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공감] 태풍 앞둔 마산수협공판장 앞 항구

"아 덥네, 더워. 태풍 온다드마. 시원한 커피 한 잔 주소."

중년 아저씨는 길거리 커피 한 잔을 청한다. 와이셔츠 단추를 이미 풀어 젖혀 하얀 속옷을 드러냈다. 반바지에 갈색 가죽 구두를 구겨 신었다. 아주머니도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맞장구친다.

"그러게 와 이리 더운교. 시원하게 한 잔 하소."

익숙한 솜씨로 컵을 이리저리 움직인다 싶더니 금방 얼음이 듬뿍 든 커피 한 잔이 나온다. 한 모금 마신 아저씨는 멀리 바다를 본다. 27일 오전, 아직은 맑다.

창원시 마산합포구 마산수협공판장 쪽 항구는 조용하게 분주했다. 전날부터 이미 태풍 '볼라벤'이 예고됐다. 이곳에서 곧 닥친다는 태풍 이름은 몰라도 2003년 태풍 '매미'를 잊은 사람은 드물다. 거대한 비바람이 손톱을 바짝 세워 이곳을 지나가며 남긴 생채기는 깊고 오래갔다. 태풍 이름보다 중요한 것은 곧 닥칠 태풍이 매미보다 세다는 것이었다. 가늠할 수 없는 재해에 대한 두려움은 그 정도 근거만 있어도 충분했다.

   

"이제 한 척씩 들어오려나."

주름이 깊은 한 아저씨가 물끄러미 바다 쪽을 쳐다본다. 이미 먼 바다에는 덩치가 큰 배들이 한 자리씩 차지하기 시작했다. 아주 큰 배는 항구에 붙일 수 없다. 물밑으로 깊고 무겁게 가라앉힌 닻에 의지해야 한다. 항구 한쪽부터 서서히 배가 들어오기 시작한다. 피항 온 배들이 대부분이다.

"좀 있으면 항구가 다 차겠네."

아저씨는 당연한 말을 한 번 더 확인하듯이 뱉는다.

어선에 탄 선원들은 느긋하지만 꼼꼼하게 배를 대기 시작한다. 평소 잘 내려두지 않는 닻을 물밑에 깊숙이 박아두는 것부터 피항 작업은 시작된다. 팔뚝만큼 굵은 줄은 항구에 야무지게 박힌 말뚝에 단단히 묶어둔다. 이 역시 평소에는 줄 고리를 걸어두기만 하면 되는 일이다. 언뜻 보기에 배 곳곳에 줄을 내려 말뚝에 고정해두면 안전할 듯하다. 하지만, 배 한 곳만 단단하게 고정하는 게 맞다. 거센 태풍 앞에서 물 위에 뜬 배를 움직임 없이 단단하게 고정해두겠다는 욕심은 미련한 게 된다. 오히려 어느 정도는 물에 선체를 맡겨야 배가 덜 상한다. 무겁게 내려둔 닻이 배가 뒤집히지 않게 하고, 말뚝에 묶어둔 줄은 배가 여기저기 휩쓸려 다니는 것을 막는다.

"이 정도면 웬만한 태풍이 와도 뒤집히겄나."

   

한 선원이 자신 있게 말하며 일을 마무리한다. 깊은 주름과 짙게 태운 피부, 몸 곳곳에 잘 발달한 잔 근육이 그런 확신에 힘을 보탠다.

모진 바람을 피하는 배들이 마지막에 할 일은 배 사이에 적당한 간격을 두는 일이다. 다닥다닥 붙여서 서로 묶어두면 안전할 듯하지만, 격한 마찰을 배가 버텨내지 못한다. 배 한 척 정도 들어가는 간격이 적당하다고 하는데, 나중에 배가 몰려들면 그 간격이 어떻게 정해질지 알 수 없다.

이미 정박을 마친 배 한쪽에 외국인 선원 3명과 나이가 훨씬 많이 든 선원 한 명이 둘러앉아 있다. 노인은 도마에 파를 올려놓고 잘게 썰고 있다. 체격으로 봐서는 뱃일보다 배에서 요리하는 일이 더 적당할 듯하다. 피항 작업을 마치고 간단히 먹을거리를 준비하고 있다. 주변에 둘러앉은 외국인 선원 3명은 생김새만 봐서는 국적이 같다. 말없이 다른 배를 보며 쭈그려 앉아 있다. 심드렁한 표정은 태풍이 익숙해서인지, 낯설어서인지 알 수 없다. 그냥 물끄러미 노인이 만들 음식을 기다리고 있다.

언뜻 평화롭게 여겨지는 고요함이 스친다. 다만, 줄 맞춰 세워놓은 배 너머로 보이는 구름이 괜히 예사롭지 않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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