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새누리당 대선 후보의 '광폭 행보'가 화제다. 고 노무현 전 대통령 묘소를 참배하고 서울 청계천 전태일 동상 앞에 헌화했다. 과거와 화해, 국민대통합이라는 명분이 따라 붙었다.

민주통합당을 비롯한 야권은 당혹해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정치쇼'라 공격하면서 실질적인 반성과 조치 등 진정성을 보이라고 촉구했다.

옳고 그름을 떠나 정치적 효과만 따지면 누가 봐도 박 후보의 손을 들어줄 수밖에 없다. 네거티브 공세에 힘이 실릴 리 없고, 실제 여론조사 지지율도 상승세다.

최근 강준만 교수(전북대)가 펴낸 <안철수의 힘>의 주요 메시지를 참조하면 사태 파악이 좀 더 빠를 수 있다. 강 교수는 이 책에서 "2012년 대선의 시대정신은 증오의 종언"이라고 주장했다. "증오시대를 끝장내지 않는 한 아무리 비전과 정책이 화려해도 무의미하다. 누가 이기든 지든 지금과 같은 양극화 구도로 한국은 선진국이 될 수 없다"는 그의 시대인식은 왜 야권의 대응이 무기력한지 이해의 단초를 마련해준다.

"과거 전력, 진정성 문제 등을 세세하게 따지면 다를 것"이라는 반론이 제기될 수 있다. 그런다 해도 야권에 득될 건 없다. 박근혜 후보가 전태일재단 방문을 시도하자 열사의 동생인 전순옥 민주통합당 의원은 이렇게 지적했다. "일회성 이벤트가 아니라면 비정규직, 최저임금, 청년실업, 가계부채 등 이 나라 노동현실의 절박함을 온 몸으로 이해하고 이에 대한 정책을 가장 앞에 세워야 할 것이다."

8월 28일 전태일 동상을 찾은 박근혜 후보가 김정우 쌍용차노조 지부장으로부터 항의를 받고 있다. /뉴시스

묻고 싶다. 그렇다면 민주통합당은 비정규직, 청년실업, 가계부채 등의 책임에서 자유로운가? 이명박 정부 들어 더욱 심화된 측면이 있지만, 무차별적인 정리해고와 노동시장 유연화, 신용카드 발급과 주택담보대출 남발을 가속화시켰던 정권이 김대중·노무현 정부 아니었던가?

누구처럼 또 전·현 정권 책임론을 들먹이며 승자없는 논쟁을 하자는 것이 아니다. 증오는 곧 상대에 대한 자기성찰 없는 일방적인 분노이다. 성찰없는 증오는 필연적으로 명분과 논리에서 허점을 낳을 수밖에 없고, 당연히 일반 대중과 괴리도 더욱 커질 수밖에 없다. 전순옥 의원식의 주장은 지지세력을 공분시키고 결집시키는 데는 효과적일 수 있다. 하지만 진보도 보수도 아닌 약 40%에 이르는 중도·무당파 성향 국민의 마음까지 흔들 수는 없다.

강준만 교수의 시대인식에 공감하는 바 있다면, 다른 대응과 실천이 필요하다. "그럼 전두환과 화해라도 하자는 거냐"는 징징거림은 스스로 무능력을 재입증할 뿐이다. 이를테면 김윤철 교수(경희대)가 얼마 전 <경향신문> 칼럼에서 제안한 박정희 시대 '산업역군'들에 대한 재조명과 보상은 어떨까.

김 교수 말대로 "누구의 주도로 이루어졌든 그들의 노역은 사회적 자원의 자유롭고 평등한 향유를 위한 민주주의적 열망이 퍼져나갈 수 있었던" 원동력이었다. 혹 박정희 시대가 미화되지 않을까 주저하는 건 옹졸한 짓이고 퇴행적인 '진영논리'에서 한 치도 못 벗어난 것이다. '이름없는 노동자'에 대한 존중이야말로 전태일 정신의 정수이자 계승이다.

강 교수의 <안철수의 힘>에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 "증오는 자신의 고통, 분노, 좌절에 대한 해결책이자 수치를 긍지로 바꾸기 위한 시도의 산물이다."(윌러드 게일린) 자신의 수치에 솔직하고 상대의 수치에 관대하며, 상대의 긍지를 자신의 긍지로, 우리 모두의 긍지로 끌어올리는 자가 승리한다. 이번 대선 이야기만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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