

앞의 당우리(堂隅里) 돌모루에서 살펴보았듯 모루는 모가 져서 굽이도는 곳 또는 돌로 둘러싸인 산모퉁이를 이르는 말로 여겨집니다. 그러니 모로(毛老·慕老)는 한자의 소리를 빌려 그리 적은 것이며, 모도(慕道·慕陶)와 모독(毛禿)은 그 변이형으로 보입니다.

모퉁이의 뜻을 지닌 모루의 음차가 모로(毛老)로 표기되고 그 훈차 표기가 바로 원에 대한 첫 기록을 남긴 <신증동국여지승람>의 우원(隅院)이니 모로원은 모퉁이 모롱이 모루에 있는 원이라 할 수 있는 게지요. 위에서 보았듯 모로 모도 모독은 모가 져서 굽이도는 곳을 이르는 모루를 표기하기 위한 여러 방식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던 것이 이곳의 지명 전설에서 보듯 모도원(慕陶院)을 도연명을 사모하여 그렇다느니 하는 생성설화를 갖게 된 것은 모루 모로의 원래 의미를 잊어버렸기 때문입니다.

모남리는 수리산(679.4m) 남쪽 골짜기에 자리 잡은 아늑한 마을입니다. 수리산은 차의산(車衣山)이라 적고, 수레의산이라 풀기도 하는데, 뜻은 모두 중심 산을 이르는 수리산에 닿아 있습니다. 예서 옛길은 지금의 지방도 쪽이 아닌 장자울고개를 넘습니다만, 그 길이 험하여 길손의 짐을 노리는 도적이 자주 나타나므로 여럿이 모여 고개를 넘었다고 합니다.

지금 장자울고갯길은 지방도가 남쪽으로 열린 뒤 오랫동안 묵혀지고, 최근에는 골프장이 들어서면서 그나마 삼켜버렸습니다. 이런 탓에 옛길 걸음이들의 고생이 적잖았고, 우리 또한 그것을 피해 가지는 못했습니다.

어렵게 고갯길을 빠져 나오니 습지로 변한 묵정논이 머잖아 마을이 있음을 예고합니다. 골 안 깊숙이 자리잡은 생리 중턱마을에는 노거수들이 있어 만만찮은 마을 이력을 과시합니다. 안터마을을 거쳐 골을 빠져 나오니 다시 옛길은 생리 중생마을에서 지방도와 만나는데, 이즈음이 <대동여지도>의 천곡(泉谷)으로 헤아려집니다. 이 마을 들머리에는 동요마을 동요학교 간판과 함께 윤석중 선생의 '고추먹고 맴맴'이란 동요비가 세워져 있습니다.

백로 중후 무렵의 아홉살이고개. 자욱이 낀 안개라 운치를 더한다. /최헌섭

 

이진봉(夷陣峰)과 응천(凝川)

예서 생극면 소재지를 향해 가는 길에 주막거리 두껍바위를 거쳐 임진왜란 때 진을 쳤던 이진봉(夷陣峰·231.1m) 북쪽으로 난 길을 따라 응천을 건너 아홉살이고개로 이릅니다. 이진봉의 테뫼식 토성은 규모가 작아 보루(堡壘)의 수준이지만 남쪽의 음성 진천, 북쪽의 여주 이천, 남동쪽의 충주로 이르는 교통상 요충지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이진봉 서쪽의 응천(應川)은 옛 이름이 수리내임을 보면, 응천(凝川)으로 적어야 옳아 보입니다. 응(凝)의 훈이 '서리다'이니 모두 동쪽을 이르는 우리말 살 또는 사라를 적기 위해 그와 소릿값이 비슷한 훈을 가진 응(凝 : 응천) 또는 차(車 : 차의산) 등이 남아 있는 것이지요. 우리 지역 밀양강의 옛 이름이 응천이고, 그 우리말 이름이 살내인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아홉살이 고개를 넘어 무극역으로

곤지애 옛 주막촌을 지나고 응천을 건너 험하지 않은 아홉살이고개를 넘으면 쌀맛 좋기로 유명한 경기도 이천(利川) 땅이 지척입니다. 바로 이 고개가 옛적에는 경기와 충청의 경계였는데, 지금은 고갯마루에 큰바위얼굴공원이 들어앉았습니다. 내려서면 <대동여지도>에 관촌(館村)이라 표기된 팔성산(八星山·378m) 남쪽 자락의 관말에 듭니다. 이 지도를 보면, 바로 그 서쪽에 무극역(無極驛)을 표시하였는데 관촌은 이 역에 딸린 역관 등의 건물과 관련되는 지명으로 보입니다.

무극역이 있던 이곳이 지금은 충청북도 음성군 생극면에 속하지만, <세종실록> 지리지에는 경기도 광주목 음죽현(陰竹縣)으로 나옵니다. 음죽현(현 중심지는 장호원읍 선읍리)의 동남쪽 경계는 충주까지 10리라 했으며, 관내에 둔 무극(無極)·유춘(留春) 두 역은 태종(太宗) 원년(1401)에 설치하였다고 했습니다. 한편 <신증동국여지승람> 음죽현 역원에는 '무극역은 현 남쪽 30리 지점에 있다'고 나옵니다.

 

석원(石院)

무극역 옛터에서 낮은 재를 넘어 돌원 돌안(도란)이라고도 불리는 석원에 듭니다. 예서 옛길은 경기와 충청 도계를 넘나들며 걷게 되는데, 드디어 경기도 이천 땅에 발을 들이게 됐습니다. <조선도>를 보면 충주와 음성에서 오는 길이 만나고 갈라지는 교통의 요충으로 되어 있습니다. 앞 지도 권16 사(巳) 오(午)를 보면, 모도원에서 생곡면-부용산(芙蓉山)-육십치(六十峙)-무극면을 지나는 여정이 묘사되어 있는데, 석원은 무극역의 남서쪽에 표시되어 있습니다. 이로써 보자면 아홉살이고개는 이 육십치(六十峙)를 이르는 것으로 보입니다. 석원의 바로 위쪽으로는 정문말이 있는데, 어충신정문(魚忠臣旌門)이 있어 붙은 이름이며, 그 안쪽 마을에는 충신 어재연(魚在淵) 장군의 생가가 있습니다.

   

<서양 제국주의 침략군과 격전 치르다 전사>
-어재연·재순 형제

통영로 옛길가의 산성 1리 양달말은 병인양요(丙寅洋擾·1866년)와 신미양요(辛未洋擾·1871년) 때 강화도에서 서양 제국주의 침략군과 격전을 치르다 순국한 어재연·어재순(魚在淳) 형제의 생가가 있는 곳입니다. 생가는 충신의 고향답게 오래된 산성을 머리에 인 팔성산 남녘의 볕 잘 드는 곳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장군은 병인양요 당시 프랑스 로즈 함대가 강화도를 침략하였을 때 병사를 이끌고 광성진(廣城鎭)을 수비하였고, 신미양요 때에는 진무중군(鎭撫中軍)이 되어 600여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광성보에서 미군을 맞아 싸웠습니다. 황현의 <매천야록>에는 "신미년 여름에 미국인들이 강화도를 침범했는데, 전 병사 어재연이 순무중군(巡撫中軍)으로 나가 싸우다가 패해 죽었다. 어재연은 군사를 이끌고 광성보(廣城堡)로 들어가 배수진을 치고도 척후병을 세우지 않았다. 적군은 안개가 낀 틈을 타 엄습했으며, 보를 넘어 난입했다. 어재연은 칼을 빼들고 싸웠지만 칼이 부러졌다. 그래서 연환(鉛丸)을 움켜쥐고 던졌는데, 맞은 자들이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그러나 연환마저도 다 떨어지자 적들이 그를 창으로 마구 찔렀다. 그가 반걸음도 물러서지 않고 그 자리에서 죽자 적들이 그의 머리를 베어 갔다"고 당시의 참혹한 상황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 전투에서 아우 재순과 더불어 그의 부대는 장렬하게 순국하였으니, 뒤에 병조판서에 추증하고 마을에는 정문이 세워졌습니다. 이런 정을 기려 지금의 정문말에 충장공 어재연(魚在淵·1823~1871)과 그의 동생 어재순(魚在淳·1826~1871)을 모신 충장사(忠壯祠)를 건립하고 두 충신의 정문(旌門)을 세웠습니다. 정문말 안쪽에 있는 어재연 생가는 1800년대 초에 지은 것으로 추정되는 초가집으로, 앞에 넓은 마당을 두고 사랑채와 안채·광채가 모여 튼 'ㅁ'자형의 배치 구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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