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영로 옛 길을 되살린다] (27) 충주 당우리~용안역~숭선참

아침저녁으로 느낄 수 있는 선선한 바람은 벌써 가을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지난여름 땡볕 아래서 자지러지게 울어대던 매미 소리도 어느새 잦아들었고, 남녘 들판에서는 성급한 벼 수확 소식이 들려오고 있습니다. 지난 며칠 사이 연달아 강습한 태풍에 중원(中原) 들녘은 피해를 입지 않았는지 모르겠습니다. 오늘은 장록개에서 당우리를 거쳐 옛 용안역-미륵원-숭선참으로 이르는 길을 걷습니다.

장록개에서 당우리로 이르는 옛길은 요도천 북쪽의 들판을 질러 나 있었습니다만, 경지 정리로 없어져서 지금은 구릉 끝자락을 따라 난 길로 해서 걷습니다. 이 길을 따라 3km 정도를 걸으면 당우리(당모루) 돌모루 마을에 닿습니다. 모루는 모가 져서 굽이도는 곳을 이르는 우리말이므로 이곳을 지나는 길은 당 또는 바위를 끼고 도는 모퉁이 길이 열렸음을 일러주는 우리말 지명이라 여겨집니다.

그런데, <영남대로 답사기>에는 지금은 작고한 고지도 연구가 이우형 선생의 말을 후려 모루는 후(: 이정표)를 이르는 우리말이라 했습니다. 이렇게 보자면, 이곳에는 돌로 쌓은 그런 시설이 있었어야 할 것인데 그런 자취도 없거니와, 사람들도 그런 사실을 기억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돌모루를 거리 표지 시설로 보는 입장은 좀 더 살펴보아야 할 듯 싶습니다.

후는 조선시대의 교통로를 지시하는 중요한 잣대인데, 지금은 대부분 없어져서 실물이 남아 있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다만, 함안군 산인면 입곡리에 이런 예가 있어 살펴봅니다. 이곳의 후는 돌을 돈대(墩臺)처럼 쌓아 그 꼭지에 선돌을 세우고 곁에 나무를 심은 경우입니다. 선돌의 앞에는 뭐라 이정을 나타내는 글자를 새겼던 것으로 보이지만 마멸이 심해 알아보기 어렵습니다. 함안 입곡리의 후는 창원 근주역에서 함안으로 이르는 노정에 세운 것으로, 거기서 함안읍성까지의 거리가 약 10리이므로 후로서의 요건을 잘 갖추고 있다 하겠습니다.

용안역(用安驛)

돌모루를 지나 신청리 수청골에 이르는 마을 한 가운데에는 사육신의 한 분인 박팽년을 모신 사우(祠宇:충북도기념물 제27호)가 있습니다. 사우를 처음 건립한 때는 영조 51년(1775)이며, 지금의 건물은 1968년에 중수한 것이라 전합니다. 사우를 지나 수청골 남쪽에서 요도천을 건너면 신니면 소재지인 용원리 용원마을에 듭니다.

이곳은 조선시대 연원역에 딸린 용안역(用安驛)이 있던 곳인데, 마을 이름이 그런 것은 용안역을 용원역(龍院驛)이라 부르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용안역은 <신증동국여지승람>과 <여지도서>에 '관아의 서쪽 45리에 있다'고 했고, <조선지도>에는 그 자리에 신석면역(薪石面驛)이라 적었습니다.

용안역 옛터 지나 원평리 미륵댕이 가는 길.

미륵원(彌勒院) 미륵댕이

용안역 옛터에서 서쪽으로 숭선참 가는 옛길 가에 있는 원평리(院坪里)는 예부터 사람들의 왕래가 잦아서 신라 선덕여왕 때 선조사(善祖寺)가 창건 운용되다가 병자호란 때 불타 없어지고, 지금은 그 자리에 석탑(충북도유형문화재 제235호), 석등, 미륵불(충북도 유형문화재 제18호)이 남아 옛 자취를 전하고 있습니다. 이곳 원평리 미륵댕이는 이름에서 짐작할 수 있듯 미륵원(彌勒院)이 있던 곳입니다.

이곳에 모신 갓 쓴 미륵불은 고려 때 만든 것이고, 사원에서 원을 적극적으로 운영한 시기 또한 고려 시대인지라 이곳에 있던 원집은 그때부터 운영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충주목 역원에 '미륵원은 고을 서쪽 50리에 있다. 이름을 광수(廣修)라고도 한다'고 했으며, 병자호란 때 불타고 복구되지 않아서 영조 임금 때 편찬된 <여지도서>에는 실리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후로도 돌부처는 그 자리를 지키며 길잡이 구실을 제대로 해왔습니다.

미륵은 먼 미래에 중생의 교화를 위해 오시는 부처를 이르는데, 이런 신앙은 난세에 민중운동의 이념적 배경으로 작용하기도 합니다.

동학혁명(갑오농민전쟁) 당시에는 봉기를 촉구했던 서장옥 부대와 이를 반대했던 손병희 부대가 이곳에서 화해하고 서울로 진격하기로 약조한 뜻 깊은 곳이기도 합니다. 그들이 이곳을 화해의 장소로 삼은 것은 미륵댕이 부처님이 그들의 바람을 들어주리라는 믿음 때문이었으리라 여겨집니다.

   

숭선참(崇善站)

미륵댕이를 지나 머잖은 문숭리 숭선마을에는 숭선참(崇善站)이 있었는데, 그곳에 신덕저수지가 들어서면서 옛터는 물에 잠겼습니다. 저수지 동쪽 가에는 '용당이'라는 지명이 있어 저수지가 들어서기 전에도 이곳은 물이 성해서 옛적에는 더러 무제를 지내기도 했을 거라 여겨집니다.

숭선참은 가까이에 있는 숭선사(崇善寺:사적 제445호)에서 비롯한 이름입니다. 숭선사는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에 광종 5년(954)에 선비(先:임금의 돌아가신 어머니)인 충주 유씨 신명순성왕후(神明順成王后)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세웠다는 짧은 기록을 남겼습니다만, 세 차례에 걸친 발굴조사에서 숭선(崇善)이라 새긴 기와의 출토로 사실(史實)을 증명하였고, 사례가 많지 않은 고려 시대 가람의 전모를 이해할 수 있는 자료를 더하였습니다.

   

/최헌섭(두류문화연구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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